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우리 동네 산 안토니
친구가 대뜸 여행의 안부를 묻더니 '너 그 친구들 만나볼래?' 하고 제안한다. 여기서 그 친구들이란 친구의 오랜 벗들로 바르셀로나에 사는 부부를 말한다. 친구는 그 친구들과 친하고 나도 친구와 친하지만 우리끼리는 당연히 얼굴도 모르고 통성명도 하지 않은 사이다. 하지만 급작스레 단체 대화방이 만들어지고 그곳에서 우리는 어색한 인사를 나눈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아내의 이름은 에딧, 남편의 이름은 나초. 학창 시절을 함께 나눈 이들끼리 부르는 별명인 줄만 알았거늘 진짜 이름이 맞았다. 그러고 나자 자연스레 약속이 잡힌다. '우리에겐 27개월짜리 아이가 있어요. 식사 자리에서 부산스러울 수 있으니 미리 양해 구합니다.' 하고 말하니 마음을 아주 가뿐하게 해주는 답이 돌아온다. '우리에게도 아이들이 있어서 그 마음 충분히 알아요. 큰 애는 유치원 보내고 어린 둘째는 데리고 나갈게요. 걱정 말고 만납시다.'
그렇게 우리는 바르셀로나 대학 근처, 우리 숙소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의 타파스 레스토랑에서 만난다. 레스토랑의 분위기는 다소 격조 있어 나는 살짝 긴장한다. 어른 넷과 베베 둘을 위한 자리는 아늑한 구석자리로, 다행히 옆 테이블은 하하호호 즐거운 분위기의 할머니 모임이다. (곧 손자로 보이는 갓난아기 한 명의 깜짝 방문이 있어 소란스러움은 열 배로 증폭되었다.) 에딧과 나초와 환한 웃음으로 인사를 나눈 후, 타파스를 잔뜩 시켜 먹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반주로 맥주도 한 잔씩 한다. 돌이 갓 지난 아기인 씨야는 생글거리며 우릴 관찰하는데, 그에 비해 다 큰 꼬마는 엄청 낯을 가리며 내 품을 파고든다. 처음 보는 얼굴들도 게다가 영어로 대화하는 우리도 낯선 모양이다. 덕분에 나는 9호선 백패커의 모양새가 된 채 차례차례 감자구이도, 생선 튀김도, 하몽도 먹는다. 내 품의 배낭에게도 판콘토마테 같은 걸 밀어넣으며.
우리는 처음 만난 사이지만 대화는 술술 잘 풀려나간다. 공통된 친구의 이야기에서 시작해 바르셀로나와 서울에서의 삶, 특히나 아이를 키우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빠질 수 없는 축구 이야기도 나눈다. '혹시 그쪽 응원하는 건 아니겠죠?' 바르셀로나 토박이는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묻는다. 여기에서의 '그쪽'은 아마도 '그쪽'이리라. 눈빛에 서린 것은 진심이라 '그럼요, 우리는 바르샤를 응원해요.' 라고 답했다. 나는 거기에서 사랑하는 구단을 응원하는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려다 그만 롯데 야구 이야기를 꺼내고 만다. 십 대와 이십 대의 대부분을 바친 달의 순정과 아직도 'Again 1992' 슬로건을 믿고 있는 우리 아빠의 이야기도. '어게인 1992요? 마지막 우승이 1992년이라고요?' 바르샤 팬은 믿지 못하다는 듯 되묻는다. 그래요, 세상 어디엔 그런 팀도 있답니다. 농담 아니에요. 이건 백 퍼센트 진실입니다.
바르셀로나 사람은 이에 촉발된 은근한 지역 사랑을 드러내며 혹시 알고 있는 까딸란 말이 있냐고 묻는다. 알아요, 음, Sortida! 이 말에 모두 웃고야 만다. Sortida는 바르셀로나 어디에서나 눈여겨볼 수밖에 없는 말, 바로 '출구'다. 스페인어로는 Salida.
미래의 꿈들과 그래서 사는 동네에 대한 이야기들도 나누게 된다. 지금 숙소가 산 안토니 시장 근처란 말을 듣고 놀랐다며, 여행자는 없고 온통 유아차만 있지 않나요? 라고 되묻는다. 그렇다. 지금 숙소 동네는 참으로 평범한 주택가다. 역사 깊은 재래시장을 새롭게 단장한 산 안토니 시장이 있고, 그런 시장답게 오래된 맛집들이 모여있는 동네다. 동네 사람들이 유아차나 바퀴 달린 장바구니를 끌며 장을 보고, 시장에서 만난 이웃과 바르에 앉아 맥주 한 잔을 털어 넣는 동네. 4년 전 우리는 이 거리를 지나다 시장 앞에서 열리는 축제에 흘러들었다. 눈치껏 보아하니 시장 50주년을 기념하는 축제 같았다. 자선 행사로 진행하는 것은 바로 맥주 판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있나. 기념컵에 받아든 생맥주를 마시며 흥겨움을 함께 누렸다. 그 컵은 지금껏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작은 플라스틱 컵의 겉면엔 '50 anys fent barri... seguim!' 이라 쓰여있다. 번역하자면 이렇다. '이웃과 함께 한 50년, 계속 가자!'
이제 54년이 된 산 안토니 시장에서 잠시나마 이웃이 되어본다. 처음 보는 사람과도 눈 마주치면 살짝 웃으며 Hola, 인사를 나누고 유아차 덕에 열고 닫는 문 앞에선 언제나 양보받는다. 아침으로 먹을 빵은 여기에서 오렌지 주스는 저기, 우유와 요거트는 이곳에서 등등으로 익숙한 가게들이 생겨난다. 이렇게 지내다 보니 걱정과 염려로 주렁주렁 달고 온 도난방지 스프링줄 같은 게 조금 어색해진다. 이 거리에 이런 거 달고 다니는 사람은 나밖에 없기에. 나는 슬그머니 스프링줄을 떼어버린다. 손은 자유롭고 마음은 가벼워진다. 다닐 맛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