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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식문화진흥 Sep 18. 2020

추석제사

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

추석이 멀지 않았다. 제사를 모시는 이들에게 ‘추석 제사’는 귀하고 크다.


집집마다 제사를 두고 설왕설래 말들이 많다. 과일을 어디에 놓는지, 육포와 생선을 어디에 놓는지 헛갈린다. 오른쪽인지 왼쪽인지를 두고 부자지간이 헛갈릴 때도 있다. “연세 드신 아버님이 매년 제사상 진설을 두고 헛갈린다”는 아들의 은근한 불평(?)도 쉬 들을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두 부질없는 짓이다. 오늘날의 대부분 제사상 진설(陳設)은 ‘전통’도 ‘정통’도 아니다. 뒤틀렸다. 금과옥조로 여기는 홍동백서(紅東白西), 조율이시(棗栗梨柿)부터 엉터리다.


홍동백서는, 붉은 과일은 동쪽, 흰 과일은 서쪽이라는 뜻이다. 우스갯소리 삼아 묻는다. 겉은 녹색이고, 속은 붉은 수박은 붉은 과일인가, 녹색 과일인가? 겉의 색깔 따라 녹색이라면, 어디에 놓는 것이 맞을까? 홍동백서라면 녹색을 놓을 곳이 없다.   

경당 장흥효 선생 불천위제사.

조선 시대에는 오늘날과 같은 사과도 없었다. 조선 시대에는 능금[林檎, 임금]이었지 사과가 아니었다. 능금과 사과는 다르다. 일제강점기에 품종개량을 했고, 일본에서 들여온 품종이다. 제사상에서 뺄 것인가? 그렇지 않다. 상당수의 곡물, 과실이 외국 품종, 외래 품종이다. 외국산 품종을 모두 가려내면 제사상 차리기가 어렵다.

 “제사상에 바나나를 놓아도 되느냐?”고 묻는다. 된다. 돌아가신 분이 좋아하셨고, 정성스럽게 마련했다면 가능하다. 제사는 정성이다.  


홍동백서는 ‘전통’이 아니다. 우리 것도 아니다. ‘홍백가합전(紅白歌合戰)’은 일본 NHK 방송사의 연말 가요프로그램이다. 일본인들은 홍팀과 백팀으로 나눈다. 운동회도 마찬가지다. ‘홍백’이 일본 색이라고 해서 우리는 ‘청백전’으로 바꾸었다. ‘홍군(紅軍)’ ‘백군(白軍)’은 헤이안[平安] 시대 말기의 ‘겐페이 전쟁[源平合戦, 1180~1185년]’에서 비롯되었다. 겐페이 전쟁은, 중앙을 장악했던 헤이시[平氏] 가문과 지방 세력인 겐지[源氏] 가문의 내전(內戰)이다. 두 진영은 붉은색(헤이시)과 흰색(겐지)의 군기를 사용했고, 붉은색과 흰색은 일본인들의 전통적인 색깔로 남았다. 1000년 전의 일이다.  


우리 기록에는 ’홍백‘이 없다.


조선 초기 가례(家禮)를 기록한 “세종오례의”나 예학의 거두로 일컫는 사계 김장생(1548~ 1631년)의 “사계전서”, 퇴계 이황(1501~1570년)이나 우암 송시열(1607~1689년), 퇴계의 학통을 이은 갈암 이현일(1627~1704년) 등 거유(巨儒)들의 편지, 글에도 홍동백서는 없다. 제사상 진설법에 대해서 끊임없이 토론하지만 ’홍백‘은 없다. 과일은 구분하지 않고, ’실과(實果)‘로 기록했다.


‘조율이시’도 마찬가지. 조율이시는 대추, 밤, 배, 곶감이다. 곶감과 밤, 대추는 모두 겉이 붉은 것들이다. 사이에 배가 끼어 있다. ‘붉은색+흰색+또 붉은색’이다. 배는 겉은 누렇고 속살은 희다. 이 네 가지 과일을 두고 순서를 정하고 홍동백서에 맞추려면 도무지 맞지 않는다. 홍동백서와 조율이시가 충돌한다.


홍동백서, 조율이시는 일제강점기나 해방 이후, 생긴 것이다. 도무지 근거가 없는 표현들이다. 근거가 없으니 근거를 물으면 누구나 “오래전부터” “윗대 선조 때부터”라고 옹색하게 대답한다. ‘홍동백서’ ‘조율이시’는 조선 시대 기록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전통도 아니고, 정통도 아니다. 일제의 잔재다.


