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솜 Jun 18. 2019

나의 아름다운 이웃, 82년생 김지영

박완서에서 조남주로 이어지는 불합리와 불평등의 역사 

85년생 한솜 : 오빠. 여기 좀 앉아봐.

79년생 한동 : 아 왜~ 피곤해 죽겠구만. 

85년생 한솜 : 우리 얘기 좀 해.

79년생 한동 : 뭔 얘기를... 갑자기 소름 돋게 왜 이래.

85년생 한솜 : 그때 나한테 왜 그랬어?

79년생 한동 : 뭘.

85년생 한솜 : 옛날에 치킨 시켜 먹을 때마다 아빠가 오빠한테만 닭다리 두 개 다 줬지. 그때 왜 혼자 다 처먹었냐고! 내가 닭다리 좋아하는 거 알면서! 

79년생 한동 : 뭐?? 야... 너 지금 설마... 20년도 더 지난 닭다리 때문에 이러는 거냐?

85년생 한솜 : 그래!! 그렇다 왜!!! 지는 퍽퍽 살 좋아하는 주제에 왜 내 닭다리 두 개 다 먹냐고! 으아아앙!!

79년생 한동 : ... 우냐?




한솜 : 쿨쩍... 됐고. 나랑 김지영에 대해서 얘기 좀 해.

한동 : 누구?

한솜 : 김. 지. 영. <82년생 김지영> 몰라?

한동 : 아. 난 또 뭐라고. 그 페미소설?

한솜 : 페미소설 아니거든.

한동 :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 소설 땜에 내가 가는 남초 사이트 게시판이 발칵 뒤집혔었어. '80년생 김철수'를 쓰겠다는 사람까지 나왔다고. 에휴. 여자들은 참 좋겠어. 하고 싶은 얘기 다 하고 살아서. 행복지수가 아주 높을꺼야 응? 남자들은 뭐 사는 게 편해서 입 다물고 있는 줄 아나. 참나.

한솜 : (한숨) 그 책, 읽어 나 보고 말하는 거야?

한동 : 안 봐도 유튜브야. 애 낳는 거 힘들고 애 키우면서 사회생활하기 힘들단 거 아냐. 여자라서 차별당한 얘기만 써있지? 여자라서 특혜 받는 얘기는 쏙 빼놓고... 너가 모르나 본데 여자애들 일하는 거 가만 보면 완전 여우야. 얼마나 빡치는데. 그럴 때마다 나도 다음 생엔 여자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빈다 빌어.

한솜 : 여우 짓 해서 빡치게 하는 인간은 남녀를 막론하고 사회에 널렸어. 그래서 사회생활은 누구에게나 힘든 거야. 오빠는 정말로 여자들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동등한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작금에 현실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해? 우리나라 남녀 임금 격차를 좀 봐봐. 남성이 100을 벌 때, 여성은 64.7밖에 못 번데. OECD에 가입한 36개국 중에 최하위라고!

한동 : (구시렁) 그놈의 OECD인지 뭔지는 맨날 꼴찌만 할 걸 도대체 왜 하는 거야...(구시렁)

한솜 : 뭐라고?

한동 : 아니야. 그래서?

한솜 : 르완다라고 들어봤지. 아프리카에 있는 세계 최빈국 중에 하난데, 거긴 남녀 임금 비율이 남성 100일 때 여성이 86이래! 우리보다 훨씬 높은 건 말할 것도 없고, 양성평등 개념이 일찍이 자리 잡힌 유럽에 여느 국가보다도 높아. 이유가 뭔지 알아?

한동 : 뭔데. 석유라도 나왔데?

한솜 : (한숨) 그게 아니라. 1995년에 내전이 일어나서 세 달 만에 남성 80만 명이 사망했어. 하루아침에 르완다 전체 인구 3분의 1이 사라진 거지. 그때 겨우 살아남은 여성들이 군인, 경찰, 생산직 같은 남성만 가질 수 있었던 직업 영역에 뛰어들어야 했어. 그렇게 필사적으로 나라를 다시 일으킨 거야. 그 이후로 1990년대에 태어난 르완다 여성들은 '여자'라서 못 하는 일은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그런 사회에서 성장한 거지. 그래서 르완다 여성들은 '유리천장? 그거 먹는 거임?'이런데. 불과 20년 전만 해도 자동차를 살 때 남편의 동의서가 필요했던 여성들이, 이젠 남성과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당당히 자리 잡은 거야!

한동 : 헐... 뭐... 그래서 넌 지금 우리나라 남자 80만 명을 땅에 묻고 싶은 거냐?

한솜 : ... 진짜 내 얘기 제대로 안 들을 거야?

