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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리한 Dec 17. 2023

아내와 잡담 5

그 이력서 한줄 참 마음에 든다!

데이지와 난 결혼 준비할 때 서로의 연봉을 공개했다. 결혼 준비하다 보면 니돈 내 돈, 누가 더 썼네 안 썼네 하며 기분이 상하다 싸움으로 번져 헤어지는 몇몇의 경우들을 봐왔다. 서로의 급여를 까서 합쳐버리면 까는 순간엔 어색함이 있겠지만 적어도 니돈 내 돈이 아닌'우리 돈'이라 감정이 상할 일 하나는 줄이게 되니까!

그래서 연봉을 깐 결과는 처참했다. 물론 데이지가 직장생활을 더 오래 했고 내가 주임일 때 이미 차장의 직급이었지만 차이가 꽤 컸고 그 결과를 보며 난 데이지의 능력을 다시 한번 더 찬송하고 찬양했다.


결혼 후 첫째님이 2살 때 첫 어린이집에 다녔다. 그리고 온갖 감기를 달고 오더니 결국 폐렴에 의해 2달간 병원에 입원하게 됐고 데이지가 낮 간호를, 나는 밤간호를 하며 힘겹게 보냈다. 또 하필 그 시기에 데이지는 둘째를 임신하고 있어서 더욱더 힘들었다.

첫째님은 다행히 무사 퇴원 했지만 앞으로 이런 문제가 생긴다면 둘 다 휴가 내기도 쉽지 않았고 맞벌이 때문에 아이의 끼니를 제대로 주지 못한 게 화근이 아녔을까 자책하기도 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누군가는 아이를 케어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고 난 데이지에게 말했다.

"데이지 연봉이 나보다 더 높으니 내가 그만둘게!"

"아냐 찰리 한! 앞으로 연봉 상승률은 찰리 한 네가 더 높으니까 내가 그만둘게!"


서로를 배려하는 듯하지만 속내는 둘 다 직장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래도 데이지의 연봉이 높으니 외벌이를 해도 더 버는 사람이 해야 하는 게 맞는 것 같아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계속 내 가능성을 두고 본인이 퇴사하겠다고 했다. 8년이 지난 이제 와서 데이지가 밝히길 그때 회사 다니기 싫어서 핑계를  댔다고 한다. 이런.... 배신자 같은!!!


그때부터 데이지는 퇴사준비를 하고 둘째를 출산함과 동시에 회사와 작별했다. 외벌이가 된 나는 나름의 막중한 책임감을 갖고 회사에 다녔지만 그 막중한 책임감은 회사의 스트레스로 인해 아주 쉽게 꺾였다.

"데이지! 안 되겠어 아무래도 난 내가 하고 싶은 걸 해야 할 거 같아!"


데이지는 회사 스트레스로 인해 퇴사할 방법을 내 가능성이라 포장해서 본인이 퇴사하겠다고 했지만 난 그 가능성을 머나먼 달나라로 뻥 차버리고 카페를 차려야겠다며 바리스타의 길로 가겠다고 다니던 회사를 박차고 나갔다.

데이지는 정말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혼자 벌어도 부족한데 이 사람이 지금의 연봉을 포기하고 사업을 하겠다고 바리스타를 한다니 말이다. 급여나 처우도 지금보다 훨씬 안 좋고 휴일과 공휴일엔 아이들 데리고 나가 놀아도 모자랄 판국에 쉬는 날이 더 성수기인 카페에 취업하겠다는 정말 철이 없어도 이렇게 철없는 남편을 옆에 두자니 고구마 100개 먹은 듯한 답답함과 함께 마음속으론 아마 서류상 이혼 절차는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남편의 낯빛이 안 좋고 이러다 이 사람 병나겠구나 라는 생각 때문에 바리스타로 가는 길에 허가가 떨어졌고 난 그렇게 바리스타로 내 삶의 재미를 위해 카페에 취업했다.

너무 신났지만 코로나 여파로 인해 카페일을 10개월 정도밖에 못하고 퇴사를 했다. 실업급여를 타며 겨우겨우 또 삶을 버텨내다 갑자기 전에 다니던 회사를 다시 다니겠다고 데이지에게 말했다.


아주 기가 막혔을 것이다. 지가 싫다고 뛰쳐나간 회사를 다시 들어가는 남편을 보면서 그럴 거면 왜 그만둔다고 했을까, 이게 무슨 코미디 인가 했을 테지만 데이지는 그것도 허락해 줬고 난 다시 전에 다니던 회사에 들어가 열심히 일을 했다.

그래도 여전히 생활비가 모자란 건 사실이고 모아뒀던 모든 돈들이 바닥을 드러나는 시점이 얼마 안 남았다.

슬슬 내 마음속에 불안감이 찾아왔다. 그전에는 그래도 돈 보다 내 삶의 목표와 업무를 하면서 인정받고 하는 것이 좋았지만 이젠 돈을 더 벌어야 하는 시점이 온 것이다. 투잡을 해야 하나, 주말에 배달 알바를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배달 알바 급여를 따져봐도 부족했다. 그래서 데이지에게 내년부터 데이지도 일을 해야 할 것 같은데 괜찮을까 라며 질문을 던졌다.



