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
곡물로 고운 가루를 만든다. 물이나 다른 액체에 적셔 반죽을 만든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긴 가락을 만든다. 국수다. 먹는 것은 결국 곡물이다. 곡물을 통째로 먹으나, 국수로 만들어 먹으나 결과는 같다. 우리 몸에 곡물이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꾸준히 국수를 찾아 헤맨다. 가락이 고운 국수, 거친 것, 단면이 동그란 것, 네모난 것을 구분한다. 굵고 가는 것, 색깔이 노란 것, 빨간 것, 흰 것을 가른다. 손으로 만든 국수와 기계로 만든 것을 가른다. 육수에 따라 또 가른다. 바지락 칼국수가 있고, 멸치 육수, 고기 육수의 국수도 있다.
우리의 국수 역사는 슬프다. 국수를 만들기 가장 좋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밀가루다. 한반도는 밀이 잘 자라지 않는다. 품종개량을 통하여 한반도에서도 밀 농사가 쉬워졌지만, 여전히 한반도의 밀은 국수 만들기에 그리 좋지 않다. 하물며 고려 시대에는 밀 자체가 귀했다. 귀한 재료를 사용하니, 서민들은 쉬 국수를 먹을 수 없었다.
“선화봉사고려도경(고려도경)” 제22권_잡속(雜俗)1_향음(鄕飮)의 한 부분이다.
(전략) 나라 안에는 밀이 적어 다 상인들이 경동도(京東道)로부터 사오므로 면(麵)값이 대단히 비싸서 큰 잔치가 아니면 쓰지 않는다. 식품 가운데도 나라에서 금하는 것이 있으니, 이 또한 웃을 만한 일이다.
‘경동도’는 송나라의 수도 변경(汴京, 카이펑 開封)이 있는 중국 하남성(河南省) 인근과 산동성 등을 이른다. 고려는 밀이 귀했다. 경동도, 중국 하남성, 산동성 일대에서 수입해야 한다. 밀이 귀하니 밀가루로 만든 국수는 더 귀하다. 면 값이 비쌀 수밖에 없다. 지금으로 치자면 고가의 수입품이다.
“고려도경”을 쓴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 1091~1153년)의 비뚤어진 시각이 느껴진다. 고려는 밀이 귀하니 당연히 ‘큰 잔치에서나 국수’를 쓸 수밖에 없다. 귀한 물건이니 국가에서 금하는 것은 당연하다. 밀, 국수가 흔한 중국과 고려를 같은 선상에서 비교한 것은 송나라 사신 서긍의 오만일 뿐이다.
국수는 인류의 공통적인 꿈이다. 반죽을 조리해서 먹으나, 전으로 혹은 떡으로 먹어도 된다. 인간은, 불행히도, 곡물가루 반죽을 만나면 늘 국수를 꿈꾼다. 같지만 다르다. 면 반죽을 가늘게 만든 국수는 황홀하다. 국수는 귀하다. 어떤 곡물가루든 국수로 만들려고 애를 쓴다. 국수는 꿈이다.
강원도 산골에서 먹었던, 지금도 남아 있는 올챙이 국수도 슬프다. 옥수숫가루로 국수를 만들기는 힘들다. 옥수숫가루는 점성이 떨어진다. 잘 뭉쳐지지 않는다. 옥수숫가루를 뭉쳐서 체 등의 가는 구멍으로 밀어낸다. 구멍을 통과한 반죽은 마치 국수같이 아래로 떨어진다. 점성이 약하니 길게 뽑히지 않고 툭툭 끊어진다. 가늘고 짧은 옥수수 가락이 마치 물속에서 노니는 올챙이 같다. 그래서 올챙이 국수다. 그냥 반죽을 찌거나 지져서 먹어도 결과물은 같지만, 사람들은 국수를 고집한다. 국수에 대한 꿈이다.
슬프게도 조선 시대에는 이마저도 없었다. 옥수수는 ‘옥+수수’다. 알갱이가 옥처럼 영롱한 혹은 구슬처럼 둥근 수수다. 개화기 이후 한반도에 들어왔다. 그 이전에는 수수만 있었다. 수수로는 국수로 만들 수 없다.