제사의 형식과 내용도 달라졌다. 조선 시대 가례(家禮)는 기제사(忌祭祀), 사시제(四時祭), 삭망제(朔望祭), 명절 차례[茶禮] 등이다.


기제사는. 1년에 한 번, 돌아가신 날 음식을 차려내고 조상을 기리는 행사다. 조부, 조모가 모두 돌아가셨으면 조부님 기일에 조모님도 모신다. 조모님 기일에 조부님을 모시기도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바로 그 제사다.


시제, 사시제는 계절마다 치르는 제사다. 귀히 여기던 제사였지만 지금은 사라졌다. 사시제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에 모시는 제사다. 계절마다 생산되는 곡식, 과일, 어물, 고기류를 내놓았다. 조상에게 “이번 계절에는 이런 곡식을 거두었습니다”라고 고한다.


조선 예학(禮學)의 거두 사계 김장생이 기록한 “사계전서” 제30권_가례집람(家禮輯覽)_제례(祭禮)의 내용이다. 사시제를 설명한다.       


(전략) 3개월이 지나기 전에 또다시 제사 지낼 경우에는 제사 지내는 기일이 지나치게 촉박하여 번거로우면서 설만하게 되는 듯하고, 이미 3개월이 지난 뒤에도 다시 제사 지내지 않을 경우에는 제사 지내는 기일이 지나치게 멀어서 마치 태만하여 그 어버이를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천도는 한 해에 네 철이 있다. 그러므로 군자가 제사를 지냄에 천도에서 법을 취하여 한 철에 한 번 제사를 지내어 일 년이면 통틀어서 네 번 제사를 지내는 법이다. 이것은 (중략) 그 중도를 얻는 것인바, 천도가 3개월마다 한 철이 되는 것에 합치되는 것이다.

 

삭망제는 3년이 원칙이다. 초상이 끝나고 나면 3년간,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사당(祠堂)에서 간단한 제사를 모신다. 기제사와 같은 큰 규모는 아니다. 사당에 간단한 농산물, 음식을 올리고 절을 한다. 삭망제 대신 3년간 시묘(侍墓)를 하기도 했다. 이 기간에는 벼슬살이도 멈추었다. 삭망제, 사시제 등은 반가에 사당(祠堂)이 있던 시절의 이야기다. 사당이 사라졌는데 삭망제를 모실 방법도 없다.


문제는 ‘명절 제사’다. 미리 밝히자면, 명절은 제사가 아니다. 차례[茶禮]다. 차 한잔을 내는 간단한 상차림이다. 오래전에도 그러지 않았느냐고? 그렇지 않다. 기제사의 상차림과 명절 상차림이 같아진 것은 불과 60년 정도다. 그 이전에는? 기제사의 상차림과 명절 상차림은 달랐다.  


추석은 설날, 한식, 단오 등과 더불어 여러 명절 중 하나였다. 대단한 상차림으로 제사를 모신 것도 아니고, 타향살이하던, 멀리 떨어져 살던 가족이 모이는 날도 아니었다. 오늘날 추석 제사상은 일 년에 한 차례 모시는 기제사와 닮았다. 닮은 정도가 아니라 똑같다. 기제사와 같은 음식을 차리고, 같은 형식으로 모시면서 우리는 ‘명절 제사’라고 부른다. 원형은 다르다.


명절 중, 한식, 단오의 행사는 거의 사라졌다. 사당이 사라지니, 사시제, 삭망제 등도 사라지고, 명절의 차례도 사라졌다. 지금은 돌아가시는 날 모시는 기제사와 설날, 추석의 제사만 남았다. 기제사와 설날, 추석의 제사는 형식, 내용이 같은 것일까? 아니다.


추석을, 흔히 ‘민족 대명절’이라고 이야기한다. ‘오곡백과(五穀百果)가 무르익는 계절’이라고도 표현한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표현도 썼다. “풍성한 음식들을 차려놓고 조상님에게 차례(?)를 모신다”라고도 말한다. 오곡은 쌀, 보리, 콩, 조, 기장 등을 이른다. ‘모든 곡식’이라는 뜻이다. 백과도 마찬가지다. ‘모든 과일’을 이른다.


민족 대명절, 오곡백과, 한가위, ‘추석에 조상님에게 제사’?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우리 고유의, 오래된, 아름다운 풍습이라고 믿는다. 과연 그럴까?