한동 : 아니 그건 그 나라의 극단적인 상황이잖아. 우리나라랑 같냐고. 남자들이 멀쩡히 살아있고, 기업에선 남자를 더 선호하는 걸 뭐 어쩌겠어. 솔직히 여자는 결혼하면 회사 그만두잖아. 너가 사장이라도 곧 그만둘 직원한테 투자할래? 최소투자 최대효율. 그게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개념인 거 몰라?

한솜 : 자본주의 이전에 민주주의야. 대한민국 헌법 11조 '모든 국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여기서 말하는 국민에는 여성도 포함된다고.

한동 : 쳇. 헌법엔 뭐라고 못 쓰냐. 차별은 나쁘고 하면 안 되는 거 나도 알지. 근데 사회 시스템에 그걸 원하는 데 어쩌라고. 그게 남자 탓은 아니잖아. 남자들을 탓하면 그 시스템이 바뀌냐?

한솜 : 그래!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거야. 사회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공감이 있으면 같이 바꿔 나가자고. 까놓고 말해서 결혼하고 맞벌이하다가 애가 태어나면 남자만 외벌이 하는 거 힘들지 않아? 아기 낳으면 돈 들어갈 일이 두 배로 많아지는데, 벌이는 반으로 줄잖아. 왜 남자에게만 소위 '가장의 역할'이라는 '경제 활동'이 몰빵 돼야 해?

한동 : 맞아! 남자들은 애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완전 돈 버는 기계라고. 너가 이제야 남자의 고충을 아는구나. 훌쩍..

한솜 : 울지 말고 끝까지 들어. 내 주변에 동갑내기 부부를 보면 사회생활을 먼저 시작한 여자 쪽이 연봉이 높은 경우가 많아. 그런데도 아기를 낳으면 여지없이 여자 쪽이 그만두더라. 뱃속에 열 달 넣어놨다가 낳은 게 여자라고 해서 '육아'를 몰빵 하는 거지. 모생애니 어쩌고 하면서. '남자'니까 경제 활동이 몰빵 되는 것처럼 말이야.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각자 큰 짐을 지어가야 하는 걸까?

한동 : 남자도 애를 낳을 수 있으면 어때. 랜덤 임신. 애 낳은 사람이 집에서 애 보고, 나머지 한 명은 돈 벌어오고. 그럼 공평하지?

한솜 : 닥쳐! 제발 좀 진지해지라고. 그렇게 개인이 모든 짐을 짊어져야 한다는 사고 자체를 좀 깨봐.

한동 : 야. 금수저 물고 태어나지 않는 이상 헬조선에서 살아남으려면 각자도생이야. 너가 사회 시스템을 깰 수 있을 것 같애? 계란으로 바위 치다가 괜히 너 머리만 깨지니까 아서라. 어?

한솜 : 바위는 하난데 계란이 수백만 개면 어쩔꺼야. 다 머리 깰꺼야? 그러지 말고 한번 잘 생각해봐. 이 차별과 불균형을 이용해서 이득을 얻는 자가 누군지... 그 검은 세력이 과연 누굴까...

한동 : ...검은 세력 이라니... 뭔 소리냐 너?

한솜 : 아까 오빠가 말한 자본주의 사회의 효율 말이야. 남녀가 동등하게 일할 기회를 주려면 복잡하잖아. 제도도 만들어야지, 시행해야지, 그때마다 일은 일 데로 잘 굴러가도록 해야 하고... 한마디로 귀찮아지는 일이 많겠다 이거야. '회사'가.

한동 :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냐. 회사에서 그런 비효율적인 일을 하겠냐고.

한솜 : 국민 위에 효율...'기업'이 있네. 대한민국 헌법 11조 '국민 평등' 위에 기업이 있는 거였어. 요즘 이 비상식적인 남성, 여성 혐오가 도대체 어디서 생산되고 유통되는 건가 했더니... 세상 편한 '효율'을 뺏길까 봐 본질적인 문제를 못 보도록 눈가림하는 판이었구만.

한동 : 야. 너도 소설 좀 적당히 써. 요즘 글 쓴다더니 애가 맛이 갔네.

한솜 : 아무튼. 난 요즘 같은 '남녀 상호 혐오'는 우리 사회가 올바른 평등으로 가기 위한 길에 놓인 최악의 장애물이라고 봐. 일단 '혐오'와 '평등'이라는 단어를 봐. 전혀 안 어울리잖아. 혐오라는 이정표는 우리 사회를 절대 올바른 길로 안내하지 못해. 누군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세워놓은 그 이정표만 따라가다 보면 여성도, 남성도 '평등'이라는 목적지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거야.

한동 : 그럼 뭐 어떻게 해야 되는데. 대안이 있어?

