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inalish Jul 27. 2020

스친 인연에 대한 기록

(1) Mr. 아메리카



내 기억 속에 저장돼 있는 첫 비행은 미국 뉴욕행이다. 8살의 아이는 올려만 보던 파란 하늘을 내려다보는 즐거움에 빠져 어제가 다시 오늘이 될 때까지 한 순간도 눈을 붙이지 않았다. 내 옆에는 아버지와 외국인 아저씨가 차례대로 앉았다. 엄마는 세 살 터울 남동생과 비행 내내 잠을 청했다.

 

지금처럼 좌석별 모니터가 없던 시절. 비행기에서는 동네 찜질방에서 처럼 커다란 스크린을 내리고 영화를 틀어주었다. 몇 편의 영화가 상영됐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보다 더 동그랗던 두 눈은 스크린을 향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옆자리의 외국인 아저씨는 미국 사람이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이라던 그가 한국에 방문한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제법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 아마 영어교사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아저씨는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어린 동양인 소녀를 귀여워했다. 모든 게 신기했던 아이의 호기심 어린 질문들을 친절하고 재밌게 답해주었다. 설렘의 유통기한은 그리 길지 못해서 금세 진정되기 마련이다. 기분 좋은 순간에 가지고 있는 모든 에너지를 다 발산시켜 어른들을 긴장시키는 어린아이들의 설렘은  더더욱 그렇다. 


아마 나 역시 제 풀에 지쳐 곧 잠에 들고 말 거라고 부모님은 생각하셨을 것 같다. 비행시간에는 원래 잠을 자야 할 때가 포함되어 있기도 했으니. 하지만 나의 체력과 정신력은 예상보다 엄청났다. 


세상에서 가장 뚫려있는 곳에 있지만 동시에 갇혀있기도 한 공간. 옹기종기 붙어 있는 비행기 안에서 14시간이라는 긴 시간을 지치지 않고, 행복하기까지 한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었던 건 처음 보는, 낯선 미국인 아저씨 덕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어린아이의 응석이 주변 승객의 여행을 방해할까 걱정돼 반복적으로 나를 제재하고 재우려 하셨다. 그럴 때마다 미국인 아저씨는 괜찮다, 자신도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며 말리는 아버지를 역으로 말렸다. 미국인 아저씨와 나는 비행 내내 국경과 나이를 뛰어넘은 대화를 이어나갔다.


아저씨와의 인연은 미국 도착 후에도 이어졌다. 정확히는 우리 가족이 다시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이어졌다. J.F. 케네디 공항 도착 직전, 미국인 아저씨는 자신의 번호를 알려주었다. 언제든 수다를 떨고 싶을 때 연락하라는 말과 함께. 가끔 국제전화를 걸어 아저씨와 안부도 주고받고 공부한 영어도 자랑했다. 뒤늦게 낯가림을 시작한 내가 전화 거는 것을 쑥스러워하게 되면서 서서히 연락은 끊기게 됐다.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얘기한다. 뉴욕행 비행기에서 만난 미국인 아저씨는 나의 첫 외국인 친구이자, 미국 국적 친구이자, 피부색이 다른 백인 친구이자, 아저씨 친구였다.


미국인 아저씨와의 만남 이후 20년이 지났다. 그 사이 해외여행도 열심히 다녔고 잠깐이지만 유럽에서 살아보고 일할 기회도 주어졌다. 이제는 비행기를 타면 설렘보다는 '추락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부터 앞서는 겁쟁이가 되었지만 사람을 만날 때만큼은 겁먹지 않는다. 어디를 가든, 처음으로 누군가와 만나든.  동양인이, 왜소한 여자가 혼자서 여행하며 겪을 수 있는 숱한 인종차별도 거의 당해보지 않았다. 타고나길 사람에 대한 믿음이 강한 것일 수도 있고, 여행 운이 좋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가장 큰 요인은 나의 첫 친구가 깨우쳐준 가르침이지 않을까 한다.


국적, 인종, 심지어 나이도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지는데 중요하지 않다. 필요한 건 오직 상대방에 대한 호기심과 서로가 동일한 선상에 놓여있는 인격체임을 인지하는 것. 복잡한 세상에 더 복잡한 사람들이 어우러져 살고 있지만 관계에 필요한 조건은 단순하기에 우리의 삶은 조화롭다.





2020.07.25. 제주도 가족여행 후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 JINALISH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