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대마도 봄바람

아직도 그곳이 어디인지 모른다. 그러나 가장 나답고, 가장 우리다웠던.

by 한량한양


항상 최고의 컨디션은 아니었지만 여행만 가면 유독 힘이 불끈 솟곤 했었다. 그래서 좀처럼 쉬이 지치지 않고 기운 넘치게 활동을 하곤 했었다. 마흔이 가까워오면서 누적된 피로는 피부로 많이 드러났다. 입술에 염증이 생기거나 잔 피부염들이 종종 발생하곤 했다. 덕분에 계절이 바뀌는 환절기에는 늘 한 달에 한두 번씩은 병원에 다녀야 했다. 그토록 김민우 씨가 칭송해 마지않는 대마도에 가는 날에도 컨디션 조절을 했었어야 했는데, 무리한 일정과 과도한 음주생활로 인해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코는 훌쩍이고 간질거렸으며 목도 따끔거렸다. 아, 아마도 감기에 걸린 것 같다. 그것도 온몸이 다 아픈 몸살감기


감기에 걸리면 물 먹은 솜 뭉텅이처럼 축 쳐지게 마련이지만, 부산으로 향하는 stx에서도 대마도에 도착한 한낮에도 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섬을 돌아보고 숙소에 돌아갔을 때 산해진미가 차려진 저녁 식탁 앞에서도 좀처럼 기운이 나지 않았다. 이것은 분명한 몸살감기다. 대마도는 섬이라 해산물이 저렴하고 싱싱했으며 신기하게도 소고기의 품질도 상당했다. 4월의 푸르른 야외에서 구워 먹는 소고기와 해산물은 언제나 정답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시간 버티지 못하고 홀로 쓸쓸히 방으로 들어와야 했다. 아팠다. 더 이상의 군더더기 하나 필요 없이 너무 아팠다.


나무로 지어진 집이라 보일러를 제일 세게 틀어놓고 이불 위에 몸의 뉘었다. 아, 이대로 눈 감으면 내내 뜨지 않아도 좋겠다 싶었다. 그 순간에는. 몸이 천근만근 너무 무겁고 가벼운 이불이 스치는데도 살갗이 따가웠다. 쉽사리 잠들지 못할 거란 우려는 콘텍 골드가 단방에 날려줬다. 감기약 한 알에 바로 곯아떨어졌다. 밤은 유독 까맣게 깊었고, 이름 모를 풀벌레 우는 소리가 좋았다. 아주 저 멀리서 나지막하게 들리는 일행들의 도란거리는 소리도 거슬리지 않았다. 그렇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게 잠에 빠져들었다.











스르륵 눈이 떠졌다.


아침인가 보다. 일찌감치 잔 탓에 조금도 피곤하지 않았다. 보일러를 제일 세게 틀어놓고 뜨끈하게 지진 탓인지 몸살이 다 씻긴 듯했다. 몸이 한결 가벼웠다. 이대로라면 그토록 싫어하던 뜀박질도 가능할 것만 같았다. 아직 아침이라 말하기는 이른 시간. 더 누워서 잠을 잘까 나가서 새벽 찬이슬을 맞을까 고민에 빠졌지만, 금세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젯밤을 제대로 만끽하지 못한 아쉬움에 새벽만이라도 나 혼자 제대로 즐기고 싶었다.


여행을 가면 나 홀로 하는 의식 같은 것이 있다. 새벽 산책. 5시나 6시쯤, 새벽 찬이슬이 세상을 뒤덮고 있을 때 혼자 거니는 것을 좋아한다. 세상에 혼자 있는 것 같은 기분도 그 시간만큼은 나쁘지 않다. 내가 제일 먼저 세상을 시작하는 기분이 들어 오히려 짜릿하기도 하다. 찬이슬에 감기라도 심해지면 어쩔까 싶었지만 이 시간이 주는 짜릿함을 알기에 망설임 없이 늘 새벽 산책을 하곤 한다.


