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나라에서

왜 거기냐면요.

by 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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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 대 후반이 되고서야 확실히 알게 되었다. 나는 그리고 달은 여름형 인간이다. 이제껏 그걸 모르고 살았다. 거기엔 겨울의 매력이 컸다. 생일은 12월, 마침 겨울방학식 날짜와도 맞춤한 때였다. 예고 없이 눈이 펑펑 내리기 일쑤였고 길가엔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졌다. 선물을 받기 좋은 때였단 이야기다. 손으로 만든 카드와 선물, 생일 파티와 방학. 스케이트와 스키! 좋은 것들의 조합은 아주 좋음이니까 나는 겨울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생각은 그랬는데


이제 몸이 앞서 주장한다. 겨울은 고달프다고. 추워서 자꾸 몸이 움츠러든다. 손과 발이 시린 것은 둘째 치더라도 자꾸만 등이 굽는다. 내리는 눈은 아름답지만 그 감상은 짧고 단호하게 끝난다. 신발 더러워지겠다, 현관에 깔아놓을 신문지가 있나, 이러다 내일 아침이면 얼겠는데. 구기동 시절엔 그건 생존 문제와도 연결되었다. 저녁 무렵 눈이 내리면 낭만이고 나발이고 당장 다음날 출근이 걱정이었다. 그건 우리뿐만이 아니어서 늦은 밤 골목엔 쓱싹쓱싹 비질 소리가 났다. 우리도 후다닥 문을 열고 나섰다. 후리스나 패딩 조끼 그리고 수면 바지를 입은 이웃들이 길가의 눈을 쓸고 있다. 평창동, 구기동 사모님들의 겨울 홈패션이 보온 유지에 최적화된 것은 그 동네가 북한산의 큰 그늘 아래 있기 때문이었다. 청와대를 지나 자하문 터널을 넘으면 체감 온도가 달라졌다. 발 아래 속세에 비해 딱 2주 정도의 시차가 있었다. 세상의 벚꽃들이 다 저물고 연두 잎을 틔울 때면 마당의 벚꽃 나무는 그때 봄을 준비하고 있었다. 여름이면 깊은 숲에서 산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그때부턴 매일이 잡초와의 다툼이었으나 삭막한 풍경보단 무성한 숲이 나았다. 모닥불을 피워 맥주잔 부딪치는 것을 몇 번 하다 보면 남보다 먼저 겨울이 찾아왔다.


달은 길이 얼기 전 차를 아랫 골목에 가져다 두기 위해 내려가다 남의 집 담벼락과 박은 적이 있다. 싸락눈이 그새 얼었는지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고 그저 줄줄 굴러내려갔다고 했다. 나는 유리창에 두텁게 쌓인 눈을 긁어내기 위해 신용카드를 꺼내 앞창에 달라붙었다. 나중엔 두 손으로 박박 긁어가며 매달렸는데 결국 다 제거할 수 없어 핸들 앞만 보이는 채로 출근을 했다. 차도 밤새 차갑게 얼어있던 터라 히터를 틀어놔도 바로 따뜻한 바람이 나오지 않았다. 꽤 주행을 하고 나서야 엔진이 데워졌다. 늦을까 봐 악셀을 밟으면 조수석 앞유리에서 한 뭉텅이의 눈덩이가 떨어져 나갔다. 차창엔 줄줄 흐르는 물, 맨 손으로 덤빈 탓에 아직도 빨갛게 언 손가락. 참으로 요란한 겨울이었다.


우리가 추위에 약하니까 컨디션도 좋지 않고 그러니 겨울에 유난히 많이 싸운 것 같아.


라고 달이 말했다. 그럼 그간 여름날의 무수한 전투들은 뭐라 설명할래? 싶었지만 일정 부분 맞는 말 같아 그래, 하고 맞장구를 쳤다. 산 중턱에서 아래로 내려왔을 뿐인데 삼청동의 겨울은 덜 혹독했다. 봄부터 늦가을까지 우리는 옥상에 붙어살았다. 앞으로는 총리 공관의 숲, 옆으론 북악산. 시선에 거리낄 것도 별로 없어 커다란 수영장까지 차려놓고 매일을 들락거렸다. 옥수수, 토마토, 레모네이드와 맥주. 음악을 틀어놓고 파라솔 아래 누우면 어디 멀리 떠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해가 너무 눈부셔 핸드폰 액정도 잘 보이지 않을 때면 엎드려 책을 읽거나 낮잠을 청했다. 너무 몸이 구워졌다 싶을 땐 수영장 안으로 풍덩 뛰어든다. 마리아치 저리 가라 할 커다란 챙의 모자, 비치가운과 타월, 태닝 오일. 옷장 안엔 알록달록 화려한 프린트 혹은 자투리 천으로 만든 것 같은 의상들이 늘어난다. 서울의 ootd로는 조금 과한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스타일. 이런 걸 아무렇지 않게 걸쳐 입고 살고 싶은데 말이야.


호스트 엘리는 차를 한 잔 끓였다. 나는 얼음 동동 띄운 아메리카노를 들고 마주 앉았다. 가벼운 이야기가 이어진다. 만국 공통의 만만한 잡담 소재는 날씨. 엘리는 말한다. 여기 바르셀로나는 정말 따뜻해. 겨울에도 영하로 내려가는 일이 거의 없지. 눈도 별로 오지 않아. 작년엔 이례적으로 눈이 내렸지. 어딘가 익숙한 내용인가 싶었는데 부산의 엄마가 말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부산은 눈이 잘 내리지 않는 만큼 한번 내리면 언덕 많은 동네에서 난리가 난다는 대목만 빼고. 그러겠다, 정말. 하며 거리에서 흔하게 본 야자수들을 생각한다. 사계절 온난하니 그런 나무들이 잘 자라고 있는 거겠지. 하며 생각은 발을 뻗는다. 그럼 나도 좀 온난해지지 않을까. 무던하고 순둥하게, 덜 뾰족하고 덜 까칠하게. 서울에서 무럭무럭 자라난 가시들이 툭 빠져나오지 않을까. 모난 성격이 오직 혹독한 날씨에서 기인한 냥 나는 갖다 붙이고 있었다. 이 도시에서 살면 어떨까 하는 상상과 살아봐도 괜찮다는 명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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