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
검은 것을 검다고 말하지 않는다. 흰 것도 마찬가지. 희다고 말하지 않는다. 섞는다. 회색이라고 말한다. 검은 것도, 흰 것도, 회색도 모두 회색이라고 말한다.
참 답답해서 하는 소리다. 하루, 이틀, 한두 해도 아니다. 천 년 동안 이렇게 말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만두 이름’ 이야기다.
만두는 곡물로 껍질[皮, 피]을 만들고 여러 가지 재료로 속을 채운 음식이다. 우리는 모두 만두라고 부르지만, 중국의 원형 만두는 모두 3종류다. 지금도 중국인들은 이 3종류를 분명히 나누어 부른다. 3종류는, 만두, 포자, 교자다.
우선 만두. 만두(饅頭, mantou)는 교자, 포자와 달리, 곡물가루를 쪄낸 떡 혹은 빵이다. 만두는 차라리 빵에 가깝다. 곡물가루로 반죽을 만들어 솥에 푹 쪄낸다. 속에는 아무것도 넣지 않는다. 그저 쪄낸 곡물가루 반죽이다. 반찬(?)으로 먹는 것은 따로 낸다. 부추와 돼지고기를 볶아 내기도 하고, 짭조름한 여러 채소를 내기도 한다. 기호에 따라 양고기를 곁들여 먹기도 한다. 중국의 원형 만두는 ‘쪄낸 곡물가루와 곁들인 반찬’이다. 모양은 우리의 호빵과 비슷하다. 중식당에서 ‘꽃빵’이라고 내놓는 것이 바로 만두다. 만두는 반드시 ‘발효한 곡물 피’를 사용한다. 밀가루 등 곡물가루를 하루, 이틀 전 혹은 몇 시간 전에 반죽한다. 적절한 조건에서 발효시키면 곡물가루 반죽은 부풀어 오른다. 발효균 때문이다. 만두는 발효한 반죽을 쪄낸 것이다.
포자(包子, baozi)도 우리는 만두라고 부른다. 속에 고기를 넣었다고 ‘고기만두’라고 부르지만, 만두가 아니라 포자다. 역시 발효한 곡물가루 반죽으로 겉을 싸지만, 더러 발효하지 않은 생 곡물가루로 껍질을 쓰기도 한다. 포자의 윗부분은 마치 보자기처럼 틀어서 묶는다. 주름진 부분이 마치 보자기 묶은 것 같다. ‘싼다’ ‘보자기’ 등의 뜻을 지닌 ‘포(包)’라고 이름 붙였다. 포자라고 부르는 이유다. ‘보자기처럼 묶은 것’이다.
홍콩, 광동성 등에서 유명한 ‘만두’ 중 상당수는 포자다. 우리가 흔히 소룡포라고 부르는 것도 포자다. 소룡포(小籠包, Xiaolongbao)의 원래 이름은 소룡포자(小籠包子)다. 마치 새장같은 작은 포자다.
교자(餃子, jiaozi)는 반드시 생 곡물가루로 만든다. 포자 혹은 만두와 다르다. 교자의 한자표기는 한국, 중국, 일본이 같다. 모두 ‘餃子(교자)’다. 한국과 일본은 발음도 같다. ‘교자(gyoja)’다. 반달 모양이다. 생 곡물가루로 껍질을 만들고 그 속에 고기, 생선, 채소 등을 넣는다. 반달 모양으로 만들어서 뜨거운 증기로 쪄내면 증교자(蒸餃子), 물에 삶으면 수교자(水餃子)다. 중국인들은 증교자와 수교자도 꼼꼼히 구별한다. 한국의 화교 노포들도 마찬가지. 물에 삶으면 반드시 수교자라 부른다. 우리는 찌든 삶든 모두 ‘찐만두’라고 부른다. 포자를 쪄도 찐만두라고 부르고, 교자를 삶아내도 찐만두라고 부른다.
군만두는 더 혼란스럽다. 우리가 교자라고 부르는 것은 대부분 구운 교자다. 교자의 한쪽 면은 철판 등에서 구웠다. 구운 흔적이 갈색, 검은색으로 남아 있다. 한쪽은 구운 것이 아니라 찐 것이다. 흔적이 없다. 구운 교자다.
