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끝에서
1. "힘든 건 다 끝났어."
저는 운명은 스스로 써나가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도 가끔은 운명에 기대어 위로를 받고 싶어 집니다. 곧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진부하고도 막연한 위로를요.
여러분은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인가요? 저는 딱 두 가지가 무섭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 그리고 지나온 저의 삶이 가장 무서워요. 걱정하실까 봐 미리 덧붙이자면,
지금의 삶에는 굉장히 만족합니다. 다만 지나온 시간을 생각하면 문득 마음 한편이 서늘해지곤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은 덜컥 겁이 나서 친한 언니에게 갑작스레 전화를 걸었습니다. 언니는 역학 공부를 오래 하시기도 했고, 제가 아는 분들 중 가장 입이 무겁고 또 다정하고 지혜로운 분이라 제가 무슨 얘기를 해도 괜찮을 것 같았어요.
수화기 너머로 그는 '미래가 궁금한 것이냐'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삶이 무서워요 언니.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지난날과 같다면, 제가 견뎌낼 자신이 없어요'라고 답했습니다.
괜찮을 것이라는 뻔한 답을 듣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날 언니가 제게 해준
말을 여전히 가슴에 품고,
용기를 잃을 때마다 꺼내어
보곤 합니다.
"다 끝났어요, 하녹 씨.
힘든 건 다 끝났어."
2. 세상의 끝에서
독자님은 '세상의 끝'에 가본 적이 있으신가요?
영국 남부지방 브라이튼에는 '세상의 끝'이라고
불리는 세븐시스터즈가 있습니다.
가파른 해안절벽과 끝없이 펼쳐진 초원, 무엇보다도 세상의 끝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매서운 바람이 끊임없이 부는 곳입니다.
삶을 사랑하기에 죽음을
깊게 생각한 순간부터,
저는 늘 이곳에 가고 싶었습니다.
3. 삶에 빠지다.
어찌나 바람이 거세던지요.
눈 한 번 뜨기 어렵고,
얼얼하게 두 뺨을 때리는
칼날 같은 바람에 등반을
몇 번이나 포기할 뻔했습니다.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정상에 오르는 것을 쉬이 허락하지 않을 것처럼, 세상의 끝에서 부는 바람은 차가웠어요.
그런데도, 참 야속하게도,
정상에 다다르자 펼쳐진 풍경이
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바다와 하늘 사이의 경계가
흐릿하고, 파도는 새하얀 절벽에
거세게 부딪혀 부서지던
그 장면이 잊히지가 않아요.
처음에는 너무 추워서
콧물이 흐른다고 생각했는데,
눈물이 나는 것이었어요.
'아, 나는 살아있구나.'
4. 여자들이 계속
살아갔으면 좋겠다.
"나 한강 갈까 봐."
밤이 유독 길어지던 날,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 네가 성범죄자도 아닌데 거길 왜 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죽자 우리. 제발"
이 글에 두서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마음은 차고 넘치는데,
막상 글에 담으려니 어렵습니다.
여자들이 건강하고 안전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기적이라서,
대신 살아줄 것도 아니면서
그래도 나랑 이승에서 재미있게
한바탕 놀아보고 삼도천 건너자고
바짓가랑이를 질척이며 붙잡겠습니다.
여자들이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깊이 생각한 밤,
이 편지를 서툴게, 그러나 진심을 담아 적어 내려갑니다.
"힘든 건 다 끝났어요.
그러니까, 같이 삽시다."
*
여성주의 뉴스레터 <혀끝의 불>
"어디까지 솔직할 수 있어?"
이 편지는 하나의 실험장이다.
무엇을 실험하느냐?
자기 검열이 특기요,
욕망 감추기가 습관인
한국 여성 1
김하녹이,
혀 끝에서만 맴돌던 발칙하고
다소 숭한 이야기를
어디까지 하는지,
얼마나 갈 수 있는지를 실험한다.
공기처럼 존재하는 여성혐오가 지긋지긋하다.
너무 당연하게 거기 있어서
가끔은 허공을 상대로 팔을 휘두르는 느낌도 든다.
A는 말했다.
"하녹아, 한 번 싸우면
끝까지 싸워야 해.
그러니까 그냥 계속 참아."
A에게 물었다.
"그래서 넌 참았어?"
A는 답했다.
"... 아니, 나도 계속 싸워.."
..(중략)..거창한 이야기는 아니다.
거창할 것도 없다.
그냥 모난 모습 그대로,
이 별난 세계를 고군분투 살아가는
한 여성의 기록이다.
그런데 혼자는 싫다.
함께해 달라고 바짓가랑이를 잡고
대차게 매달리고 싶다.
매주 시간이 가장 더디게 흐르는
화요일과 목요일 오후에 당신을 찾아가
문을 열어달라고 생떼를 부릴 것이다
적어도 소중한 그대가 외롭고 심심하지 않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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