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금은 기뻐만 하고 싶다

태양은 가득히 (1/12)

by 달을보라니까


#1. 지금은 기뻐만 하고 싶다


미령은 다리 하나를 아래로 내밀어 바닥에 닿자 조금씩 몸을 움직여서 흘러내리듯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방에는 불빛 하나도 새어 들어오지 않았다. 몇 시나 되었는지 알고 싶었지만, 박이 깰까 봐 불을 켜지도 커튼을 열지도 못한 채 옷가지와 가방을 찾아서 바닥을 더듬다가 포기하고 눈이 어둠에 익숙해질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미령은 ‘누가 우리를 감시하겠어? 창문도 안 보이는데.'라고 여러 번 말했지만, 박은 늘 커튼을 닫고 불을 껐다.


손에 잡히는 대로 옷가지 몇 개와 가방을 들고 살금살금 화장실로 들어가서 문을 반쯤 닫은 상태에서 손을 바깥으로 뻗어서 화장실 불을 켜고 재빨리 문을 닫고 나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호텔 방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박이 덤벼드는 통에 화장도 지우지 못하고 침대에서 뒹굴었던 탓에 거울에 비친 얼굴과 머리는 엉망이었다. 한 손으로 머리를 만지면서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4시. 다행이라 생각했다. 집에 가서 제대로 씻고 옷을 갈아입고도 간단히 뭘 먹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옷을 얼추 챙겨 입고 호텔방 문을 소리 나지 않게 닫고 나오면서 박이 제시간에 일어나서 오전 10시에 예정되어 있는 프로젝트 종료보고에 맞춰서 와야 할 텐데 하는 걱정이 들었다. 이따가 전화를 해줘야지 싶었지만 박의 전화기 배터리가 그때까지 남아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박은 낙천적인 사람이었다. 미령이 처음 박을 본 것은 보스톤 쉐라톤 호텔 로비였다. 강 건너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공과대학의 둥근 돔이 보이는 좋은 위치에 있는 호텔이라서 매년 8월에는 전 세계에서 온 가족들로 호텔은 가득 찼고 조식 레스토랑에 줄을 서서 들어가야 할 정도였다. 보통의 유학생이 5성급 호텔에 묵을 수는 없겠지만 이 학교의 비싼 학비를 낼 수 있을 정도의 부모는 전 세계에 많았고 그런 부모들은 세계 1위로 꼽히는 학교에 입학하는 자녀의 모습을 보기 위해 긴 비행과 비싼 호텔비를 마다하지 않았다.


미령은 혼자 보스톤에 도착했다. 부모님은 미령이 비행기를 타기 직전까지 혼자 가겠다는 미령에 서운해했다. 다른 사람들도 온갖 선물과 편의를 제공하겠다고 했지만 미령은 엄마가 미리 해둔 호텔 예약만 받고 다른 모든 것을 사양했다. 미령의 고집대로 큰 가방 두 개와 기내용 작은 가방 하나를 끌고 베이징에서 비행기를 두 번 갈아타는 긴 여행 끝에 학교가 멀리 보이는 쉐라톤 호텔에 도착했을 때 어떤 동양 남자와 그의 가족이 미령보다 한 발 앞서 먼저 로비에 들어섰다.


사람들로 붐비는 로비에서 어떻게 해야 하나 난감해하고 있는 자신과 달리 그 동양남자는 자연스럽게 가족들을 로비 소파에 먼저 앉혀두고는 돌 틈 사이를 유유히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들어가서 호텔직원과 몇 마디 나누더니 금세 호텔키를 받아 왔었다. 그 가족이 사라진 후, 한참을 기다려애 체크인을 마친 미령은 문득 그 사람이 호텔 직원에게 무슨 말을 했을지 궁금해졌다.


"안녕, 너는 무슨 과니?"


미령이 박을 다시 만난 것은 다음 날 새벽이었다. 잠을 설친 미령이 군것질거리를 사기 위해 부스스한 얼굴로 엘리베이터를 타는데 깔끔한 운동복 차림의 박이 말을 걸었다. 아침 인사를 한 것 같은데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미령이 잠시 머뭇거렸더니 박은 금세 눈치채고서는 한국인인 줄 알았다며 사과했다. 한국에서 왔다며 천문학과에 편입한다는 박의 영어는 미국사람 같았다.


