<너의 이름은>과 <플레이타임>의 '우연의 힘'이라는 공통성
해당 게시물은 영화 후반 내용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스포일러에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어느새부턴가 지하철에서 사람구경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하철이 들어온다는 정겨운 딩동댕 소리와 스크린 도어 소리, 철컹철컹 시끄러운 선로 소리도 점차 듣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어폰으로 귀를 막아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조금이라도 눈이 즐겁고 싶어서 핸드폰을 들여다보느라 오감으로 지하철을 느껴보는 일이 이제는 거의 없습니다.
눈과 귀를 틀어막고자 하는 욕구가 유독 지하철에서 폭발하는 이유는 그 공간을 온전히 마주하기가 괴로워서가 아닐지. 보통 출퇴근을 하거나 등하교를 할 때, 또는 일정을 소화할 때 지하철을 많이 이용합니다. 우리의 현생이 시작되는 시점은 지하철이라고 봐도 무방하죠. 보통 출퇴근 피크 타임에 지하철이 더 많이 운행하는 걸 보면, 현생 사이클에 지하철의 사이클도 동시에 흘러가는 듯합니다.
가장 현생을 실감하기에 좋은 공간이기에 자꾸만 핸드폰에 손이 가기 마련입니다. 집에서는 그저 재밌기만 했던 숏츠와 릴스가 그곳에서는 이상하리만큼 도파민 덩어리가 되어서 잠깐이라도 현실을 잊게 해 줍니다. 점점 도파민에 중독되고, 젖어들면서 현실을 마주하기보다는 회피하고 싶고, 핸드폰은 유일한 도피처가 되어갑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회피형이 되어가죠.
에디터도 어느 순간 회피형이 되어버렸습니다. 회피 주의의 발단은 지하철에서부터였으나, 점차 일상으로 퍼져서 핸드폰으로 도피하지 않는 순간이 없을 정도네요. 특히 넷플릭스나 애니는 최근까지 최고의 도피 창구였습니다. 통근 킬링타임용으로도, 자기 전 수면유도용으로도 최고였습니다. 평소처럼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손가락을 바삐 움직였고, 그러다 보니 클릭하게 된 <너의 이름은>, 그리고 <플레이 타임>. 이 작품들은 저의 킬링타임용으로 선택되었습니다. 그러나 도파민을 바랐던 의도와는 달리 이들은 오히려 도파민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는 이유를 알려주었습니다.
살면서 서로 본 적도, 이야기를 건네본 적도 없는 사이인 타키와 미츠하. 어느 순간부터 이 둘은 '꿈'이라는 매개로부터 짧은 만남을 이뤄나갑니다. 초반에 둘의 감정은 낯선 소녀와 소년 간의 괴리감과 어색함, 생전 겪어보지 못한 느낌에서 오는 이상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저 '너 도대체 누구야?'에 그친 생각뿐입니다. 계속된 만남으로 서로에게 든 정은 깊은 감정으로 둘을 이끕니다. 각별해진 타키와 미츠하, 그러나 깊어진 관계와는 반대로 더 이상의 만남은 이뤄지질 않죠. 둘의 인연은 정말 '꿈'에만 그치게 생겼습니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어서 일까요. 그럼에도 1분이라도, 1초라도 만날 수 있는 순간이라면 그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몇 시간을 걸려서 기차를 탔고, 서로의 동네에서 하루 종일 서성였고, 심지어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황혼에까지 몸을 맡깁니다. 성인이 되고 난 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전히 서로를 향한 그리움을 안고 매번 전철을 타는 순간마다 창밖을 바라보죠. 그러던 어느 오후, 타키와 미츠하가 타고 있던 전철은 아주 잠깐 교차하게 되는데, 찰나의 순간에 드디어 서로의 눈이 마주칩니다. 단 1초라는 시간 동안 그토록 간절했던 만남이 이루어지고, 우연으로 시작한 관계가 인연으로 맺어집니다.