국수는 귀한 음식이다.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에는 필요하다. 오늘날도 “언제 결혼할래?”라는 질문 대신 “언제 국수 먹여줄래?”라고 묻는 이들이 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는 가장 큰 네 번의 행사, ‘관혼상제(冠婚喪祭)’에는 가장 귀한 음식을 내놓았다. 성인식, 혼례, 초상, 제사 등이다. 제사 모시거나 손님 맞는 일이다. 혼례에도 반드시 떡, 국수 등 귀한 음식을 내놓아야 했다. 경북 안동의 국수 제사가 살아남은 이유도 간단하다. 제사는 날짜가 정해져 있다. 미리 국수를 준비할 수 있다. 결혼식도 마찬가지다. 국수를 마련한다. 문제는 초상이다. 초상은 늘 급작스럽게 닥친다. 설혹 돌아가실 날을 안다고 해도, 미리 날짜를 정해 국수를 준비할 수도 없다. 초상에는 국수 대신 육개장(예전에는 개장국 등)을 내놓았다. 오늘날 초상을 당하면 육개장을 내놓는 이유다.
서민들이 국수를 맛보는 것은 힘들었다. 서민들은 결혼식이나 제사 등에서나 국수를 먹을 수 있었다. 경북 안동에서는 지금도 국수 제사를 모신다. 제사상에도 국수를 올리고 손님 대접에도 국수를 내놓는다. 국수는 귀한 음식, 보기 힘든 음식이었다. 궁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4년(1422년) 5월 17일(음력)의 기록이다. 제목은 “수륙재의 인원을 정하다”이다.
예조에서 계하기를, “태상왕의 수륙재(水陸齋)에 (중략) 대언(代言)과 속고치[速古赤] 외에는 반상(飯床)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반상에는 다섯 그릇에 불과할 것이요, 진전(眞殿)과 불전(佛前) 및 승려 대접 이외에는 만두(饅頭)ㆍ면(麪)ㆍ병(餠) 등의 사치한 음식은 일체 금단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 4년 5월 10일(음력), 태종대왕이 승하하셨다. 세종대왕에게 아버지 태종은 ‘아버지’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3남인 자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왕위를 물려준 뒤에도 외교, 국방 등 힘든 일은 도맡았다. 그런 태종이 돌아가셨다. 세종으로서는 최고의 예를 갖추고 싶었을 것이다. “진전과 불전 및 승려 대접 이외에는 만두, 면(국수), 병 등 사치한 음식을 일체 금단하소서”라는 보고가 올라온다. 그렇게 하라고 말한다. ‘손님맞이’지만 가능하면 화려한 음식, 국수는 줄인다. 국수는 그토록 귀한 음식이었다.
만두, 국수, 떡은 모두 곡물가루로 만드는 것이다. 오늘날 같은 분쇄기는 없었다. 쌀을 가루로 만드는데 많은 공력이 들었을 것이다. 귀한 음식이다. 그나마 음식 재료나 일손이 넉넉한 궁중이니 소규모 인원을 위한 국수 만들기가 가능했을 것이다. 그래도 진전(국왕)이나 부처님 앞, 승려들만 겨우 국수, 만두, 떡 등을 받을 수 있었다.
재료나 일손이 넉넉하게 있다 하더라도, 국수는 쉽지 않다. 쌀가루로 떡을 만드는 것과는 다르다. 쌀가루로 국수를 만드는 일은 아예 불가능했다. 쌀가루를 쓸 수 없다면, 다른 가루를 찾아야 하지만, 그 역시 쉽지 않다. 아마도 메밀을 사용했을 것이다. 얼마쯤의 밀가루를 섞었을는지는 모르지만, 한반도의 곡물 중 그나마 국수, 만두피가 가능한 것은 메밀 정도다.
대맥(大麥)은 보리, 소맥(小麥)은 밀, 교맥(蕎麥)은 메밀이다. 이중 밀은 생산량이 턱없이 부족하고, 보릿가루는 만두피나 국수 만들기에 불리하다. 결국, 교맥, 메밀이다.
가난한 강원도 산골도 마찬가지다. 강원도의 메밀 사용을 보면, 세종대왕 당시 국수 만들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메밀국수’ ‘막국수’는 강원도 산골의 음식이다. 몹시 추운 함경도 산간지방이 아니면, 다행히도, 메밀은 기를 수 있었고, 먹었다. 문제는 역시 메밀로 국수를 만들기는 까다롭다는 점이다.