한솜 : 목소리를 내야지. <82년생 김지영> 같은 책이 던져주는 사회 문제를 인식하고, 그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서 계속 목소리를 내야 해. 불합리와 불평등에 대응하고 제 자리를 잡도록 해야지. 대한민국의 주권자로서 적극적으로 주권을 행사해야 하는 거야. 우리가 지금 '혐오 프레임' 따위에 갇혀서 서로 치받을 때가 아니라니까! 국정을 농단한 썩은 정권을 우리 손으로 도려내고 갈아엎은 것처럼, '그들' 밑에 깔려있는 '평등'도 우리 손으로 바로 세우는 혁명적인 역사를 이룩해야 한다고! 다 같이 어깨동무를 하고 맞서야 하는 거야! 이 빌어먹을 정치, 경제, 사회 시스템에! (쾅!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치며)

한동 : 아 깜짝이야! 넌 무슨 여자애가 힘이 그렇게 쎄냐! 

한솜 :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힘을 모아야 해. 오빠의 금쪽같은 딸이자 내 조카님이 '김지영'처럼 살지 않길 바란다면 말이야.

한동 : 뭐? 누구든 우리 딸 차별하기만 해 보라고 해. 내가 당장 가서 그 자식 다리몽둥이를...

한솜 : 얼씨구? 오빠 회사에 있는 여성 동무들도 다~ 우리 조카님처럼 뉘 집 귀한 자식인 걸 잊지 마. 그 댁 아버지한테 그 다리몽둥이 작살나기 전에. 알겠어?



 

위 글은 실제 우리 '한' 남매가 나눈 대화는 아니지만, 아마도 실제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아, '닭다리' 얘기는 실화다. 아빠가 귀하신 장남에게만 닭다리 두 개를 다 집어주는 순간을 떠 올릴 때마다 울컥 서러워지는 것도.


1970년대에 쓰이고, 81년에 출간된 후 절판되었다가 1995년에 다시 나온 박완서 작가의 콩트 모음집 <나의 아름다운 이웃> 서문에 이런 말이 쓰여있다.


이번에 같은 제목으로 새롭게 단장한 책이 다시 나오게 되어 별수없이 또 한 번 훑어보게 되었는데 시대에 뒤떨어진 표현이 여기저기서 눈에 거슬렸지만 일부러 고치지 않았습니다. 70년대에 썼다는 걸 누구나 알아주기 바란 것은, 바늘구멍으로 내다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멀리, 적어도 이삼십 년은 앞을 내다보았다고 으스대고 싶은 치기 때문이라는 걸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내가 보기에도 신기할 정도로 그때는 약간은 겁을 먹고 짚어낸 변화의 조짐이 지금 현실화된 것을 느끼게 됩니다.


박완서 작가는 '적어도 이삼십 년은 앞을 내다보았다'라고 겸손하게 적었지만, 사실 이 책엔 2019년 현재에 대입해도 될만한 내용들이 많다. 특히 <아직 끝나지 않은 음모 1~3>은 <82년생 김지영>의 어머니, 할머니, 증조할머니의 얘기로 확장돼도 어색하지 않다. 대한민국에서 '여자'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차별과 폭력의 역사는 이렇게 몇 세대를 거쳐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1995년에 박완서 작가가 느낀 '변화의 조짐'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것이 언제까지고 '조짐'으로 타오르다 사그라지며 반 발, 혹은 반의 반 발 정도밖에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조금 힘이 빠지기도 하지만.


우리가 '여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들을 대변해야 하는 이유는, 현재 대한민국 사회 시스템에서 여성이 '약자'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이니, 뭐 그런 어려운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성숙한 사회 구성원은 주변에 불합리한 대우를 받는 '약자'를 보면 그 문제를 인식하고 해소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사람이다. 내가 약자를 대변하고 내가 약자가 되었을 때 누군가가 나를 대변해주는 선순환이 이뤄지는 사회, 나는 그게 건강한 사회라고 생각하고 다만, 그런 사회에 살고 싶을 뿐이다. 




2018년도 신생아 이름 등록 순위 중 여아 1위는 지안, 남아 1위는 서준이라고 한다. 지안이와 서준이가 성인이 되는 2038년을 상상해본다. 1985년에 태어난 내가 1970년대에 쓰인 박완서의 콩트집을 읽으며 어떤 부분에선 '뜨악'하고 놀랐던 것처럼, 이 아이들도 <82년생 김지영>을 보면서 '에이, 설마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있었을라구?' 했으면 좋겠다. '이 소설 뻥이 심하네~'라며 코웃음을 치고, 낡아 빠지다 못해 표지가 누렇게 바래진 <82년생 김지영>을 탁 덮어버리면 좋겠다. 정말, 그렇게 되기를 염원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밤의 해변에서 혼자,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