우리가 군만두라고 부르는 것은 대부분 ‘교자를 튀긴 것’이다. 만두도 아니고, 구운 것도 아니다. 교자를 고온의 기름에 튀긴 것이지 구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튀긴 교자’를 군만두라고 엉뚱하게 부른다. 정작 중국에서는 보기 힘든 음식인데 한반도에는 튀긴 교자, 군만두가 흔하다. 탕수육을 주문하면 ‘서비스’로 주는 것이 바로 군만두, 정확하게는 튀긴 교자다.
만두와 상화도 혼란스럽다.
상화는 ‘상화(霜花)’다. ‘서리꽃’이라는 뜻이다. 만두 등을 찜통에 넣고 찌면, 마치 서리 같은 수증기가 솟아오른다. 김이다. 만두를 상화, 서리꽃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고려, 조선 시대 각종 기록에는 ‘상화’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여러모로 추정컨대, ‘만두=상화’이지만, 콕 집어 ‘상화=만두’라고 부르기도 애매하다. 상화라고 표현하면서, “(중국, 일본 등의)만두가 우리의 상화와 닮았다”라고 표현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 음식을 두고 같은 것이라고 하지 않고, 닮았다고 했다. 같은 것이 아니라, 비슷한 두 종류의 음식이다. 상화가 어떤 음식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상화는 고려 시대에도 있었다. 대표적인 ‘증거’가 고려 가요 ‘쌍화점(雙花店)’이다. ‘쌍화(雙花)’는 상화의 다른 표현이다.
쌍화점(雙花店)에 쌍화(雙花) 사라 가고신댄
회회(回回)아비 내 손모글 주여이다.
이 말사미 이 점(店) 밧긔 나명들명
다로러거디러 죠고맛감 삿기 광대 네 마리라 호리라 (후략).
“쌍화점”의 첫 부분이다. 내용은, “쌍화점에 쌍화 사러 갔더니/회회 아비가 내 손목을 쥐더이다/이 말이 가게 밖에 들고 나면/조그만 새끼 광대 네 말이라 하리라”.
쌍화점은 만두전문점이다. 재미있는 점은 ‘회회 아비의 쌍화점’이다. 글의 내용만으로는 회회 아비가 쌍화점의 주인인지 손님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손님으로 온 여자의 손목을 익숙하게 잡는 점으로 봐서, ‘주인’이라고 추정한다. 설마 같은 손님끼리 만둣집에서 손목을 쥐었을까? 회화 아비는 쌍화점의 주인이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위구르 등 유목 기마민족이 개성에 살았고, 그들 중에는 만둣집 운영자도 있었다. 우스갯소리로, ‘한반도 최초의 외국계 프랜차이즈’라고 부른다.
이 시는 충렬왕 무렵 지은 것이다. 충렬왕은 특이하게 두 번 왕위에 올랐다. 1274년부터 1298년까지가 1기, 1299년부터 1308년까지가 두 번째 왕위에 올랐던 시기다. 13세기 후반부터 14세기 초반까지다. 거란과 몽골의 고려 침략보다는 뒤 시기다. 거란, 몽골의 문물이 고려와 뒤섞였다. 거란, 몽골은 중국 북쪽, 서쪽의 유목 기마민족의 국가들이다.
만두를 만들어 일부는 먹고, 상당수는 남겨둔다. 습기가 없는 건조한 지역들이다. 만두는 쉬 마른다. 말린 만두를 가지고 다니다가 물에 끓여서 먹는다. 물만 끓이면 끼니를 해결할 수 있다. 편리한 인스턴트 음식이다.
거란, 위구르, 몽골, 말갈, 여진 등은 모두 유목, 기마민족이다. 터키, 요나라, 원나라, 청나라 등을 세웠고, 그중 원나라, 청나라는 이민족의 국가이면서 중국대륙을 다스렸다. 요, 원, 청은 모두 한반도를 침략했다. 전쟁을 통하여 혹은 원나라의 고려 지배를 통하여 많은 북방의 문물이 한반도에 전해진다. 몽골의 원나라는 유럽까지 침략, 정복했다. 유럽, 유라시아 대륙, 아랍의 문물도 몽골의 원나라를 통하여 한반도에 전래된다.
