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처에 만개한 날들

얼마 동안 다녀올 건데?

by 한량

상기된 얼굴 위로 벙실벙실 웃음이 번진다. 들뜨고 달뜬 목소리가 차차 피치를 올린다. 잠시 맥주로 목을 축이고 다시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래서 우리가 말야, 그동안 어떤 준비를 해 왔는지를 설명하고, 또 매일의 생활비 내역도 공개를 하는 거야. 장이 부진할 때는 누룽지에 물 부어 먹고, 고점 찍는 날엔 근사하게 파티하는 거지. 이런 사행성 짙은 대화를 나누느라 입은 바쁘다. 이건 엉성하기 짝이 없는, 오직 낙관만 그득한 사업계획서이자 치킨 뜯으며 하는 사업설명회다. 그리고 그런 자리에 흥부터 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나와 달이 잔을 부딪치는 사이 아직 꼬마가 되기 전의 아기는 틈틈이 식탁 위의 치킨무를 노리고 있다. 아기가 먹기엔 너무 새콤하고 달콤할 테니 먹이지 않으려 하나 아기의 눈은 처음 보는 새로운 것, 치킨무에 꽂혀있다. 뜯지 않은 치킨무를 만져나 보라고 아기 손에 들려준다. 아기는 당연히 입 가까이 가져가 탐색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상상력을 추켜세우며 오늘을 이 프로젝트의 출발일로 정한다. 함께 살 새로운 공간을 탐구한다는 점에선 상량식, 같이 머나먼 곳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선 진수식이라 할 수 있었다.

IMG_5497 2.jpg 조용히 챱챱거리는 소리만 들리기에 다시 보니 새어 나온 치킨무 국물을 빨아먹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압-수!

원래 뭔가의 미래 계획을 이렇게도 세우나 싶었지만 원래 우리는 그런 식으로 살아왔다. 어설프고 엉뚱하나 큰 목표를 세워놓고 일단 먼저 건배부터 한다. 그러면 미래의 우리가 어떻게든 노력을 한다. 그러는 사이 납기일이 다가오고 애초 목표한 바와 비스무리하게 일을 마무리한다.긴 여행이나 결혼 준비도 그러했고, 많은 횟수의 파티, 몇 번의 이사와 에어비앤비 호스팅 등도 그렇게 흘러갔다.


프로젝트의 이름은 바로 이것이었다. <Barcelona 300 di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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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우리가 사랑하는 도시, 바르셀로나에서 열 달을 살아보는 거다. 투박하게 열 달로 정한 이유는 달의 육아휴직을 1년으로 잡고서였다. 가기 전 준비를 한 달, 다녀와 정리를 한 달, 그러면 1년을 꽉 채울 수 있지 않을까? 열 달의 시간이면 여행자와 생활인 경계도 슬쩍 흐릿해질 터. 스치고 지나치는 인상 대신 도시의 면면과 더 마주하게 될 것이다. 캐리어를 열어 짐을 꺼냈다 넣는 대신 옷장과 찬장을 꽉꽉 채워 쓰지 않을까. 300일이면 단골 바나 까페 말고도 단골 슈퍼마켓, 단골 서점 등도 충분히 생기고도 남을 시간이다.


생활인의 삶을 상상하는 첫 번째는 아기 관련한 일의 대비였다. 우선 아기의 개월 수를 헤아려 그때쯤 갈 만한 어린이집을 물색해 본다. 정보를 모아보니 어린이집에 빈 자리가 있으면 신학기가 아니어도 입소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어린이집의 컨디션, 아기의 적응 여부, 어린이집 선생님들과 우리 사이의 소통 문제 등은 대충 덮어놓고 여러 선택지들을 만들어둔다. 그곳에서 열 달을 지내며 언어 공부를 한다. 좋아하는 곳에 마음껏 간다. 무엇보다 우리 인생의 갭 이어를 제대로 누려본다. 마침 2022년이면 결혼 10주년이기도 하다. 코로나 상황이 어찌 변할지는 모르나 이제 백신도 맞고 하니 차차 나아지지 않겠어? 이럴 땐 몹시 대범해진다. 가장 중요한 자금 문제에 있어선 이렇게 저렇게 대충 퉁치고 어떻게든 되겠지, 할 수 없으니 미리부터 결정한 바가 있었다.


일명 BCN 펀드를 만들어 여행 자금을 굴린다. 여유가 되면 틈틈이 적립식으로 투자한다. 펀드 관리자는 나로 공격적인 투자, 요란한 스캘핑,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단타 이런 것은 생리에 맞지 않으니 그저 진득하게 눌러앉아 불어나는 수익을 관망하자는 게 전략이라면 전략이었다. 이런 것도 대체 전략이라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예상 밖으로 수익률이 높았다. 날마다 등락폭은 있겠으나 순풍에 돛 단 듯 BCN 펀드는 순항을 계속했다. 오오, 이러면 곧 바르셀로나에 도착할 수 있겠는걸? 벌써부터 예감이 좋은데? Vamos~ Barcelona 300 di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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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년이 조금 못 되는 시간이 흐른 지금, 이제 수익률과 함께 현실을 받아들인 우리는 그래도 이만한 게 어디냐? 하며 차분히 계획을 수정하게 된다. 온순한 태도로 달력을 살피며 음, 이 정도면 괜찮은데?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투자 수익률 부진으로 열 달 여행 갈 것을 한 달 갔어. 그렇지만 이것만 해도 어디야, 정말 대단한걸? 하며 속으로 짝짝 박수를 친다. 눈가에 슬며시 흐르는 것은 땀, 아마도 땀일 것이다.


사실 3, 4월 혹독한 어린이집 적응기를 거치며 우리는 많이도 겸손해졌다. 꼬마에게 새로운 도시의 낯선 어린이집 생활이 어떠할지 우리는 물어본 적 없으며 답을 들을 수도 없다. 생활인은 못 되어도 조금 긴 여행을 함께 누려보는 것으로 아쉬운 마음을 갈음해 본다. 그리고 이름이 바뀐 <Barcelona 27 dias> 프로젝트 역시 300일을 목표로 했을 때처럼 하루하루를 성실히 기록해 보려 한다. 떠나기 전의 준비 과정부터 매일의 일상과 또 돌아오기까지의 일들을 여러 방법으로 담고 싶다. 일 년의 12분의 일, 길고 긴 여름의 끝자락을 잡고 우리는 어떤 하루들을 만나게 될 것인가. 마음은 벌써 8월이다. 모로 가도 바르셀로나만 가면 된다. 어쨌거나 Vamos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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