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의 이야기
밥 잘 사누는 예쁜 누나란 드라마가 방영한 적이 있다. 나는 TV를 거의 보지 않는 편인지라 드라마에 대한 관심도가 낮은 편인데, 그럼에도 이 드라마는 제목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제목과 출연진을 보고 든 생각은 비단 손예진이 아니더라도 밥을 잘 사주면 예뻐 보이지 않을까 였다. 밥을 잘 사 주는 사람은 다 예쁜 사람이 아니던가.
욕구 계층 이론, 다른 말로 욕구 위계 이론이 있다. 이렇게 말하면 거창한데, 말 그대로 사람의 욕구는 모든 욕구가 같지 않고 우선순위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가장 상위 욕구로 자아 초월의 욕구가 있고, 그 아래로
자아 초월 욕구
자아실현 욕구
심미적 욕구
인지적 욕구
존중 욕구
소속 및 애정 욕구
안전 욕구
생리적 욕구
의 8단계로 생리적 욕구가 가장 기본인, 가장 먼저 충족되어야 하는 욕구로 간주된다.
심리학자인 매슬로우가 주창하였고, 그의 제자들에 의해 현재의 8단계의 이론이 정립되었는데, 이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욕구는 계층화되어 있으며, 낮은 단계의 욕구가 충족되면, 그다음 단계의 욕구를 추구 하계 된다.
예과의 심리학 수업과 본과의 정신과에서 이를 배울 때만 하더라도, 나는 어느 정도까지의 내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자아실현의 단계까지 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거창한 고민을 하였다.
이 이론은 각각의 단계 구분이 모호하고, 두세 가지 욕구가 동시에 일어나기도 한다는 점에서 반박받기도 하였다. 매슬로우 조차 죽기 전에는 피라미드가 뒤집어져야 옳았다고 말했고, 경제적으로 풍족해진 현대 사회에서는 맞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대망의 전공의 1년 차 시절, 나는 인간의 욕구는 계층화되어 있음을 몸소 실감하게 되었다. 학생 시절만 하여도 나름 지식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고 생각하였으나, 이는 나의 허영심이었으며, 일단 굶주림과 수면 부족 앞에서는 어떠한 욕구도 살아 남지 못하였다. (이 전공의 일 년 차 와중에도 내가 제일 존경하는 선배님 중 한 분은 본인이 1년 차 일 때 시간을 쪼개어 매일 하루에 한 페이지씩 교과서를 보셨다고 하시니 꼭 모든 사람이 나와 같았던 것은 아닐 거다.)
나는 잠이 진짜 많았던 편이라서 학생 때도 밤을 새본적이 한 손에 꼽는 편이었던지라, (평균적인 의대생이라면 밤을 샌날은 셀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일단 어떤 순간에도 자는 게 최우선이었다. 제한된 24시간에서 최소한의 수면량을 채우고 나면 이제 아낄 수 있는 시간은 먹는 시간밖에 없었던 지라 항상 병동에서 환자 오더를 넣으면서 이것저것을 주어 먹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렇지만, 누군가 왔다 갔다 하고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뻔히 보이는 자리에서는 일 하고 싶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스테이션의 여러 컴퓨터 중 남들 눈에 제일 잘 띄는 자리, 가장 복도에 가까운 자리는 저 연차 전공의 자리이고, 좋은 자리는 간호사님들이나 고년차 전공의들이 쓰게 된다.
한 번쯤은 대학 병원에 가보셨던 기억을 바탕으로 상상해 보시기 바란다. 소위 말하는 스테이션에서 가장 바깥쪽 잘 보이는 복도 쪽 컴퓨터에서 왼손엔 빵과 김밥, 오른손에는 마우스를 쥐고 분노의 클릭질을 하는 덩치 좋은 전공의를 말이다. (말이 덩치 좋은 전공의이지 누군가는 정말 저게 사람인가 돼지 인가 했을 거다.) 수면 시간 확보를 위하여 깨어 있는 모든 시간을 일에 몰빵하고 있던 나에게는 결국 채워질 욕구는 식욕 밖에 없었고, 그래서 더욱이 뭔가 앉아서 일할 때는 끊임없이 먹는 날들이 반복되었다.
그래서일까, 병동에서 회진을 돌다 보면 환자분들이 주머니에 귤이라도 하나씩 넣어주셨고, (이때는 김영란 법이 있기 전이다.) 우리보다 먹을 걸 더 잘 받던 성형외과 전공의 선생님께서는 항상 먹을걸 나눠 주셨다. 특히 나이스 하기 그지없었던 그 당시 성형외과 선생님은 무려 내가 자리에 없어도 케이크 등을 받으시면 꼭 한 조각은 내 자리에 올려놔 주셨는데, 케이크를 먹다가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려 뒤를 돌아보면 진심으로 원빈, 장동건 저리 가라라고 생각하였다. 지금도 충분히 멋있는 분이시지만, 후에 전공의를 마치고 학회에서 뵈었을 때, 인간의 식탐이 얼마나 콩깍지를 씌울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학생 때, 외과 실습 담당 치프 레지던트 선생님이 해주셨던 이야기가 있다. 여자 선생님들이 인턴이 되면 박카스 하나, 비타 500 하나에 넘어가는데 그런데 넘어가지 말라고. 그 당시에는 아니 무슨 박카스 하나에 넘어가라고 생각하였지만, 전공의 생활을 거치며 그 말 뜻을 이해하였다.
이제는 나름 힘든 생활들이 끝났는데, 나는 요즘도 왜 이렇게 食에서 즐거움을 찾으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항상 반복되는 "오늘부터 다이어트 1일 차"를 다시 시작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