음력 8월 15일은 양력으로 대략 9월 중하순부터 10월 중순까지다. 이 시기에 ‘오곡백과’가 무르익을까? 그렇지 않다. 생산되는 과일은 귀하다. 논과 밭의 작물 역시 아직 수확할 수 없다. ‘오곡’ 중 으뜸인 벼는 11월에 수확한다. ‘올벼’가 아니면 양력 9월에는 벼 수확이 힘들다. 다른 ‘오곡백과’도 마찬가지다. 감도, 밤도, 배도, 사과도 제대로 맛이 들지 않는다.


민족대이동은 오래된, 아름다운 우리 풍속일까? 그렇지 않다. 민족대이동은 가족 구성원 중 아들, 딸들이 외지, 대도시로 나가면서 시작된다. 공장, 기업, 학교가 대도시에 대규모로 생기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이후다. 그 이전에는 민족대이동이 없었다. 교통편도 그리 많지 않았다. 한국의 ‘마이카시대’는 1980년대 이후다.  


조선은 농경 국가다. 사람들의 이동도 최대한 막았던 국가다. 인구 이동도 필요치 않았다. 집안의 대소사에는 누구나 고향으로 움직였다. 추석이라고 민족대이동을 할 일은 없었다. 추석, 민족대이동은 산업화가 이뤄진, 우리 시대의 이야기다.

제사가 끝난 뒤 차리는 손님 밥상 모습.

언제부터, 왜, 오늘날 같은 제사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을까?


1970년대 산업화, 한국사회의 신분제 붕괴와 관련이 있다. 갑오경장 이후 신분제도가 무너졌다.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 우리는 ‘신분제도 붕괴’를 엉뚱하게 받아들였다. 신분 차별을 없애는 대신, ‘전 국민의 양반화’를 만들었다. 갑오경장 이후, 대부분 집안에는 족보를 만들고, 누구나 양반 출신임을 내세웠다. 막상 양반이 되었는데, 안타깝게도 양반임을 드러낼 방법이 없었다. 관혼상제가 화려해졌다. 정부는 화려한 결혼식을 막으려 화환 숫자도 제한하고, 끊임없이 ‘간소한 가정의례’를 강조했다.


산업화 사회에서 객지로 떠난 아들, 딸들은 집안의 기제사 참여가 불가능했다. 기제사는 모두 다른 날이다. 제사 모시러 각자 편한 날 휴가를 내는 것은 힘들다. 3부제 공장에서 한두 명의 직원이 기제사를 모시러 휴가를 내면 생산라인을 세워야 한다. 숙련된 노동력이 귀하던 시절이다. 추석이면 큰 회사에서는 각지로 떠나는 버스에 직원들을 태워 보냈다. 추석, 설날에 단체로 휴가를 보냈다. 보너스와 각종 선물을 한 아름씩 안겼다. 그 버스에 다시 직장으로 돌아오는 ‘숙련 노동자’들을 태웠다.  


오늘날 추석 제사는 이리저리 뒤섞은 것이다. 명절 중 하나인 추석과 늦가을 제천(祭天)행사인 동맹(東盟, 고구려), 무천(舞天, 동예), 영고(迎鼓, 부여), 시월제(삼한) 등을 뒤섞었다. 여기에 기제사의 형식과 내용을 더했다.


멀리 떠났던 아들, 딸들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날은 추석, 설날이다. 민족대이동이다. 추석과 제천행사를 더 하니, 한가위, 민족대이동,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추석 대명절이 되었다.  


다시, 제사를 묻는다. 제사는 어떻게 모셔야 하는가? 조선 시대 유학자들의 대답이다. 간소함과 정성이다. 가난한 이들도 제사를 모실 수 있게 간소해야 한다.


역시 유학의 거두였던 명재 윤증(1629~1714년)은, “가난한 후손들도 제사를 모실 수 있도록 귀한 기름을 많이 쓰는 음식은 사용하지 말고, 제사상의 크기를 줄이라”고 말한다.


제사의 바탕은 화려함이 아니다. 정성이다.



본 글은 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가 2020년 3월부터 한국음식문화 누리집에 게재 중인 정기칼럼 내용입니다. 황광해 칼럼니스트의 주요 저서로는 <한식을 위한 변명>(2019), <고전에서 길어 올린 한식이야기 식사>(2017), <한국맛집 579>(2014) 등이 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한식문화진흥사업의 일환으로 매주 한식에 대한 유용한 칼럼을 소개합니다. 내용에 대한 문의는 한식문화진흥사업 계정(hansikculture@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본 칼럼은 한국음식문화 누리집(www.kculture.or.kr/main/hansikculture)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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