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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솜 Aug 12. 2019

내 어머니 김순옥의 이야기

우리 엄마도 청년일 때가 있었다.

"이런 책은 사라져서는 안 돼요."


<알쓸신잡 시즌3> 마지막 편에서 김영하 작가가 다른 출연자들에게 추천하고 싶다며 가져온 책을 들면서 말했다. '이런 책'은 <내 어머니 이야기>라는 전 4권 만화책으로, 40세에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김은성 작가가 10년에 걸쳐 완성했다고 한다. 김영하 작가는 이 책이 한국 현대사를 관통한 어머니의 삶을 함경도 지방 사투리로 생생하게 전달한다며, 어떤 글을 읽어도 좀처럼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그가 이 책만 보면 눈물을 흘리게 된다고 고백했다. 그래서인지 묵직한 음성으로 이런 책은 사라져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그의 절박한 진심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동시에 우리 엄마 생각이 났다. 1950년 생인 엄마도 격동하는 한국 현대사를 맨몸으로 관통했을 것이 분명한데 내가 알고 있는 엄마의 삶의 궤적은 점선, 그것도 아주 간격이 먼 점선일 뿐이었다. 엄마랑 진득하게 마주 앉아서 온전히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이나 있었나?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봐도 비슷한 기억 조차 없었다. 어쩜 이토록 '내 어머니 이야기'에 무심했을까. 김은성 작가의 어머니 이야기도 사라져서는 안 되지만, 내 어머니 김순옥의 이야기 또한 절대로 사라져서는 안 되는 것인데 말이다. 왠지 덜컥 겁이 나서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졸린 목소리로 전화를 받은 엄마를 향해 다짜고짜 처녀 때 다녔던 직장이 어딘지부터 물었다. 엄마는 '네가 요즘 글쓰긴가 뭔가 한다더니 엄마 얘기로 책을 써줄 참이냐'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 이용화 양복점이라고 들어봤어? 그때 이용화 양복점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알아주는 양복점이었어. 엄마가 처녀 때 거기서 일하면서 70년대에 장관이며 정치하는 사람들 양복을 다 내 손으로 해 입혔잖아. 그때 엄마 바느질 솜씨가 워낙 좋았거든. 하여간 내가 한 거랑 다른 사람이 한 거랑은 딱 봐도 천지차이가 났으니까. 일감이 다 나한테만 막 몰리고 그랬지. 그때 그 뭐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금메달 딴 양정모라는 이 있잖아 왜. 유돈지... 레스링 인지... 그 사람이 나갔던 올림픽이 뭐더라? 모... 몬타... 뭔데. 뭐더라..."


"몬트리올?"


"이이~ 몬트리올. 그때 우리나라 대표선수들 단복도 내가 노오란색으로 맞춰서 해 입히고 가슴에 태극기도 다 하나하나 바느질로 붙였지."


"우와! 엄마가 국가대표 단체복을 만들었어?"


"그러엄. 그때만 해도 내가 명동에서 잘 나갔지. 이영우 양복점이고, 김철왕 양복점이고 아주 다들 날 데려가려고 안달이었다니깐. 그러다 저 웬수를 만나는 바람에 일을 그만뒀잖아."


엄마가 아빠를 부르는 애칭은 종종 '저 웬수'다.


"그 웬수 덕에 내가 있잖수."


"깔깔. 그렇긴 그렇지."


엄마는 그 이후에도 울산 삼양사에 취직한 아빠를 따라 울산에 내려가 살았던 일. 그러다 70년대 말에 터진 2차 오일쇼크로 삼양사에서 대규모 인원 감축이 있었고,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은 아빠를 대신해 다시 바느질을 시작했던 일. 그때가 마침 오빠를 낳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터라 출근은 못하고 양복점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꼬마가 일감을 한 꾸러미 안고 집으로 오면, 그 일을 다 하는 동안 꼬마의 등에 오빠를 업혀놓고 엄마는 하루 종일 바느질을 했던 일. 그러다 하루는 꼬마가 실수로 오빠를 바닥에 거꾸로 '복치는' 바람에 오빠 코에선 쌍코피가 터졌고, 그날 밤 이 사고소식(?)을 접한 아빠가 노발대발 난리가 나서 그 이후론 한동안 바늘을 못 잡았던 일. 엄마는 기다리기라도 한 듯 쉴세 없이 옛이야기를 술술 쏟아냈다. 처음으로 만난 스물아홉 살의 김순옥은 녹록지 않은 생활 속에 있었지만 푸릇하게 빛나 보였다. 아, 엄마도 '청년'일 때가 있었구나. 


통화 말미에 엄마는 당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줄 거냐고 물었다. 딸이 아직 그런 능력까지는 안되고 당분간은 그냥 엄마 얘기를 듣고 싶다고 했더니 '그럼 다음엔 무슨 얘기를 해줄까?'라며 한껏 들뜬 목소리였다. 


"아무 얘기나. 엄마 얘기면 뭐든 다 좋아."


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앞으로 만나게 될 내 어머니 김순옥은 어떤 모습일까. 되도록 많이 듣고 글로 써서 기억하고 싶다. 고집스러운 딸 때문에 때로는 살을 깎아 뒷바라지를 해준 엄마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효도라는 걸 할 기회일지도 모르니까.


1976 몬트리올 올림픽 -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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