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도시란 무엇인가
스페인 책방의 에바, 다미안 사장님의 까미노 신혼여행을 담은 <행여혼신>을 읽다가 무릎을 쳤다. 그건 바로 '첫사랑 도시'란 단어다. 그렇다. 첫사랑이란 말은 도시에도 통용되었다. 처음으로 도착한 곳, 그래서 모든 것이 신기하고 벅차던 감정이 생각났다. 우체통, 간판, 신호등 같은 일상의 사물들에 렌즈를 들이미느라 한 블럭을 걷는데도 오랜 시간을 들인다. 길가에서 만나는 낯선 단어들을 멋대로 발음해 본다. 햇살과 바람은 또 얼마나 상쾌하며, 음식은 왜 이리 입맛에 맞는지. 길가엔 무성한 야자수, 그 뾰족한 그늘 아래 서면 코 끝으로 바다 바람이 일렁인다. 비록 걱정하는 엄마에게는 친구 셋과 함께 떠나는 거라 거짓말하고 떠나왔지만 나는 여기 이곳, 바르셀로나에 홀로 도착해 두 발로 무사히 섰다. 멀리서부터 달려와 바다에 풍덩 빠지듯 처음 만난 도시와 사랑에 빠졌다.
한인민박 사장님도 그곳에서 스친 사람들도 그리고 여행 정보를 나누는 커뮤니티에서도 스페인에선 무조건 소매치기를 조심하라고 했다. 목숨을 위협하는 강도까지는 아닌데 좀도둑이 그렇게나 많다고 했다. 그래서 등장하는 비밀 아이템이 있으니 그건 바로 여행용 지퍼 팬티였다. 넉넉한 사이즈의 팬티의 앞섶엔 지퍼로 여미는 주머니가 달려있다. 캥거루의 아기주머니처럼 생긴 주머니에다 소중한 귀중품을 담아 다니라는 말이다. 금품의 소중함보다 원활한 통풍과 스타일의 자유가 더 중요한 나로서는 그저 웃어넘겼다. 무슨 배짱인지 가방으론 덜렁 에코백을 메었다. 에코백이니만큼 당연히 지퍼나 자물쇠 같은 잠금장치가 없다. 그저 무심히 달린 두 개의 어깨끈뿐이다. 그나마 생각한 방책이라곤 어깨 뒤로 넘어가는 부분을 손수건으로 질끈 묶는 거였다. 그러나 그 여행에서 나는 어떤 것도 털리지 않았다. 인적 드문 해변에선 작은 야자수 아래 가방을 놓아두고 홀로 바닷물에 뛰어들었다. 바다에 둥둥 떠서 썬글라스 너머로 태양을 바라보면 실시간으로 콧잔등이 타는 게 느껴졌다. 가끔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아까의 야자수를 찾았다. 갈매기 하나 궁금해하지 않는 나의 에코백은 여전히 잘 놓여있었다. 허술한 보안의식으로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나의 몰골 덕분이었다. 모아놓고 보면 큰 액수였으나 긴 여행의 날수대로 쪼개고 나면 빠듯한 예산. 열 명이 넘어가는 혼성 도미토리도 상관없었고 호스텔의 부엌에서 면을 삶고 소스를 얹어 저녁을 해결하는 일도 괜찮았다. 슈퍼마켓의 생수 코너 앞에서 이토록 오래 서성거려 본 적이 있을까. 용량 대비 제일 저렴한 생수는 역시 대용량 사이즈였다. 그렇다고 몇 갤런짜리를 들고 다닐 수는 없으니 2리터짜리 생수병을 사서 밤새 꽝꽝 얼린다. 아침이 되어 모든 짐을 채비하고서 마지막으로 냉동실 문을 연다. 위급한 순간 내려치기 좋을 만큼 단단하게 언 생수병을 꺼내 대충 손수건으로 감싼다. 예의 그 에코백에 넣고 숙소를 나선다. 그리고 목이 마를 때면 길가의 벤치, 공원의 잔디밭, 미술관 정원 이런 곳에서 꿀꺽꿀꺽 마신다. 스페인의 더위는 가히 대단하지만 꽝꽝 언 물통의 위력도 만만치 않아 오후 나절까지 두터운 얼음이 둥둥 떠 있었다. 걸을수록 걸음이 가벼워지는 마법 속에서 허술한 행색 안 조그만 지갑도 무사할 수 있었다. 털어봐야 몇 푼 나오기야 하겠어? 소매치기 인건비라 해야 하나 공임비라 해야 하나, 아무튼 그들의 표적 밖에서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혼자 돌아다니면서 큰 사고 없이 돌아올 수 있었기에 첫사랑 도시가 되었을까? 그렇지 않다. 여러모로 무난하나 그저 무미건조하기만 하다면 그냥 좋은 사람이지, 콕 집어 첫사랑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잊을 수 없는 강렬함. 심장이 쿵쿵 뛰고 시간이 정지한 느낌. 세상에 나와 너, 아니 나와 이 도시만 있는 듯한 기분. 그런 기분을 여행 내내 만난다. 시작은 주로 날씨다. 새벽녘 빗소리가 들린다. 세찬 비가 지난밤의 자국을 씻어 내린다. 눈을 뜨고 창밖을 보면 그야말로 쾌청, 쾌하고 맑은 하늘이 가득 펼쳐져 있다. 하루의 여장을 꾸리면서도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작은 지갑엔 그날의 생활비를 꼬깃꼬깃 접어 넣는다. 세심하게 분철한 지도를 끼워 넣은 노트, 미술관 기념품샵에서 산 작은 색연필도 함께 챙긴다. 마지막으로 카메라와 필름을 챙기면 나갈 준비가 끝난다. 눈이 시원한 하늘 아래 도시는 오색으로 빛난다. 길가의 쓰레기 분리수거함, 크고 작은 꽃들, 앞서 가는 이가 입은 티셔츠까지. 해 아래 같은 색은 없다는 말은 여기 햇살로 가득한 도시에 잘 어울리는 말이다. 이 도시에 오래 머물고 이 도시를 사랑한 이들의 그림과 조각, 건축물에도 색들은 찬란히 남아있다. 스테인글라스 속 색유리들이 반짝인다. 촘촘한 타일 조각들은 옅은 곳부터 진한 곳까지 천천히 농담을 달리한다. 늘어진 덩쿨 같은 철제 구조물들은 오후의 해 아래 식물원 같은 풍경을 만든다. 여기라면 어떤 색이라도 좋아, 무엇이든 잘 어울려, 란 말은
너 그냥 자유해도 좋아.
처럼 들렸다. 그래서 나는 그냥 자유하기로 했다. 여기, 바르셀로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