당연히, 이 곳 대마도의 새벽 산책도 궁금했다. 새벽 산책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편에 다시 자세히 싣기로 하고 오늘은 특이했던 여행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다.


이름 모를 곳, 끝없는 대화

그리고 코바늘 뜨기


이 당시 지혜한테 코바늘 뜨기를 배운 참이었다. 원래 손재주도 있는 걸 알았고 여성스러운 것도 알고 있었지만 코바늘 뜨기가 이렇게나 재미있을 줄은 몰랐다. 그래서 서울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stx에서도 부산에서 대마도 가는 배 안에서도 챙겨 온 코바늘 뜨기를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한 코 한 코 반복적으로 떠 내려가는 것이 이렇게나 즐거고 평화로울 줄이야. 젠탱글을 하면서 느꼈던 몰입과 그로 인한 고요, 평화로움을 코바늘 뜨기를 통해서도 느꼈다.


가져간 실을 다 쓰고 나서도 손이 근질근질했다. 그러던 참에 다행히 대마도 쇼핑몰에 있는 잡화점에서 실과 일본산 코바늘을 살 수 있었다. 마을의앙에 흐르는 하천가 의자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코바늘 뜨기를 하고 있노라니, 이곳이 천국인가 싶었다. 평화롭고 고요했으며, 행복했다. 살랑살랑 앞머리를 쓰다듬는 바람의 온도와 강도도 더없이 좋았다. 함께 이동 중이던 정연 언니의 조용함도 너무나 감사했다. 다른 일행들은 꼭두새벽부터 산에 간 터라, 이 날은 정연 언니와 하루 종일 함께 할 수 있었다.


언니가 처음부터 편했던 것은 아니지만, 이번 대마도 여행을 통해 나에게 아주 좋은 사람이 되었다. 한참 수다를 떨다가, 또 한참을 각자의 생각을 하다가, 또 수다를 떨다가... 그렇게 마치 합이라도 맞춘 것처럼 불편함 없이, 오히려 너무나 자연스럽게 생각과 대화를 이어나갔다. 언니는 멍하니 바다를 보며 이 좋은 곳에 함께 오고픈 누군가를 그리워했고, 나는 참 오랜만에 머릿속에 티끌 하나 없이 생각을 비우고 코바늘 뜨기를 했다.









그렇게 함께여서 행복했지만, 사실은 이곳이 어디인지를 몰라서 더 그러했는지도 모르겠다.


느지막이 늦잠을 자고 일어나 언니와 둘레둘레 동네 구경을 나섰다. 골목골목 돌아보며 사진도 찍고, 옛사랑의 추억도 함께 곱씹기도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찾아들어간 곳에서의 뜨끈한 국물 한 그릇이 조금 남아있던 감기를 깨끗하게 씻어주었다. 기분이 좋아져 매실주를 한 잔 주문했다. 직접 담근 매실주 같았다. 영어도 못하지만 일본어도 못하는 나는 먹어보고 느낀다. 이 집의 매실주는 특별했다. 일반적이지 않아서 좋았다. 그랬으니 직접 담근 것이리라. 또 직접 담근 것이 아니면 어떠리. 이 날은 모든 것이 좋았던 것 같다. 기분 좋게 매실주 한 잔을 마시고 나니 볼이 발그레해졌다. 이 또한 좋았다.


일행과 합류하지 않고 둘만의 일탈을 감행했다. 무작정 버스를 타기로 했다. 미리 약속이나 한 것처럼 장난스러운 눈빛을 주고받으며 우린 버스터미널에서 시간을 알아봤다. 당최 알아볼 수가 없다. 피식 웃으며 그냥 버스정류장으로 돌아와 털썩 앉았다. 알록달록 귀여운 일본 버스들이 여러 대 지나갔다. 그중에 제일 귀여운 버스를 타자고 했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서 더 재미있었다. 늘 정해진 방식으로 살고 정해진 시간 안에 갇혀 정해진 일을 하던 우리였기에 고작 버스 하나 제멋대로 타는 게 꽤나 스릴 있는 도전이었었다.



















