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고 즐거운 추억과 여유를 배웠다.
18시간의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애들레이드에 도착했다. 다시 대도시로 오니 그 짧지만 강렬했던 아웃백 체험이 더 귀한 추억이 되었다. 백패커에 짐을 맡겨놓고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우선 호주에서 가장 유명한 팀탐 초콜릿을 한 30개 정도 샀다. 한국인들이 호주에 와서 10kg 이상 살이 찌는 주된 역할을 하는 마성의 초콜릿이다. 수화물용 케리어에는 팀탐으로 거의 가득 채웠다.(2010년 이때에는 한국에서 구하기 쉽지 않았다. 직구하자니 비싸기만 했다. 몇 년 전부터는 쉽게 구할 수 있어서 그런지 안 먹는다.) 지난번 한국으로 건강보조제만 거의 200만 원 넘게 산 곳에 가서 또 보조제를 샀다.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며 보조제를 또 샀다. 이건 어머니한테 줄 선물이라 한국으로 택배 보내려는데 주인님이 마지막 선물이라며 택배비를 또 받지 않으셨다. 한번 보내는데 30달러는 족히 드는데 그간 하도 사서 그런지 매번 무료로 해주셔서 연신 감사하다고 인사드렸다.
기념품이나 뭐 빠진 건 없는지 한번 더 확인하고는 다시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테라스에 앉아 음식을 주문했다. 그리고 그간 만났던 기억에 남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했다. 먼저 southport의 할머니에게 전화했다. 거의 1년은 넘게 연락을 못해서 혹시나 기억할까 하고 전화했는데 다행히도 기억난다면서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그냥 시드니 갔다 애들레이드 와서 고기공장에서 일하며 돈 모아서 여행 다니다 내일 한국 돌아간다고 말했다. 그리고 처음 호주 와서 영어를 잘 알려주셔서 고맙다는 말도 전했고 항상 건강하라고 말했다.
두 번째는 고기공장에서 일할 때 교회에 다녔던 목사님에게 전화를 했다. 언제나 교회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했다. 10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니 한 번도 기도한 적이 없었다. 완전 뻥을 쳐도 너무 쳤다.
세 번째는 역시 고기 고장에서 일할 때 토요일마다 영어를 가르쳐주며 나한테 wwoof를 소개해준 할아버지한테 전화를 했다. wwoof 잘 갔다 왔고 uluru 역시 잘 다녀왔다고 했다. wwoof는 내 호주 생활의 최고의 기억이며 제일 감사하다고 했다.
마지막은 역시나 로젤리와 톰이었다. 로젤리에게 전화를 걸어 여행 잘 갔다 왔다고 말하며 내일 한국 가기 때문에 또 한 번 작별 인사하러 전화했다고 하니 엄마처럼 여러 좋은 말을 해줬다. 톰은 또 어디 언덕에서 울타리를 치고 있었던 것 같다. 장난으로 '나 없어서 울타리 완전 엉망으로 만드는 거 아니야?'라고 농담을 던졌더니 '나 때문에 엉망으로 만든 울타리 다시 만들고 있다'며 웃으면서 잘 지낸다고 했다.
고마웠다. 이렇게 좋은 분들과 만날 수 있게 되어 호주 생활이 그리 힘들지만은 않았다. 저녁에는 집에 간다는 설렘과 호주를 떠난다는 아쉬움이 공존했다. 호주 생활중 한국에 가는 꿈을 꾸지 않은 적이 손가락으로 꼽힐 만큼 한국을 그리워했기에 막상 간다니까 너무 설레고 좋았지만 이 좋은 호주를 앞으로는 오기 힘들다는 생각이 참 아쉬웠다.
그래서 백패커에서 나와 주변 펍에 들렸다. 조금은 즐거운 분위기에 있고 싶었다. 그리고 다시 백패커에 가서 잠을 청했다.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아쉽다고 말해도 받아줄 수 없는 대망의 한국으로 출발하는 날이었다. 체크아웃을 한 후 버스를 타고 애들레이드 공항으로 갔다. 여전히 공항 내에서 나는 영어 소리들은 알아듣기 참 어려웠다. 수화물 체크를 한 후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면세점에 들려서 아버지한테는 양주를 좀 비싼 걸로 샀다. 팀탐은 누나에게 줄 선물이고 어머니는 건강보조제를 한 뭉탱이 보내 놨으니 그걸로 하면 딱 좋았다.