만두는 북방, 서방 기마민족이 한반도에 전해준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제갈공명(181~234년)의 ‘노수대제 만두’는 거짓말이다. 제갈공명이 남만 정벌 후, 돌아오는 길에 노수에서 제사를 모셨다. 겉은 곡물가루로, 속은 양고기를 넣어서, 사람 머리 모양의 음식을 만들어 제사 음식으로 사용했다. 이게 만두의 시작이다. “삼국지연의”의 내용이다. ‘연의(演義)’는 소설이다. 사실도 아니거니와 정사도 아니다. 야사이자 소설, 거짓 이야기이다. 정식 역사에는 제갈공명의 노수대제가 없다. 제사도 없었고, 만두도 없다. “삼국지연의”는 민간에서 오랫동안 전해진 이야기다. 민간에서 긴 세월 동안 갈고 닦았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가 지어 넣었을 가능성이 크다. 사실이 아니고 이야기다.
거란의 요나라 벽화에는 만두 찌는 모습이 남아 있다. 만두는 기마민족의 음식이고, 요나라, 원, 청나라 등 북방에서 시작된 음식이라는 주장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다. 한반도의 만두도 마찬가지. 고려 전기, 중기에도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 만두가 고려 후기에는 활발하게 나타난다. 역시 거란, 몽골 등의 영향이라고 짐작한다.
만두는 세계 공통의 음식이다. 이름이 다를 뿐 전 세계 모든 문명 지역에서는 만두를 먹는다. 이탈리아의 라비올리ravioli나 깔조네calzone도 만두의 한 종류다. 중국이나 베트남의 춘권(春卷; chūnjuǎn)도 마찬가지다. 곡물 피로 겉을 싸고 속에는 고기, 생선, 채소, 곡물 등을 채운 것이다. 국수는 굵고 가는 가락으로 만들지만, 만두는 곡물 껍질로 속을 싼다. 모두 만두다. 남미대륙의 또르띠야tortilla도 역시 만두다. 곡물가루로 겉을 만들고 속에 여러 가지를 넣는다. 또르띠야의 겉껍질, 피는 옥수수다. 남미대륙은 옥수수 원산지다. 옥수수가 흔하니 옥수숫가루로 피를 만들었다.
만두의 시작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하다. 한반도의 만두도 마찬가지다. 고려 말기 만두의 전래 전에 이미 곡물가루로 속을 싼, ‘만두 비슷한 음식’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게 상화일는지 모른다.
만두피의 재료도 다양하다. 반드시 밀가루는 아니다. 고려 말기 목은 이색(1328~1396년)의 시에도 만두는 나타난다. 목은 시에 나타나는 만두의 피는 메밀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 시대 여러 시에 나타나는 만두의 피도 역시 메밀이다. 다음은 “목은집”_여흥음(驪興吟)의 시다.
은어는 비를 얻어 장천을 거슬러 올라오고
솔 아래 새 버섯은 맛이 온전해지려는 때
양곡의 만두 쪄내오면 맛이 또 그만이리니
가을쯤엔 남쪽으로 나도 놀러갈 생각이오
양곡은 동경, 오늘날의 경주다. 목은이 이 시를 남긴 곳은 당시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개성) 혹은 그 인근이었을 것이다. 경주를 두고 ‘남쪽’으로 표현했다.
목은의 시대, 만두는 이미 널리 퍼졌다. 목은의 만두는 메밀 겉껍질을 벗긴 녹쌀 정도로 만들었을 것이다. 목은은, 가을의 경주 나들이를 이야기하면서 만두를 떠올린다.
만두는 열린 음식이다. 겉껍질을 곡물이 아니라 생선으로 만든 어만두(魚饅頭)도 있었다. 속 재료도 다양하다. 모양도 여러 가지다. 만두는 열린 음식이다.
본 글은 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가 2020년 3월부터 한국음식문화 누리집에 게재 중인 정기칼럼 내용입니다. 황광해 칼럼니스트의 주요 저서로는 <한식을 위한 변명>(2019), <고전에서 길어올린 한식이야기 식사>(2017), <한국맛집 579>(2014)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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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칼럼은 한국음식문화 누리집(www.kculture.or.kr/main/hansikculture)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