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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배송은 왜 멈춰야 하는가

인간의 시간을 시장이 삼키도록 둘 것인가

by 한영섭

새벽배송은 어느새 한국 사회의 일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아침 문 앞에 놓인 상품을 보며 편리함을 느끼고, 그것이 곧 ‘서비스의 기본값’처럼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 자연스러움 속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문제가 숨어 있다. 새벽배송은 사회가 반드시 유지해야 하는 공공적 서비스가 아니라, 기업 간의 경쟁 속에서 탄생한 '속도 경쟁'의 산물이며, 그 편리함의 뒷면에는 노동자의 건강과 생애 시간이 조용히 소모되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이 사실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외면하는 데 익숙해졌다는 것이다.



과거의 야간 노동은 그 자체로 정당성을 갖는 경우가 많았다. 중단할 수 없는 공정이 있는 산업 현장, 사회의 안전과 돌봄을 담당하는 의료·치안 영역 등은 밤에도 사회가 작동해야 할 이유가 분명했다. 이때 노동의 문제는 안전 조치와 적정 노동시간, 합당한 보수와 법적 보호의 문제로 다루어졌다. 반면 새벽배송은 상황이 다르다. 대부분의 상품은 ‘지금 당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소비자는 내일 오후에 받아도 충분한 물건을 새벽에 받는다. 이는 사회가 필요로 한 것이 아니라, 기업이 ‘더 빠른 배송’을 경쟁력으로 내세우며 만든 인위적 수요다. 속도가 가치를 대체하고, 효율이 사람의 삶을 압도하는 흐름 속에서, 노동자의 밤은 시장의 논리에 종속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가 드러난다. 새벽배송 노동자 다수는 이른바 특수고용노동자로 분류된다. 이들은 기업의 지시 아래 정해진 시간과 동선에 따라 움직인다. 그러나 기업은 이들을 노동자가 아니라 계약상 개인사업자로 취급한다. 즉, 노동을 통제하면서도 책임은 부담하지 않는 구조가 고의적으로 설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심야 노동이 세계보건기구(WHO)가 지정한 2급 발암물질 수준의 건강 위험을 초래하고, 수면 단절이 장기적인 심장·신경계 손상을 유발하며, 실제로 과로사 사건이 반복되고 있음에도, 그 책임은 개인의 ‘선택’과 ‘자영업자적 리스크’라는 말 뒤로 숨겨진다. 편리함의 이익은 사회가 공유하지만, 위험과 비용은 개인이 떠안는다.



칼 폴라니는 시장이 사회를 압도할 때 발생하는 문제를 이렇게 설명했다. 시장 논리가 인간의 삶, 노동, 토지, 시간과 같은 본래 상품이 아닌 것들을 ‘허구적 상품’으로 전환시킬 때, 사회적 파괴가 시작된다. 새벽배송 노동은 바로 그런 허구적 상품화가 드러난 대표적 영역이다. 인간의 ‘밤’이라는 시간, 즉 몸과 생리 리듬, 회복의 권리가 하나의 기술적 효율의 지표로 환원되고 있는 것이다. 소비자가 빠른 배송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기업이 속도 경쟁을 상품 가치의 핵심으로 설정했고, 그 과정에서 인간의 생체 리듬이라는 공공적 자원이 시장 논리에 종속된 것이다.



역사는 이와 비슷한 장면을 이미 경험한 바 있다. 19세기 영국 산업혁명기 공장은 밤낮 없이 돌아갔다. 여성과 아동까지 새벽과 밤을 가리지 않고 기계 앞에 세워졌다. 당시에도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은 아이도 벌어야 한다’, ‘공장을 멈추면 국가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회는 결국 한 가지 사실에 도달했다. 인간의 몸과 시간이 파괴되는 방식으로 지속되는 성장과 효율은 결국 생산 그 자체도 파괴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1833년 영국은 공장법을 제정해 아동을 공장에서 빼내고, 노동시간에 대해 사회적 경계를 설정했다. 이것은 도덕적 승리라기보다, 인간과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현실적 선택이었다. 폴라니는 이를 ‘이중운동’이라 불렀다. 시장이 인간을 잠식할 때, 사회는 다시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시장을 되돌려 세운다는 것이다.



새벽배송 논쟁은 지금 정확히 이 지점에 서 있다. 기업은 말한다. "소비자가 원해서 하는 서비스"라고. 그러나 소비자는 누군가의 수면과 수명을 대가로 한 속도 경쟁을 선택한 적이 없다. 우리는 단지 편리함에 익숙해졌을 뿐이다. 기업은 바로 그 익숙함의 틈새에서 노동자의 시간을 비용 없이 추출하는 방식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명확하다. 0시에서 5시 사이의 초심야 배송을 중단하는 강력한 사회적 경계를 설정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서비스를 제한하자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 의해 파괴되는 인간의 시간을 되돌려 세우는 사회적 합의다. 동시에 특수고용노동자에게 실질적 근로자성을 부여하고, 심야 노동이 유발하는 건강 및 사회적 비용을 기업이 외부화하지 못하도록 강제하는 법적 장치가 필요하다. 편리함의 대가는 노동자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공정하게 분담해야 한다.



우리가 지금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은 간명하다.


우리는 정말 ‘더 빠른 배송’을 원하는가?

아니면 ‘누군가의 밤이 파괴되지 않는 사회’를 원하는가?



새벽배송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어떤 사회를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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