내가 탄 비행기는 말레이시아 항공이며 말레이시아를 경유하여 인천공항으로 간다. 비행기에 탑승전에 부모님께 다음날 오전 10시쯤 도착한다고 전화를 했다.
말레이시아를 경유하여 인천공항이 눈앞에 보였다. 착륙하기 위해 고도를 낮추는데 한국은 때마침 7월 말이라 장마인 듯 먹구름이 시커멓게 깔려있었다. 그 사이로 뚫고 내려가 비행기는 잘 안착했고 벨트를 풀고 비행기에서 나왔다. 이동 중에는 한국 날씨가 어떤지 잘 몰랐다. 그리고 호주는 겨울이기에 긴팔을 입었고 두터운 외투만 벗어놓은 상태였다.
한국에 도착했구나 를 실감한 건 역시 공항 내의 방송과 안내표지판이었다. 공항 내 안내방송이 다 들린다. 역시 한국사람이라 한국말이 제일 편했다. 안내표지판이 무엇을 말하는지 아주 완벽하게 다 이해됐다.
'아... 드디어 한국에 왔다'
케리어를 끌고 공항 밖으로 나갔다. 멀리 부모님이 보였다. 반가운 얼굴. 호주의 좋은 인연들도 많았지만 역시 부모님 만큼 좋은 인연은 없는 것 같다. 그와 동시에 느낀 건 세상에! 너무 습하고 더웠다. 한 5분 정도 공항 밖에 나와있던 것 같은데 아주 후덥지근했다. 얼른 부모님 차에 타고 에어컨을 쐬며 집으로 갔다.
가는 길은 너무나 호주와 달랐다. 운전석이 왼쪽에 있었다. 호주는 한국과 달리 차선 방향이 다르고 운전석 방향도 달랐다. 약간 어색했지만 바로 적응되었다. 하지만 차창밖 풍경은 아직 적응이 덜 되었다. 푸른 하늘과 넓은 지평선은 보이지 않고 답답하고 숨 막히는 건물들이 빼곡히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도 난 한국사람이라 그런지 이 답답하고 빼곡한 건물들이 반가웠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부모님은 맛있는 점심을 먹자고 했다. 하지만 난 어머니한테 말했다.
"고추장, 밥, 그리고 상추 좀 주세요. 아.. 들기름이나 참기름 있으면 그것도 주세요"
그러고는 한 두 공기를 그렇게 고추장에 들기름에 밥 비벼서 상추에 싸 먹었다. 김치보다 더 먹고 싶은 건 고추장이었다. 부모님은 정말 돈을 벌어서 잘 먹고 다니는 건지 하는 의심의 표정이었다. 밥을 굶고 다닌 애처럼 허겁지겁 먹어서 그런 것 같았다.
다 먹고 나니 살 것 같았다. 느끼한 모든 것들이 한 번에 다 날아가는 느낌! 마치 치킨을 먹고 콜라 먹었을 때의 그 상쾌함이 왔다.
길고 긴 꿈, 하지만 너무 행복하고 좋은 꿈, 가끔 힘들고 외롭고 서러웠지만 목표를 위해 쓰러지지 않았던 꿈, 다양한 국가들과 일하면서 서로를 이해하며 나를 발견하는 그런 꿈을 잘 꾸고 돌아왔다.
처음 호주 갈 때는 두렵고 떨리고 후회했었는데 이젠 어딜 나가던 다 즐겁고 설렘만 가득할 것 같다.
낯선 땅이지만 나를 크게 성장시켜준, 호주는 나에게 이유 있는 곳이었다.
한국에 도착한 후 약 1달간 있었던 소소하지만 당황스러운 에피소드
- 인터넷이 너무 빠르다. 진짜 what the puck 빨랐다.