만약 이 순간 서로가 딴 짓을 했다면, 차창을 바라보지 않았다면, 잠깐이라도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면, 둘은 계속해서 기약 없는 기다림을 했을 것이고, 꿈과 같던 과거의 만남만 추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한 순간을 더욱 한 순간 답도록
미츠하와 타키의 절실함은 영화적 장치로 인해 한층 더 강조되면서 이들이 바라는 한 순간에 몰입하게 됩니다. 특히 황혼의 시간 동안에는 간절한 마음이 더욱 고조됩니다. 본래라면 만날 수 없을 두 사람이 기적적으로 이어지는 장치이자, 유일하게 얼굴을 맞대고 만날 수 있는 기회인 황혼의 시간. 현실과 비현실이 교차하는 이 짧은 시간 동안에는 안도의 한숨과 더불어 초조한 감정도 절정으로 치닫습니다. 해가 실시간으로 지고 있는 걸 볼 수 있을 정도로 짧고 빠른 일몰이라는 점, 그리고 해가 저뭄과 동시에 두 사람의 얼굴에 드리우는 그림자 연출은 마치 미츠하와 타키의 타이머처럼 느껴지죠.
아마 영화 전체 러닝타임 중에서 미츠하와 타키가 실제로 만나는 장면의 분량은 실질적으로 손가락에 꼽을 만큼 적을 것입니다. 횟수가 적을 뿐만 아니라 시간도 역시 짧으니 말이죠. 미츠하가 타키를 보기 위해 도쿄를 헤매다가 때마침 타키를 발견했을 때, 이 순간은 황혼의 시간보다 더 찰나의 순간이었습니다. 전철 문이 닫히는 중에 자신의 머리끈을 풀러 이름과 함께 타키에게 전달하는 상황은 긴박함 그 자체를 이야기합니다.
운석이 떨어지는 순간, 운명이 연결되는 찰나
운석이 떨어지는 이벤트는 영화에서 가장 상징적인 ‘찰나’의 순간입니다. 그것은 미츠하의 마을이 사라지는 동시에, 타키가 과거를 바꾸기 위해 움직이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운석이 떨어지는 건 단 몇 초에 불과하지만, 그 한 순간이 이들의 세계관을 완전히 뒤바꿔버리죠. 결국, 운석은 찰나의 순간과 운명의 전환점을 동시에 상징하는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운석의 꼬리는 서로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미츠하와 타키가 연결되는 순간에 나타나, 운명의 실처럼 두 사람을 이어주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타키가 미츠하의 마을에서 쿠치카미자케를 발견했을 때, 발을 헛디디는 순간 운석의 그림이 스쳐 지나가는 장면에서도 유사합니다. 결국, 이들의 찰나에는 언제나 운석이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まどろみの中で 生温いコーラに
깜빡 조는 사이 미지근해진 콜라
ここでないどこかを 夢見たよ
꿈속에서,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보았어
教室の窓の外に
교실의 창밖으로
電車に揺られ 運ばれる朝に
아침이 전철을 타고 흔들리며 오던 때에
運命だとか未来とかって 言葉がどれだけ手を
운명이니 미래니 하는 단어들이
伸ばそうと届かない 場所で僕ら恋をする
닿지 않는 곳에서 우리는 사랑을 하는 거야
sparkle <너의 이름은 ost> - Radwimps
시원했던 콜라가 미지근 해질 만큼의 깜빡 조는 사이에 꿈속에서 더 꿈같은 교실 창밖을 마주하고, 아침이 전철을 타고 흔들리는 시간 동안 사랑할 정도로, 아마 찰나가 주는 세상 만물의 시너지는 엄청날지도 모릅니다. <너의 이름은>은 미츠하와 타키의 운명적인 이야기를 그려내지만,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한 우연에 머물지 않아 보입니다. 찰나의 순간들이 모여 운명이 되고, 그 운명은 우리의 선택과 노력 속에서 비로소 완성됨을 이야기 합니다. 우연은 결국 현실을 살아가며 마주하는 순간들이고, 현실 속에서 살아가려는 의지와 노력이 클수록 그 우연이 만들어내는 힘도 더욱 커지는 것이 아닐까요. 미츠하와 타키에게 이뤄진 기적도 결국 그들이 일궈낸 기적으로, 서로를 향한 간절함과 그 간절함의 손길이 존재했기에 이루어졌을테니 말입니다.
<너의 이름은>과는 또 다른 우연의 힘
프랑스 감독 자크 타티의 숨겨진 걸작 <플레이 타임>은 2시간 내내 자극적인 것 하나 없는 말 그대로 디톡스에 제격인 작품입니다. 특정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프레임 속 모든 인물과 사물의 전반적인 상황을 비추기 때문에 주연과 조연의 구분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본 만큼 영화를 이해할 수 있고, 우리가 초점을 맞춘 인물이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영화입니다.