제일 귀여운 버스 한 대가 왔다. 탔다.


곁에 앉지 말자고 했다. 살짝 창문을 열고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눈길이 머무는 곳에 따로 앉았다. 그리고 마음이 통하는 곳에서 내리기로 했다. 이 귀여운 버스는 꼬불꼬불 좁은 골목길을 잘도 달렸다. 아마도 우리나라로 치면 마을버스인가 보다. 참 자주, 여러 번 섰다. 그것도 좋았다. 땡그랑 땡그랑~ 사람들이 타고 내릴 때마다 들리는 동전 소리가 참 좋았다. 알다시피 일본 사람들은 참 조용하다. 버스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조용히 불어오는 바람소리, 내달리는 버스의 엔진 소리만이 가득했다. 한 달 정도만 이렇게 고요하게 살아보고 싶었다.


워낙 평소에 말도 많이 하고 크게 웃고 떠드는 스타일이라 아마도 믿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사실 집에서는 엄청나게 조용한 스타일이다. 티뷔도 없고, 음악도 틀어놓지 않는다. 콧노래조차도 흥얼거리지 않았다. 조용히 조용히 움직인다. 평소에 시끄러운 만큼 집에서는 대단히 극단적으로 조용한 편이다. 믿거나 말거나~










눈빛이 통했다. 그래, 여기야. 여기서 내려야겠다. 거스름돈을 돌려받고 내렸다. 어디지? 처음에는 좀 당황했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바닷가로 이어지는 것 같다. 조금 걸을라치니 낚시를 하고 있는 꼬마가 보였다. 딱 전형적인 일본 소년이다. 작은 가방을 등에 매고 낚싯대를 던지고 있었다. 소년의 곁에는 아버지로 보이는 어른이 있었다. 조용히 낚시에 집중하는 둘이 모습이 너무 근사했다. 들키지 않게 재빠르게 카메라에 담았다. 아마도 지금 생각해도 그 장면은 두고두고 떠오르는 명장면 중 하나일 것 같다.







이곳에서도 언니는 생각에 잠겼고, 나는 코바늘 뜨기에 열중했다. 참 이상한 일이다. 쉬이 사람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 내가 정연 언니에게만은 한순간에 마음을 놔버렸고, 한순간에 마음을 줘버렸다. 그리고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이 이렇게 따뜻하다는 것과 동시에 이렇게 오롯이 나 스스로에게 집중할 수 있구나를 처음 알았다. 한 사람에게서 이렇게 상반적인 두 가지 감정을 한꺼번에 느낄 수 있다니. 이상하고 오묘한 인연이다. 그 이후 언니는 내게 친한 사람이 되었다. 언제라도 찾아갈 수 있고, 누구에게라도 소개할 수 있는 그냥 친한 사람.


이름 모를 대마도, 그곳에서의 언니와의 추억은... 평생을 잊지 못할 것 같다. 두고두고 살면서 힘들 때마다 꺼내보면 배시시 웃음 나올 추억이 되었다. 늘 짜여진 인생을 살고, 살아내고 있으며 여행도 마찬가지로 어디 어디 가서 뭐 하자, 거의 짜인 대로 움직였던 것 같은데 이번 대마도 여행은 내게 너무나 특별하다. 무작정, 의미 없이, 즉흥적으로 해볼 수 있다는 것. 그렇게해도좋을 수 있다는 것. 그런 것들을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해 주었다. 그래서 주저 없이 언니와의 다음 여행을 기대한다.


이국적인 곳에서의 이국적인 추억, 그리고 아직도 그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하기에 더 특별했던 여행. 오늘도 참 늦은 후기를 쓰며... 다시금 하나하나 기억을 소환해... 한 번 더 여행을 다녀왔다.


하필 또 우연히 오늘 정연 언니를 만나는데.

힛~ 언니에게 이 글을 선물해줘야겠다.


즐거웠어요, 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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