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때 잊을 만하면 연락 오는 과 동기가 한 명 있었다. 한쪽 귀에 꼬깔콘 모양 피어싱을 달고 다니던 걔는 강남의 아파트에 살고 소년기의 한 시절을 미국에서 보낸 적이 있어, 그런 삶에 대한 면역력이 부족했던 내게는 일종의 계급적 위화감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었다. 내성적이게 보이던 첫인상과 달리 모든 과 행사와 술자리에 꼬박꼬박 참여한다는 사실도 걔와 나 사이의 거리를 넓혔다. 그 시절 나는 그것이 청춘의 특권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낮이나 밤이나 술에 취해있던 동기들을 시시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걔는 낮이건 밤이건 사람들과 몰려다니면서 크게 웃었고 비속어를 섞어가면서 농담을 잘했다. 그런 걔의 표정을 보면서도 난 우리가 친해지긴 어렵다고 생각했다. 처음 맞닥뜨린 20대의 사회에 적응하며 배우게 된 표정일 뿐 뒤로는 어떤 얼굴을 감추고 있을지 모르는 일인데도, 왠지 걔의 야트막한 속을 다 알 것만 같았다. 젊은 만큼 어리석었던 난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걔가 아버지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자기 전에는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첫사랑을 했는지 같은 건 하나도 궁금하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그토록 일방적인 연락이 오랜 기간 지속된 건 내 편협하고 오만한 속내를 몰라서였겠지. 걔는 종종 과 모임에 나를 초대했고, 방학 때는 방학인데 뭘 하냐고 물었고, 생일에는 생일을 축하한다며 툭툭 카톡을 보냈다. 늘 사람들의 중심에 있었던 그 애는 그런 연락쯤 누구에게나 할 것이었다. 그걸 핑계 삼아 고마운 마음을 모른 척하고는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걔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게 귀찮게 느껴질 때쯤 연락이 뜸해진 걸 보면 아주 그렇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아주 오랜만에 걔에게서 연락이 다시 온 건 내가 졸업한 뒤로도 직업을 못 구해 백수였을 때였다. 사회가 정한 시간표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감각, 어디에도 내 자리가 없다는 감각, 이루지 못한 어떤 것들이 눈앞에서 자꾸만 아른거리는 감각 때문에 사람들을 멀리하고 매일 같이 지나치게 긴 일기를 쓰던 때. 대부분의 동기들처럼 걔는 나보다 앞서 직업의 세계에 발을 디딘 채였고 그러면서 많은 것들이 잘 풀려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걔가, 한 번도 먼저 연락해 상냥하게 안부를 물은 적 없었던, 친구라도 부르기도 애매한 과 동기의 생일을 기억해 축하한다며 연락했다는 사실은 대단히 특별한 일처럼 느껴졌다. 나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게 그날처럼 고맙게 느껴진 날도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때 내게는 그런 종류의 관심과 따뜻한 말 한마디가 절실했던 걸지도 모른다.
이후에도 걔와는 따로 만나지 않았다. 그 애의 결혼식에서 한 번, 다른 동기의 장례식장에서 한 번 만나 근황을 물었을 뿐이다. 우리가 서로 가까워질 수 없는 성질의 두 사람이라는 것은 시간의 힘으로도 증명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시절인연이라는 말이 슬프고 허무하게 느껴질 때마다 나는 그 애의 연락을 받고 마음이 따뜻하게 부풀었던 그 밤을 떠올린다. 끝이 있는 인연이라도 한때나마 한 줌의 온기를 나눴다면 그걸로 충분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