강원도 산골에서는 겨울철이 되어야 결혼식 등이 진행된다. 늦가을까지는 산간의 거친 농사일로 바쁘다. 늦가을을 지나며 ‘밀린’ 결혼식이 열린다. 가난한 산골 마을. 국수는 만들어야 한다. 제분소도 멀다. 전기도 없다. 전기, 제분소 없이 메밀가루를 만들어야 한다. 맷돌과 절구질이 기껏이다. 거친 메밀가루를 얻을 수 있다.
최근에는 100% 메밀가루로 만든 냉면, 막국수가 여기저기 팔리고 있다. ‘100% 메밀 막국수, 냉면’을 끝내 믿지 않는 이들은 강원도 토박이들이다. 어린 시절, 수도 없이 여러 번 메밀 막국수를 먹었다. 메밀은 산골 사람들의 주식이었다. 어린 시절 먹었던 메밀국수는 메밀 함량이 50% 이하였다. 녹말이나 다른 재료를 섞어서 국수를 만들었다.
메밀 함량이 높을 경우, 메밀국수는 쉬 풀어진다. 힘없이 풀어진 메밀국수를 ‘숟가락으로’ 먹었던 이들은 메밀 100% 국수를 믿지 않는다. 국수 만들기는 힘들었다. 밀가루가 귀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한반도의 국수가 흔해진 것은 일제강점기와 1950년대 중반부터다. 일본이 만주, 중국을 침략하면서 엉뚱하게 국수는 흔해진다. 일제 침략으로 중국에서 약탈한 밀이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갔다. 한반도의 대 일본 수출 기지는 부산 부근의 구포였다. 조선 시대, 구포는 낙동강 등을 따라 물자를 운반하는 내륙의 항구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배후의 김해평야 등에서 생산되는 곡물과 중국에서 경부철도를 따라 운반한 곡물을 일본으로 운송하는 항구였다. 구포에는 정미소, 제분 시설 등이 생겼고, 여기서 밀을 도정, 제분했다. 국수가 흔해졌다. 구포에는 국수 공장들이 생겼고, 오늘날의 ‘구포국수’가 시작되었다.
50년대 초중반 미공법 480조(PL 480)가 시작되었다. 밀가루에 관한 한, 마치 폭죽 같았다. 귀한 밀가루가 한반도에 무제한 쏟아져 들어왔다. 빈곤한 시절이다. 밀가루는 단숨에 기아를 넘어서게 했다. 구포를 포함하여 전국 여기저기 제분, 국수 공장이 생겼다.
잔치국수로 부르는 세면(細麪)이 흔해진 것도 미공법 480조 덕분이다. 수제비, 가는 국수, 홍두깨질하는 칼국수 등이 모두 흔해졌다.
오늘날 삼성의 시작도 국수, 삼성상회다. 1938년 대구에서 처음 문을 연 삼성상회의 주요 생산, 판매 품목은 국수였다. 삼성상회의 국수 브랜드 이름은 별표국수. 혹은 삼성별표국수였다.
삼성상회는 (중략) 하나 더 새로운 사업이 추가됐다. 바로 국수사업이었다. 이병철은 제분기와 제면기를 가져다 놓고 국수를 만들어 팔았다. 글로벌기업 삼성의 첫 출발은 과일과 국수 사업이었던 셈이다./국수 브랜드는 ‘별표’였다. 3개의 별이 선명하게 새겨진 ‘삼성별표 국수’ 상표다. 이병철은 당시 3개의 별을 의미하는 삼성을 ‘三星’이란 한자로 쓴 로고를 썼는데 이는 1950년대까지 널리 사용됐다./그가 국수 사업에 나선 건, 일제의 식량 수탈이 심해지면서 식량이 턱없이 부족하다는데 착안한 것이다. 국수는 히트를 쳤다. 한 다발에 10전짜리 국수를 60다발씩 포장한 상자가 하루에만 100개 이상 팔려 나갔다. (후략)
국수는 귀한 음식이었다. 국수가 흔해지면서, 귀하지 않게 여긴다. 태종의 수륙재에서 귀하게 여겼던 국수는, 밀가루가 흔해지면서 시장통에서도 쉽게 만나는 ‘싼 음식’이 되었다.
본 글은 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가 2020년 3월부터 한국음식문화 누리집에 게재 중인 정기칼럼 내용입니다. 황광해 칼럼니스트의 주요 저서로는 <한식을 위한 변명>(2019), <고전에서 길어올린 한식이야기 식사>(2017), <한국맛집 579>(2014)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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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칼럼은 한국음식문화 누리집(www.kculture.or.kr/main/hansikculture)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