플레이 타임은 비즈니스맨 '윌로'가 파리를 방문하면서 에피소드들이 시작됩니다. 이야기를 여는 인물이자 그나마 영화에서 간간히 포커싱 되는 인물이 윌로이긴 하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저마다의 에피소드를 보여줍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바바라'라는 한 여성에게 윌로 다음으로 유독 눈길이 갑니다.
사진을 좋아하는 바바라는 파리에 관광여행을 하는데, 파리의 모든 모습이 바바라에게는 환상적이라 그녀의 카메라 셔터 또한 매우 바쁩니다. 버스 창밖에 차들이 정갈하게 주차하는 모습, 도로에 세워진 가로등의 형태, 길가에서 꽃을 파는 상인과 같은 파리의 풍경들은 그녀에게 최고의 피사체들입니다.
그러나 사진을 완벽히 담아야 한다는 강박이 강해서인지 그녀는 카메라 앵글에 들어오는 행인들에게 불평, 불만이 가득하기만 합니다. 완벽하고 정갈한 사진에만 몰입해 있느라 그녀의 카메라에 다가오는 것들은 방해물에 불과합니다. 그녀의 사진 여행과 함께 어느덧 파리에 저녁이 찾아오고 바바라는 관광코스를 따라 어느 레스토랑에 방문합니다. 그곳은 마치 미슐랭 레스토랑인 마냥 정장과 드레스를 갖춰 입은 손님들에, 직원들의 유니폼과 행동도 fm으로 격식을 차립니다. 어떠한 날 것도 허용하질 않습니다. 하지만 바바라가 방문한 날에는 식당이 준비조차 되질 않아 사람이 몰려드는 동시에 난장판이 벌어집니다. 타일이 떨어져 나가고, 천장이 주저앉고, 유리문이 깨지고, 악단이 화를 내며 떠나가죠.
난리가 난 식당에서 사람들은 난리가 날수록 더 그 분위기를 즐깁니다. 다 같이 무대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서로 웃으며 대화도 나눕니다. 엄중한 분위기였던 때와 달리 오히려 사람들은 난장판 속에서 웃음을 짓죠. 바바라도 마찬가지로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기분이 한껏 고조되고, 피아노까지 연주하며 파티를 즐깁니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웃고 떠들면서요. 카메라를 들고 불평하던 그녀의 찡그림은 온데간데 사라졌습니다.
레스토랑의 난장판 파티 이후 그녀의 카메라는 더 이상 완벽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카메라에 우연히 들어온 사람들도 방해물이 아닌 작품의 또 다른 피사체가 됩니다. 모든 격식에서 벗어나 파티를 마음껏 즐기는 시점부터 그녀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카메라에 들어온 사람들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다가오는 모든 사람들과 경험들을 마다하지 않고 즐기며, 그녀의 파리 관광은 플레이타임으로 변화하죠.
바바라의 에피소드는 타 인물과의 접점으로 더욱 풍요로워집니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윌로 씨와 바바라 씨는 아슬아슬한 마주침으로 만나게 되는데, 마침내 후반에서는 마주침에서 더 나아가 친한 관계로 발전하게 됩니다. 잇따른 우연이 모여 서로의 잊지 못할 추억으로 이어진 바바라와 윌러. 그들의 관계성은 바바라가 파리를 진정으로 즐기게 되는 타이밍과 맞물리면서 더욱 인상적입니다.
해당 작품은 마땅히 하이라이트라고 콕 집을만한 내용이 없을정도로 루즈하고 잔잔한 영화임이 분명합니다. 리뷰에서도 영화적 기법과 연출에 관심이 있지 않은 이상 지루하고 졸릴 것이라고 평가할 정도니 말이죠. 하지만 리뷰와는 반대로 그들의 에피소드는 한 시도 방심할 수 없을만큼 박진감이 넘칩니다. 우연적이고 순간적인 만남과 경험으로 전개되는 에피소드라 조금이라도 딴 생각을 했다가는 인물들이 만나는 순간을 놓치게 되니까요. 바바라의 시점이 아닌 윌러나 다른 인물들의 시점으로 영화에 몰입한다 하더라도, 서로의 우연이 또 다른 우연을 낳다가 끝내 그들만의 또 다른 인연이 만들어지는 것을 볼 수 있으니, 작은 디테일까지도 섬세히 관찰해야하는 작품입니다.