- 호주 대형마트에서는 cashier 가 물건을 다 담아준다. 그 버릇이 있어 한국에서 마트 가서 물건 사고 나도
모르게 기다리고 있었다. 마트 점원이 "물건 안 담으세요?"라고 말하면 그제야 정신 차리고 물건을
주섬주섬 담는다. 뒷사람의 눈총을 받으며 재빠르게 담는다.
- 지나가는 사람들과 부딪힐 뻔하면 "실례합니다" 보다 "excuse me" 또는 "sorry"가 먼저 나온다.
네이티브 스피커도 아닌 것이 발음은 영 엉망이다.
- 호주 신호등은 버튼이 있어서 누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삑'소리와 함께 파란불로 바뀐다. 그게 버릇이
되어 신호등의 그 시각장애인용 버튼을 자꾸 누른다. 분명 머리로는 시각장애인용 버튼인걸 인지했는데
손가락은 이미 누르고 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하면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고 나도 그 버튼을 쳐다본다. 그리고 횡단보도 지나갈 때
다들 왼쪽을 보는데 나만 오른쪽 먼저 봐서 옆사람과 엉뚱한 눈 맞춤을 했다.
- 1년 4개월 동안 영어도 엉망으로 못하는데 웃긴 건 한국말도 엉망이었다. 친구들과 만나서 재밌게 대화
하는데 '사물놀이' 단어가 기억이 안 나 "아.. 그 왜 있잖아... 아 픙악을 울러라"
지금의 아내가 그때 그 자리에 있는데 여전히 배꼽 잡고 놀린다.
- 가끔 자다가 가위에 눌렸다. 가위눌리면 종종 귀신을 보곤 했는데 이젠 귀신 조차 영어를 썼다. 처음엔 무서
웠는데 영어로 말하는 귀신 때문에 빵 터졌다. 귀신이 글쎄 "pucking charlie pucking charlie~~~"
지금의 아내가 친구일 때 그 얘기를 했었는데 여전히 또 배꼽 잡고 말한다.
- 영어학원을 등록했다. 그래도 나름 배운 영어를 사용하기 위해서. 종로의 누구나 다 아는 그 학원에 가서
level test를 진행하는데 한국인 1명, 외국인 1명과 프리토킹을 했다. 당시 여름이어서 날씨가 덥길래
두 명에게 인사를 하고는 "today is pucking hot!"이라고 비속어가 튀어나왔다.(젠장! 그 고기공장 10대
청소년 녀석 때문에 욕을 입에 달고 살았다!)
한국인 강사는 바로 레벨 2를 줬고 외국인은 레벨 4를 줬다. 이유를 물어보니까 욕 하면 영어 다한 거라고
한다. '이 녀석은 잘 배운 엘리트 코스의 원어민 강사 맞나' 하는 의심이 든다.
- 호주 처음 도착해서 15달러를 50달러로 잘못 들었던 subway에 갔다. 역시 한국말은 쉬웠다. 하지만
실수를 또 했다. 직원은 빵 크기부터 고르라고 했는데 난 혼자 신난 나머지 토핑 이름을 하나씩 부르면서
넣어달라고 했다. 이럴 때 우린 흔히 말한다. 지랄도 풍년이라고~
한국 와서 한 1달 정도는 위와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그만큼 호주 문화 잘 배우고 왔다. 다행인 건 만약 운전했다면 바로 9시 뉴스에 나왔을지도. 멀쩡한 사람이 역주행한다고 보도 나갔겠지!
10년이 지나서 그런지 모든 기억이 아주 완벽하지는 않았다. 생생한 기억이 거의 90% 이지만 그 이외에는 긴가민가 하는 것들도 있다. 그때의 느낌들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기에 그 느낌을 토대로 작성하다 보니 '이게 맞는 건가' 하는 의심이 들어 글을 다 써놓고도 다시 보며 구글 맵을 통해 현장을 살펴보면서 유추해나가는 과정도 있었다. 그래도 확실한 것은 역시 뚜렷한 목표를 갖고 여행을 하면 그만큼 많은 것들을 배우고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