근처 지리도 잘 아는지 뭐 사러 나온 거면 호텔 로비 샵은 비싸니까 길 건너에 있는 24시간 편의점으로 가라고 하면서 자기는 어차피 운동 나가는 길이니까 데려다주겠다고 까지 했다.


미령이 밤새 잠을 설친 이유는 시차 때문이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혼자서 원하는 대로 하며 살 수 있게 됐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의 부모는 중국에서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외국에 나가지 않고 중국에서 공부한 미령의 아버지는 이른 나이에 베이징 공대의 실험물리학 교수가 되었고 과학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실험에 필요한 기구와 자재를 직접 만들기 위해 공장을 운영했다. 가족들에게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국가에서 진행하는 모종의 비밀 프로젝트를 위해 필요하지만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물건들을 책임지고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랬기 때문이었는지 집 앞에는 늘 공안들이 경비를 섰고, 집에 찾아오는 손님이 많았다.


당간부였던 미령의 어머니는 집으로 찾아오는 손님들을 무척 환대하며 서재에 같이 앉아서 몇 시간이고 무슨 이야기를 하곤 했다. 손님들에게 다과를 내오고 아이들의 밥을 챙겨주는 사람을 따로 고용했어야 할 정도였다. 비록 많은 시간을 내주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미령과 한 살 터울인 귀령에게 부모역할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자매의 공부는 물론이고 취미활동과 교우관계까지 세심하게 살펴줄 사람들을 붙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매달 날짜를 정해서 미령과 귀령의 학교에 들러서 선생님들을 만나곤 했다. 그랬던 만큼 미령은 부족함 없이 풍족한 학창 시절을 보냈지만, 어디든 불쑥 나타나는 어른들 때문에 늘 불편함을 느꼈다.


초면의 과도한 친절이 부담스러웠던 미령이 그냥 바람만 쐬고 다시 방으로 돌아갈 거라고 말하자 박은 대수롭지 않은 듯 끄덕이며 미령에게 너 정말 영어 잘한다 말을 남기고 강 쪽으로 휙 뛰어갔다. 박의 뒷모습을 보는 미령의 기분이 묘했다. 미국사람 같이 구는 행동거지와 말투가 거슬리기는 했지만. 초특급 엘리트 부모 덕분에 미령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대우를 받으며 자랐다.


그래서 미령은 친구를 사귀기 어려웠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같은 또래의 남자가 미령에게 지금처럼 편하게 말을 걸거나 뭔가를 해주려고 한 적이 없었다.


미국 대학으로 진학하면서 지금까지 공부 이외에 친구나 교우관계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미령은 학교에서 늘 수석을 놓치지 않았고 특히 수학과 물리학 점수는 다른 학생들보다 월등했다.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지만 여기에 모이는 학생들도 다들 자기 나라에서는 날고 기는 사람들일 것이기 때문에 내심 불안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미령의 아빠는 중국에서 일등이면 세게에서도 일등이라며 지금처럼만 하면 미국에서도 최고가 될 것이라고 장담하곤 했다. 하지만 앞으로 수많은 박과 같은 사람들을 만나서 같이 공부하고 경쟁할 생각을 하니 손에는 땀이 맺혔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회의장 주변에 와 있었다. 회의 시작까지는 1시간도 넘게 남았는데 과학기술에너지부 장관까지 참석하는 회의이다 보니 다들 일찍 온 듯했다. 정장을 입은 미령이 들어서자 주변의 눈길이 미령에게 쏠렸다. 아무리 나이 들어 보이도록 화장을 해도 미령은 실제 나이보다 서너 살은 어려 보였다. 나이 든 남자들이 대부분인 과학계와 정부 인사들 사이를 오가는 탄력 있고 날렵한 미인은 언제나 눈에 띄었다.


