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때가 왔다
몇 가지 징후들이 있었다. 첫 번째는 에어비앤비에서 온 메일이었다. 에어비앤비는 여러 가지 고객 만족 요소들을 반영해 분기별로 슈퍼호스트를 선정한다. 게스트의 별점이나 코멘트를 비롯해 호스트가 얼마나 성실히 예약을 이행했는지가 주요 심사 요건이다. 나는 그간 호스팅을 하는 동안 줄곧 슈퍼호스트 자격을 유지해 왔다. 프로필에 달린 작은 메달을 볼 때마다 내 노력과 사랑이 그에 준하는 대접을 받는 듯해 뿌듯한 마음이 되곤 했다. 엄격하던 슈퍼호스트 기준이 대폭 완화된 것은 코로나19 이후부터였다. 많은 예약들이 갑작스레 취소되었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만큼 만남도 기약할 수 없었다. 많은 호스트들이 어쩔 수 없이 이 시장을 떠나지 않았을까. 그들 뒤에 서서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언제든 돌아와요. 돌아오면 다시금 당신 집을 열어줘요.' 에어비앤비의 속삭임이 들렸다. 덕분에 나는 호스팅을 하고 있지 않는 동안에도 계속 슈퍼호스트 메달을 받을 수 있었다. 그건 그간의 뿌듯함과 거리가 멀었다. 씁쓸하고 애처로운 일이었다.
며칠 전, 받은 메일을 보고 나는 웃었다. 2022년 2분기에 이르러 드디어 나의 슈퍼호스트 메달이 사라졌다. 호스트님,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시라며 격려하는 메일을 읽고 있자니 실감이 났다. 이제 다시금 여행자들이 낯선 골목길, 핸드폰 화면 속 주소와 건물 주소를 맞대어가며 자신의 운을 가늠하게 되겠구나. 처음 보는 이와 살갑게 인사를 나누며 여장을 풀게 되겠구나. 침체되어있던 시장이 다시 기지개를 켜는 게 느껴졌다.
두 번째는 인천공항의 방역 수칙 변화였다. 백신 접종 완료자의 국내 입국 시 자가격리가 모두 면제되면서 인천공항의 이용객 수가 일 2만 명을 넘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이들을 위한 방역시설을 철거했다는 소식은 몹시 고무적이었다. 더불어 다른 나라와 왕래의 문턱도 낮아졌다. 이제 결혼을 준비하는 이들은 해외로 신혼여행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항공사들은 여름 성수기를 대비하며 그간 줄였던 항공편을 늘리고 기체도 더 큰 것으로 교체하려 한다, 는 대목에서 마음에 확신이 섰다. 때가 되었다. 바야흐로 이젠 때가 되었다.
하여 항공권 비교 사이트를 들락거린다. 가진 마일리지를 탈탈 털어본다. 캘린더를 열어 스크롤을 올렸다 내렸다 하며 적당한 때를 찾는다. 적당한 때? 어떤 적당한 때를?
하늘이 푸르고 갈매기는 높게 날며, 철썩이는 파도 속으로 뛰어들기 좋은 때. 맥주잔 표면에 송송 물기가 맺히고 그 거품 사그라들기 전, 홀랑 들이켜기 좋은 때. 늦은 밤 얇고 사각거리는 이불을 배에만 덮고 자기 좋은 때. 이 모든 좋은 때를 떠올리고 있자니 마음은 이미 캐리어 바퀴를 돌돌거리며 끌고 나선다. 거기에다 언제라도 붙이기 좋은 명분이 딱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바로 결혼 10주년. 하, 이게 말이 되나? 싶지만 사실이다. 진짜 결혼 10주년이 되고야 말았다.
결혼 생활의 격랑일랑 차치하고서 보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우리의 지난 여행지를 꼽아본다. 거기엔 제주도 있고 경주도 있다. 발리도 몰타도 있다. 파리와 니스, 피렌체와 볼로냐, 리스본과 포르투도 있다. 하물며 쿠바와 모리셔스도 있다. 그리고 두꺼운 형광펜으로 밑줄 그을 만한 곳, 바로 바르셀로나가 있다. 둘이서 처음으로 길게 떠난 여행의 첫 기착지였고, 두 번의 소매치기로 많은 소중한 것들을 털렸으며, 에어비앤비 게스트가 되어보았고, 무엇보다 떠나기 전보다 진지한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몇 년 후 다시 찾은 바르셀로나에선 서울에서의 습하고 눅눅한 마음을 잘 말리고 돌아왔다. 이제는 다른 진지함에 눈을 뜨게 되었다. 어쩌면 아이를 낳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그 도시에서 처음으로 했다. 이런 곳이라면 아이를 낳아 웃고 우는 부대낌을 겪어도 괜찮겠다. 참으로 진폭이 큰 사랑을 해 봐도 괜찮겠다. 해가 긴 계절의 주말 오후, 공원의 놀이터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 나란히 기댄 어깨 위로 커다란 비눗방울들이 날고 있었다.
그러니 바르셀로나에서 우리는 크고 중요한 결심들을 하고 돌아온 셈이다. 이 사람과 미래를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 여행자의 집을 꾸려보고 싶다는 생각, 그리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싶다는 생각까지. 우리 인생의 주요 변곡점마다 이 도시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다시 한번?
그리하여 복잡하고 다양한 결정사항들은 일단 미뤄놓고, 대강의 날짜만을 참고하여 항공권을 찾는다. 이쯤이면 괜찮을까? 휴가랑 추석이랑 이렇게 해 가지고, 일단 성수기 날짜부터 체크한 다음에 그때를 피해서 어떻게든 해 보면 되겠다. 이런 식의 대화가 이어진다. 어쩐지 중요한 대목들은 칸이 큰 괄호로 대체하고 어물쩡하게 넘어가는 눈치다. 마음엔 벌써 낙관이 밀려오는데 그건 지난번 바르셀로나행 비행기에서 만난 껌종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새로 산 껌을 열어 하나를 꺼내는데 껌종이에 뭐라 뭐라 글자가 적혀있다. '매사 순조롭게 풀리게 되리라.' 그저 입이 심심했을 뿐인데 어느 용하다는 점집에서 괘라도 하나 뽑은 느낌이었다. 어디 사극에서나 들을 것 같은 준엄한 말투가 웬 말이람, 하면서도 마침 이륙하던 찰나인만큼 괜히 좋은 징조로 여겨졌다. 그럼 그 여행의 모든 것이 순조로웠느냐 하면 그럴 리가. 우리는 여전히 투닥거리는 여행 메이트였고 그래서 밤을 새워 싸우기도 하고 하루의 일정을 따로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 껌종이는 여권케이스에 소중히 끼워두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그건 길한 미래를 점치는 기원과도 같았으니까.
길지 않은 고민 끝에 드디어 최종 여정을 결정했다. 인천 out 바르셀로나 in, 8월 말에서 9월 말. 제법 긴 시간 머무르기로 한다. 정보 입력을 위해 서랍 깊은 곳에서 여권을 꺼내 펼치자 그때의 그 껌종이가 보인다. '매사 순조롭게 풀리게 되리라.' 과연, 우리의 여행은 그렇게 흘러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