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 속부터 건조함이 느껴져 새벽에 몇 번이고 일어나 물을 마셨다. 물을 계속 마시니 화장실도 가게 되었고 그렇게 비몽사몽 밤과 아침 사이를 보냈다. 정시에 울리는 알람 소리에 눈을 뜨니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다. 푹 자지도 못한 채 거울에 비친 퀭한 눈을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아침이 온 게 실화냐고 되 내이며 출근을 준비했다.
기분도 울적하니 요 며칠 전에 비싸지만 마음먹고 구매한 핑크색 반팔 재킷을 꺼내 들었다. 너무 튀는 거 아닌가 생각도 들었지만 기분 전환도 될 것 같아 손에 잡히자마자 옷걸이에서 벗겨서 내 몸에 걸쳐버렸다. 밝은 색을 입으니 정말 기분도 한결 업되는 것만 같았다.
여느 때와 같이 출근길은 늘 북적거린다. 여덟 시 십 분쯤에 나오면 중학교 학생들을 마주치게 된다. 내 후배들인데 교복이 많이 바뀐 것 같다. 몇몇은 아예 체육복을 입고 등교를 하는 아이들도 보였다. 20년 전에 나도 그렇게 다녔던 때가 생각이 나서 새삼 나이를 실감했다. 나이만 먹은 게 정말 서러웠다.
출근을 하고 나니 배가 너무 고팠다. 코로나여서 미각은 상실했는데 오늘은 왜 그렇게 배가 고픈 건지 오전 열 시부터 낑낑거렸다. 같이 점심을 먹기로 했던 남자 동료가 나랑 점심 약속한 것도 깜빡해서 순간 기분이 확 나빴지만 이윽고 점심을 뭘 먹을지 고민하자 기분이 또 금세 좋아졌다. 열두 시 반,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점심시간이 되자 용수철에 튀어 오르듯 엉덩이를 떼고 동료를 이끌고 앞장섰다. 식사는 입사 후 처음 같이 하는 것이었는데 생각보다 낯설지가 않았다. 아무래도 배가 고파서 먹는 데 집중해서 그랬던 것 같다. 자연스레 연애 얘기를 하게 되었는데 나보고 외로움이 많은 것 같다고 말을 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니, 사람들하고 얘기하는 거 좋아하고 늘 벽 보고 앉아 있는 자리임에도 귀를 쫑긋 세우고 사람들이 얘기할 때마다 뒤돌아서 듣고 있는 걸 보니 사람 참 좋아하고 외로움도 많아 보인다고 느꼈다고 한다. 그러면서 회사 안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 있으면 먼저 다가가 보라는 귀여운 조언도 잊지 않았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제가 누굴 보고 다가가야 하죠?”라고 말하자 동료는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며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저러면서 도대체 누굴 보고 좋아하라는 건지 짜증이 또 확 나려고 했지만 먹고 있는 가츠동이 맛있어서 그냥 넘어갔다. 동료는 멋쩍은 듯 웃으며 또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외로울 때 누군가를 만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냥 저의 경우에는 외로워서 누군가를 만났을 때 결과가 좋지 않았거든요. 외로움이 사라지면 그 사람에 대한 마음도 떠나더라고요”
그 진지한 모습에 하마터면 순간 고개를 끄덕거리며 동조할 뻔했다. 순간 욱하니 들었던 생각은 나는 너무 많이 외로운 시간을 오래 보내서 이제는 만나야만 하는 때라는 것이었다. 나야말로 외로워서 사람 만나지 말라는 주변 조언에 도도하고 첨예하고 남자에 선을 그어가며 철통적으로 까탈스럽게 누군가를 만나지 않았던 장본인이다. 그런데 지금 와서 드는 생각은 다 부질없고 만날 수 있을 때, 좋은 감정이 들었을 때 내 상태가 외롭던지 안 외롭던지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오히려 지금 외로워서 사람을 만나야겠다는 간절함이 생긴 지금의 상태가 좋았다. 지금까지 외로운 감정이 들어도 이성을 만나야겠다는 생각만 있었지 실제 그 감정 때문에 누군가를 내 곁에 둔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철저히 내가 좋아야 만나는 스타일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누군가가 좋아지지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는데 이런 자질구레한 얘기까지는 굳이 꺼내지도 않았다.
그리고 회사에 좀 괜찮아 보이는 이성이 있으면 용기 내서 먼저 다가가라는 조언도 참 귀엽고 앙증맞게 들렸는데 왜냐하면 나는 조금만 호감이 생겨도 직구로 내리꽂으며 바로 좋아하는 티 내며 혼 내주는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나에 대해서 정말 하나도 모르면서 저렇게 얘기를 종알종알하는 모양새가 매우 웃겼다.
어쨌든 나는 지금 내가 외로운 게 좋았다. 이 외로운 마음을 사랑에 대한 간절함으로 승화시켜서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나고 말겠다는 다짐까지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주변의 친한 언니들은 이제 제발 주변을 좀 둘러보고 남자를 찾으라고 여기저기서 조언을 해주었는데 정말 노력이란 걸 해야 하는 건가 싶었다. 그냥 좀 내 눈앞에 떡하니 나타나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아직까지 드는 운명 주의자라고 한다면 아직도 내가 어린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