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위에 누워

소진되다

by 김하녹 Ha Nok Kim


영원이 없기에 영원을 바랍니다.
모든 일에 끝이 있다는 걸 알기에,
함께 시간을 보내고 난 뒤 작별 인사를 할 때면,

그 순간이 우리의 마지막일까 봐 늘 두렵습니다.

그래서 가는 뒷모습을 눈에 꾹꾹 눌러 담습니다.

영원이 없기에 영원을 바랍니다.
한평생 타오를 것 같은 불꽃도,
흠뻑 비에 젖어 흔적도 없이
꺼질 수 있음을 이제는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딛고

일어서는 이야기를 좋아하지만,


‘결국’은 무너지고 내려놓는 결말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모두가 잠든 새벽,

나는 그림을 이제 그만 그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작업을 집에서 겸하다 보니 방은 늘 엉망이었고,

물감이 튄 바닥을 밤새 닦으며, 내가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것들을 갈망하며 늘 괴로웠거든요.

멋진 작품이 손에서 태어날수록,
나와 나의 ‘자기만의 방’은 엉망이 되어갔습니다.

나는 소모되고, 소진되었습니다.
다 타버리고 재만 남아,

한 줌 바람에도 폭풍을 맞은 듯 사방으로
흩어질 일만 남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무색무취의 자아가 낯섭니다.
색도, 냄새도, 목소리도 비어 있어요.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아무것도 없음’이 편안합니다.

아무것도 없기에,
무엇이든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영원을 원했던 마음이,
이제는 유한함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아침이 왔습니다. 익숙한 천장이
지겨우면서도 편안합니다. 며칠 내내
쉬지 않고 내리던 비가 그치고,
커튼 사이로 햇살이 고요하게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습니다.
한 줌 재가 된 채로 눈을 떴습니다.
아직도 그을음이 남은 마음과 몸을
이부자리 깊숙이 파묻었습니다.
오늘은 저를 위해 조금 더 게으름을
부려보려고요. 살아 있다는 게 이런
것이겠지요. 완전히 사라지지 못하고,
완전히 남지도 못한 채 어딘가의
경계에 턱 걸려 있는 상태.

‘나는 참 애매한 사람이구나.’

여기까지 오는데 많은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특별하지 않은 사람은,
여성은, 기억되지도, 기록되지도
않을까 봐 무서웠거든요.


수많은 여성이 역사에서 지워짐에 분노했고,

기록되고 기억됨에 안도했지만,

정작 나는 기록되지도,
기억되지도 않을 수 있음을

받아들입니다.

그래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늘 평범하지 않으려고 애썼는데,

이제는 그냥 결함투성이인 나를

조용히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참 애매한 사람입니다.



여성주의 뉴스레터 <혀끝의 불>

"어디까지 솔직할 수 있어?"

이 편지는 하나의 실험장이다.
무엇을 실험하느냐?

자기 검열이 특기요,
욕망 감추기가 습관인
한국 여성 1 김하녹이,
혀 끝에서만 맴돌던 발칙하고 다소 숭한 이야기를
어디까지 하는지, 얼마나 갈 수 있는지를 실험한다.

공기처럼 존재하는 여성혐오가 지긋지긋하다.
너무 당연하게 거기 있어서
가끔은 허공을 상대로 팔을 휘두르는 느낌도 든다.

A는 말했다.
"하녹아, 한 번 싸우면
끝까지 싸워야 해.
그러니까 그냥 계속 참아."

A에게 물었다.
"그래서 넌 참았어?"

A는 답했다.
"... 아니, 나도 계속 싸워.."

..(중략)..거창한 이야기는 아니다.
거창할 것도 없다.
그냥 모난 모습 그대로,
이 별난 세계를 고군분투 살아가는

한 여성의 기록이다.

그런데 혼자는 싫다.
함께해 달라고 바짓가랑이를 잡고

대차게 매달리고 싶다.

매주 시간이 가장 더디게 흐르는
화요일과 목요일 오후에 당신을 찾아가
문을 열어달라고 생떼를 부릴 것이다

적어도 소중한 그대가 외롭고 심심하지 않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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