데이지는 사회생활을 잘했다. 버젓한 외국계 중견기업에서 차장의 위치로 업무 능력도 탁월해서 회사의 모든 업무를 아주 짊어지고 다녔다. 전에 없던 매뉴얼인지 시스템인지를 만든다고 몇 달을 집에 못 들어가면서 일하다 건강을 심하게 해쳤고 그 이후로는 자기 몸 생각하며 적당히 일 했지만 그런 헌신적인 업무 태도로 인해 퇴사를 했지만 매년 데이지에게 재입사에 대한 제의가 들어왔다. 그때마다 데이지는 약간 흔들렸지만 첫째님의 복지 제도가 너무나 빈약해 비영리 단체에서 장애인 복지에 대한 정책을 만드는 쪽으로 일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비영리단체에서는 급여는 없었다. 사람이 일을 하면 그에 해당하는 돈을 받는 게 당연한데 비영리 단체이며 부모들이 만든, 자기 자녀가 훗날 복지제도 아래 보호받을 수 있도록 자발적으로 만든 단체이기에 후원받은 돈은 99.99% 프로그램을 진행하거나 여러 제도를 만드는데 필요한 경비로 사용됐다. 

딱 한 가지 좋은 점은 근무하다 아이를 찾으러 갈 시간이 되면 시간에 제약 없이 퇴근할 수 있는 것 빼곤 모든 게 다 단점이었다. 주말에도 일해야 하는 경우도, 18시 이후 업무가 종료돼야 하는데 그 이후로도 꾸준히 전화가 와서 아이들 밥을 놓치는 경우가 생겼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난 데이지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적당히 걸려오는 전화를 무시하라고 했지만 데이지는 그러지 않았다.

이렇게 짜증 내는 남편의 잔소리를 들으면 데이지도 전에 다니던 회사로 돌아가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좋은 조건으로 모셔가려 해도 흔쾌히 승낙하지 못했던 건 첫째님의 재활치료와 아직 아이들이 어려서였다. 맞벌이를 한다면 우리 가정의 생활비가 이렇게 쪼들리진 않았겠지만 장애 아이가 있다면 24시간 아이에게 눈을 뗄 수 없으니 부모 중 한 명은 일을 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케어 없이 맞벌이를 하면 그것 또한 아이에게 참 못할 짓이다.


올해 8,9월쯤 우리의 통장 잔고를 보며 출장 가는 새벽에 난 하나님에게 원망 아닌 원망을 그렇게 해댔다.

첫째님을 내가 안 낳겠다고 결심했는데 하나님이 낳기로 결정하게 했으면, 저 아이 키우면서 이렇게 많이 드는데 우린 맞벌이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면 로또가 되던 돈을 엄청 벌게 해 주던 뭐라도 지원해줘야 하지 않냐고! 아니 낳으라고 하면 책임이라도 지셔야죠! 

라고 달리는 KTX에서 엄청 짜증 내며 원망을 마구 쏟아냈다. 그렇게 업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KTX에서 진짜 웃기지도 않게 데이지에게 연락이 왔다.

"찰리 한! 나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연락 왔어!"

"데이지! 닥치고 가! 일단 만나! 만나서 일할 수 있다 잘할 수 있다고 무조건 말해!"


이.. 무슨 괴상한 일인가! 아참에 그렇게 하나님을 원망했더니 응답이 아주 칼같이 왔다. 데이지에게 무조건 가서 면접 보고 모든지 열심히 잘할 수 있다고 말하라고 나 혼자 들떠서 응원 같은 압박을 하게 됐다.

데이지도 흥분 반, 걱정 반인 마음으로 전에 다니던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갔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HR이 부른 것도 아니고 알고 지낸 상사가 본인의 팀원이 마음에 들지 않아 회사와 상의도 없이 혼자만의 생각으로 계획을 세우고 데이지를 불렀던 것이다.

HR에선 그래서 올해 안으로 연락을 준다는 기약 없는 약속을 하고 데이지를 돌려보냈다. 허탈하고 어이도 없었지만 데이지는 다시 취업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그리고 이력서를 쓰고 딱 1달이 지났다.

이력서는 20군데 이상 보냈고 면접은 3번을 봤다. 마지막 본 세 번째 회사에서 데이지에게 러브콜을 보냈고 정말 신기하게 1달 만에 취업에 성공했다.

데이지의 능력이 이 정도인지 다시 한번 놀랐는데 하나 더 놀란 사실은 다음과 같았다. 러브콜을 보낸 회사에서 데이지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내용은 여러 가지 다양한 업무를 해본 경험이었다. 그래서 면접 본 당일 서둘러 전화를 주고 바로 출근 날짜를 정해버렸다. 다른 회사에 가지 못하도록!



데이지가 전에 다녔던 회사에서 정말 매일 울면서 업무를 했다고 한다. 퇴근길에 왜 모든 업무를 내가 해야 하냐면서 짜증과 분노를 넘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땐 몰랐다. 물론 많이 힘들었겠지만 그 경험이 지금의 이력서 한 줄에 써졌고 그 이력서 한 줄을 알아봐 주는 회사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 과정을 보면서 나 또한 반성하게 됐다. 팀이라고 말하면서 본인 업무만 하고 공동의 업무는 발을 쏙 빼는 직원을 볼 때마다 울화통이 치밀었다. 이기적인 직원의 태도를 보면 욕을 한 바가지 하고 싶었지만 꾹꾹 참고 집에 와서 곱씹으면서 분노했다.

하지만 데이지의 저 이력서 한 줄을 알아봐 주는 회사가, 그게 8년이 지나 증명되듯 남의 업무 태도에 의해 내 업무 태도와 내 마음이 흔들려선 안 되는 것이었다.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고 일 좀 더하면 어떠랴!

지금의 성실한 태도가 훗날 누군가는 알아줄 것이다라는 걸 나는 눈으로 봤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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