집에서 회의장으로 오는 사이에 혹시라도 박이 아직도 호텔 방에서 잠들어 있을까 봐 염려되어 박에게 전화를 했다. 다행히 그도 준비를 마치고 오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이번 연구 기간 동안 박은 모든 정성과 노력을 다 했었다. 실험 결과가 예상대로 나오지 않으면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않으면서 며칠이고 모든 가능한 변수를 하나씩 점검하면서 단계별로 재작업을 했기 때문에 지켜보는 미령의 마음은 타들어갔지만, 연구결과에 완벽하다고 확신했다.


그런 의미에서 박은 정말 좋은 파트너였다. 아무리 일이 많아도 겁내지 않았고 실수 없이 체계적이고 효과적으로 일을 진행하는 방법을 찾아내서 시간과 비용을 줄이곤 했다. 그래서 미령을 비롯한 프로젝트 팀원들에게 박은 행운의 마스코트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박의 열정과 고집이 문제가 되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아무리 반복하고 수정해도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에도 박은 결과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그럴 때마다 미령은 중재에 나서서 일이 되도록 하면서도 남들 모르게 최선을 다 해 박을 도왔다. 박도 미령이 자신을 돕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고마워했다. 그래서 미령은 가끔 박을 돕다가 곤경에 빠지는 때에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열심히 박을 도와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을 느끼곤 했고, 그를 도울 수 있어서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어제는 상황이 심각했다. 2년 넘게 추진한 프로젝트의 종료 보고 자료를 최종 컨펌하는 운영위원회 마지막 회의에서 박이 기초 데이터 일부를 문제 삼으면서 프로젝트 결과지에 사인하기를 거부했다. 사실 그 포인트는 박이 예전에도 지적한 것이었다. 하지만 해당 데이터는 참조로만 쓰였기 때문에 프로젝트 결과물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이미 지난 운영위원회가 결정했고 끝난 안건이었다.


그러니 이제 와서 이 문제를 다시 제기할 이유도 실익도 없었다. 박의 이의제기로 연구소는 온통 벌집을 쑤셔놓는 듯 난리가 났다. 당장 내일 장관을 포함한 주요 인사들이 모두 참석하는 종료 보고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연구소장을 비롯해 여러 사람이 박을 설득하려 했지만 박은 요지부동이었다. 이대로 박이 서명하지 않는다면 프로젝트를 마칠 수도 없고 종료 보고도 할 수 없게 됐다.


미령도 박에 대해 화가 났었다. 내일 장관 앞에서 발표를 할 사람이 바로 미령 자신이었기에 더 그랬다. 오늘만은 제발 일찍 집에 가서 따뜻한 물에 목욕하고 푹 쉬고 싶었기 때문에 다 끝난 일을 다시 끄집어내서 발목을 잡는 박이 서운했다. 끓어오르는 화를 누르며 흥분상태인 양쪽을 중재하던 미령은 갑자기 박의 주장이 완전히 터무니없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록 낮은 확률이기는 해도 후속 프로젝트로 남겨둔 미완의 과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박이 거기까지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데이터 무결성을 원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미령은 여러 사람 앞에서 박이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는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 애를 썼고, 동시에 박에게는 내일 종료보고가 잘못되면 연말에 있을 연구소장의 임기연장은 물 건너가게 되고 결과적으로 박과 미령 본인의 재계약도 어찌 될지 모른다고 설득했다.


결국에는 박이 조건부 서명을 하는 것으로 정리가 됐다. 종료보고는 그대로 진행하되 향후 2개월 내에 소규모 팀을 꾸려서 문제가 된 데이터를 재검증하기로 한 것이었다. 당장 급해서 동의는 했지만 실익도 없는 일에 인력과 예산을 쓰게 된 연구소장은 단단히 화가 났고, 실제 검증 작업을 해야 할 연구원들이 박을 바라보는 눈길이 싸늘했다.


한 시간이면 끝날 줄 알았던 운영위원회가 오후를 통으로 잡아먹는 바람에 미령이 사무실을 나선 시간은 열 시가 넘어서였다. 얼른 집에 가고 싶었고 도착하자마자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고 싶었다. 자동차 시동을 걸고 나서 홈컨트롤 앱을 열어서 보일러를 켜고, 도착했을 때 집이 어둡지 않도록 집안 전등들을 켜고 있는데 벌컥 조수석 문이 열리더니 박이 들어와 자리에 앉아 말했다.