눈으로 느껴야 더 와닿는 그의 메세지
플레이타임의 독특한 시각적 연출도 관객의 눈을 바쁘게 만듭니다. 우연에서 비롯되는 인물들의 감정을 표현하기엔 매우 추상적이고 까다로웠을 텐데, 타티는 그것을 완벽하게 해내죠. 레스토랑 사건을 기준으로 영화 속 파리는 회색빛에서 다채로운 놀이공원으로 변하는데, 이는 바바라가 파리를 진심으로 즐기기 시작하면서 이루어집니다. 처음에는 ‘완벽을 담아내야 하는 도시’였지만, 결국에는 순간을 즐기고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가는 놀이터 같은 존재로 변하는 바바라의 파리. 그녀의 파리는 그녀를 정형화된 세상에서 동심을 되찾게 해줍니다. 기계적이고 무미건조한 건물과 사람들로 가득했던 파리는 처음에는 차가운 회색빛이었지만, 점차 따뜻한 색감으로 물들며 바바라의 변화를 고스란히 비춰냅니다.
찰나의 순간을 포착해 작은 웃음을 선사하는 타티의 연출은 우리에게 일상의 소소한 행복이 무엇인지 다시금 일깨워 줍니다. 깔끔함이 곧 획일화로 이어지는 지루한 사회 속에서도, 시선을 조금만 달리하면 낭만은 곳곳에 숨어 있음을 보여주죠.
인테리어 시공인들의 움직임을 마치 퍼포먼스처럼 바라보며 휘파람을 부는 행인들이나, 요리를 건네는 셰프의 머리에 커튼이 모자처럼 걸쳐지자 이를 나폴레옹 황제 같다고 농담하는 장면. 이 장면들은 삶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세상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일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단순한 우연이라 하더라도 그 우연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인간다운 삶을 살 것인지, 기계적인 삶을 살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이 유려하지 않은 방식으로도 충분히 표현되네요.
바바라가 여행하며 감탄을 자아내는 장면들을 잠자코 보면, 순간적일 뿐이지만, 그 장면이 저절로 감동을 일으킵니다. 그저 유리창에 비춰진 에펠탑과 개선문임에도 유리창이 마치 세련된 프레임으로 보이는 장면은 타티의 메세지가 단번에 와닿습니다. 잠시 멈춰선다면 무의미하게 반복하는 일상들이 작은 감동으로 올 수 있다는 그의 메세지가 말이죠. 바바라의 감탄도 아마 똑같은 감동에서 나온 감정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봅니다.
일련의 작품들이 전해주는 감동은 모두 찰나의 순간에서 비롯됩니다. 츠키와 미츠하가 창밖으로 마주친 1초의 순간, 바바라가 겪는 모든 우연들이 바로 그 찰나입니다. 만약 이들이 잠깐이라도 다른 것에 이목을 돌렸다면, 현실을 제대로 마주하지 않았다면, 츠키와 미츠하는 영원히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바바라는 파리의 여행을 카메라에 갇힌 탐방으로 끝내고 회색빛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일상이 릴스와 숏츠, 각종 디지털 콘텐츠로 물들어버린 우리에게도 그 찰나의 순간이 여러 번, 수백 번 우리에게 찾아오고 있지 않았을까요? 실제로 전자기기가 끝없이 뇌를 자극하면서 우리의 신경계는 투쟁-도피 반응을 일으켜 현실을 도피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현실에 대한 감각을 없애버리면서, 정상적인 상태로 일상을 살아갈 수 없도록 하죠. 이러한 권태로움으로 결국 살맛 나게 만드는 순간조차 도피해 버리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에서 자신과 공통점이 있는 사람을 만날 확률은 20만 분의 1이고, 그 사람과 알고 지낼 확률은 200만 분의 1이고, 그 사람과 연인이 되는 건 2000만 분의 1일이다.
이런 엄청나게 희박한 확률로 찾아오는 인연도, 현실 도피에 빠지면 0%로 만들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잠깐이라도 그 좁은 창구에서 벗어나, 또 다른 인연과 또 다른 가능성의 세계를 만나보는 건 어떨까요. 이어폰을 빼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는 순간, 또 다른 찰나의 기회가 펼쳐질지도 모르니까요. 작은 우연의 힘을 믿으며, 에디터는 지하철에서의 도피를 잠시 멈추고자 합니다.
Edited by. Han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