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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시 Apr 14. 2024

세월

난 엄마의 어린 시절에 대해 듣는 걸 좋아한다. 모두가 가난했던 그때 꼬질꼬질한 코흘리개들 사이 부잣집 딸이던 엄마의 옷이나 구두가 얼마나 눈부시게 빛났는지, 엄마는 지금도 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말하곤 한다. 엄마는 아버지의 사랑과 귀여움을 독차지한 고명딸이기도 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던 당신의 멋쟁이 아버지. 광나는 그 오토바이를 학교 앞에 몰고 와 당신의 어깨를 으쓱하게 만들었던 당신의 하늘. 


어떤 상처는 시간의 힘을 모른다. 엄마에게는 아버지를 잃은 일이, 그러면서 겪어야 했던 일들이 그랬던 것 같다. 외할머니와 사이가 안 좋았던 엄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무작정 집을 나와 타지로 갔다. 가족들도 딱히 엄마를 찾지 않았다고 했다. 낯선 곳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을 만나고 결혼해 세 딸을 낳고 한 번의 실패를 겪고 거기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는 동안 아무도 엄마를 찾지 않았다고.


엄만 그 시절을 "손 내밀어주는 사람 하나 없던 때"라고 불렀다. 아버지와 함께한 세월은 그토록 선명하게 추억하면서 그 이후의 시간은 마치 뭉뚱그려진 덩어리처럼 표현했다. 아버지를 앗아간 세상에 반항하듯이 살았던 거대한 시간의 감옥처럼.


외할아버지는 엄마가 어엿한 숙녀가 되는 걸 보기도 전에 눈을 감으셨다. 결혼을 빨리하고 아이를 일찍 낳던 시절이니 그의 나이 오십 언저리였을 테다. 예순을 바라보는 엄마가 갖고 있는 외할아버지의 사진도 지금의 그녀보다 앳된 얼굴에 멈춰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엄마는 울 때마다 어린 아버지를 찾는다. 엄마에게는 그날의 상실이 세월로도 지워지지 않는 그런 상처일지 모른다.


시간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그건 미래를 향해 올곧게, 의심의 여지없는 직선으로 뻗어가는 무엇이 아니라는 생각을. 휘어지고 엉킨 선을 따라 어제는 오늘이 되고 또 내일이 되고. 그리하여 지나간 줄로만 알았던 세월도 아버지의 사진에서, 그 앞에서 우는 엄마의 얼굴에서, 벚꽃이 질 무렵이라던가 혹은 어느 바다에서 커다란 파도가 되어 우리를 삼킨다는 생각을. 4월이면 그런 세월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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