"오늘 같이 있자."


호텔 방에 들어서자마자 박은 미령을 벽으로 밀어붙였다. 박의 손이 미령의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었고 미령의 정신은 아득해졌다. 건장한 박이 꼼짝달싹 못하게 꼭 끌어안자 미령의 온몸에는 힘이 빠져나갔다. 박이 이끄는 대로 몸을 맡긴 미령의 머릿속에서는 셀 수 없이 많은 LED 등이 계속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미령은 박이 언제 손을 씻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하루 종일 입고 있던 속옷 땀냄새가 걱정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샤워 먼저 하자는 말을 하기는 싫었다.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소중하고 좋았다. 까무룩 정신이 희미해질 때마다 박을 처음 봤을 때의 모습과 같은 과목 수업을 들을 때면 멀리서 웃으며 손을 흔들던 박의 모습, 박사 학위 수여식에서 본 서른두 살의 박 그리고 미령 자신이 한국의 리솦 연구소에 조인하겠다고 했을 때 놀라던 박의 얼굴이 번갯불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배에 따뜻한 액체가 느껴졌다. 미령이 눈을 감고 누워있는 사이에 박은 화장실에서 수건에 따뜻한 물을 묻혀와서 미령의 몸을 닦아주고는 일어나서 커튼을 광자 하나도 못 들어올 만큼 꼼꼼하게 닫았다. 박이 다시 침대로 돌아와 미령을 품속으로 안아 넣을 때까지 미령은 눈을 뜨지 않았다. 박의 얼굴이 보고 싶었지만 마치 하데스와 페르세포네로부터 죽은 아내를 돌려받은 오르페우스가 계속 앞만 봐야 했던 것처럼 지금 눈을 뜨면 잊고 있던 모든 걱정들이 살아날 것만 같았다.




박에게 아내와 아들이 있다는 것을 미령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박은 보석처럼 빛났다. 수백 명이 수강하는 초대형 강의장에서도 미령은 박을 단번에 찾을 수 있었다. 박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아침에 불쑥 찾아와 자전거를 주고 갔다. 미령은 그 후 매일 자전거를 탔다. 파티에 갈 때나 다른 남자를 만나러 갈 때도 그랬고 최연소 교수 임용식에도 그 자전거를 탔다. 시간이 지날수록 딴생각을 하다가 넘어지는 일이 잦아졌다.


교수자리를 내던지고 한국으로 가겠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 모두가 놀랐다. 특히 미령의 부모는 중국이 아니라 한국을 선택한 미령을 이해하지 못했다. 보장된 미래를 포기하고 한국의 리솦 연구소에서 중국과 경쟁하는 연구를 하는 이유를 미령은 아무에게도 납득시킬 수 없었다. 행여 누군가의 눈에 띌까 봐 박과는 작은 선물이나 증표도 나눠가지지 못하는 것이 괴로웠지만 미령은 오직 박과 함께 있어서 행복했다. 학문적으로나 직업적으로는 성공적이었다. 여러 편의 피인용지수가 높은 SCI급 논문을 발표해서 학계의 주목을 받았을 뿐 아니라 크고 작은 프로젝트들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게다가 내일은 지금까지 해온 프로젝트를 모두 합산한 것보다 훨씬 더 큰 예산이 들어간 중요한 프로젝트의 성공적 종료 보고를 미령 자신이 직접 할 예정이니 모든 면에서 미령은 빛나는 성공을 이룬 것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미령에게 언제나 더 중요한 것은 박과의 관계였다.


박은 언제나 미령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때마다 미령은 그 말이 첫눈 같이 부드럽고 포근하지만 금세 녹아버리거나 바람이 불면 날아가 버릴 것같이 느껴졌었다. 하지만 이제는 불안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박은 별거 중인 아내와 이혼하고 자신과 결혼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기뻐해도 될 것 같았다. 모든 날이 동화처럼 기쁘고 행복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기에 미령은 지금은 기뻐만 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