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양형 이유>_박주영
"AI 판사 도입이 시급하다"
법원 판결 기사를 쓰면 가장 많이 달리고, 가장 많은 추천을 받는 댓글 중 하나다. 90% 이상의 판결 기사에는 해당 판결을 한 판사에 대한 비방이나 욕이 달린다. 'AI 판사 도입' 정도는 양반이다. 돈을 받아 먹었다, 판사를 찾아가겠다 등 직설적이고 원색적인 비판이 난무한다. 대다수의 네티즌은 양형위원회 같은 우리 사회의 합의기구에서 정한 양형의 최소 2~3배는 나와야 '그래 이 정돈 되야지' 정도의 반응을 보이는 것 같다.
박주영 부장판사는 '국민의 법 감정'이라고도 일컫는 이런 외부의 시선을 절대 외면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이 책을 통해 구구절절한 해명을 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다만, 묵묵한 고뇌를 이겨내왔던 숱한 순간들을 솔직하게 털어 놓는다. 판사라는 직역을 감히 상상하기조차 어렵지만, 판사 역시도 법이 정해놓은 테두리 안에서 결재를 올리고 결재 도장을 찍는 우리네 삶과 비슷한 존재가 아닐까 넘겨 짚게도 된다.
법조 기사를 효율적으로 쓰는 방법 중 하나는 재빨리 '양형 이유'부터 읽어보는 것이다. 양형 이유에는 법의 테두리에서 조금은 벗어난, 피고인과 사건을 바라보는 재판부의 시선이 담겨있어서다. 그렇지만 내가 읽어본 대다수의 판결문에는 '결코 죄가 가볍지 않다' '엄벌을 면하기 어렵다' '하지만 범행을 인정하고 자백, 반성하고 있다' '벌금형을 초과하는 범죄 전력이 없으며' 등 찍어낸 듯한 문구가 많았다.
박주영 부장판사는 이 양형이유에 "폭력이 난무하는 곳보다 더한 공적 영역은 없다" "타인의 몸을 자유롭게 만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 타인뿐이다" "우주상에 사람의 생명보다 귀중한 것은 있을 수 없다"처럼 자신의 언어를 적어냈다.
그래서 AI는 판사를 대체할 수 없다. 옳고 그름을 가려내고 죄를 지은 사람에게 징역 몇 년이나 벌금 몇백만 원을 매겨대는 일이 판사 업무의 본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행 법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판사의 판단에는 시대정신과 국민들의 법 감정, 나아가 사건에 따라서는 판사 본인의 마음과 색채가 담겨야 한다. 상급심에서 엎어지고 뒤집어지더라도 그러한 시도들이 우리 사회의 변화를 기저에서 촉발시킨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은 이 책을 통해 보다 확고해졌다.
# 행복하지 않은 어머니를 둔 아이들은 영악하다
평온한 삶을 지속하고 싶은 관성은 이성이라는 브레이크를 마모시키고 무력화한다. 상처를 얼기설기 봉합하고 활시위처럼 재빨리 일상으로 되돌아오지만, 그 복귀의 탄성에 날아간 화살은 각자의 가슴 깊숙이 박히기 마련이다.
어쩌면 그처럼 완강한 관성은 아이들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가난과 주정에, 폭력에, 지옥 같은 하루하루와 희망 없는 미래에 안녕을 고하고자 보따리를 싸고, 아이에게 마지막 짜장면 한 그릇을 먹 이려 들렀을 동네 어귀 중국집에서, 눈물을 흩뿌리며 아이가 짜장면 먹는 모습을 보다, 자신의 고통을 아이의 웃음과 맞바꾸겠다 마음먹고 발길을 돌린 어머니가 얼마나 많을까. 어쩌면 어머니의 발길을 돌린 건 아이의 염원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이는 어머니의 시선을 못본 척하며 세상에서 가장 맛있게 짜장면을 먹었을 게다. 면발 한 올 한 올에 어머니와 자신의 미래가 걸려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을 게다. 아이들이 모두 천진한 것은 아니다. 예상치 못한 짜장면은 불안하고, 행복하지 않은 어머니를 둔 아이들은 영악하다. 실제 형사법정에 있다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용서와 합의를 무수히 목격한다.
# 선한 제도 뒤에 숨은 악인
피해자들이 아프게 지적하듯, 형사재판 절차는 기본적으로 피고인의 권리 보호를 위해 디자인된 것이다. 즉흥적이고 흉포한 절대권력으로부터 시민의 자유와 생명을 보장하기 위해 수많은 이가 피 흘려 쟁취한 투쟁의 결과물이다. 근대 형사재판 절차의 목표와 지향점은 전혀 부당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지켜져야 할 가치다. 누구나 형사피고인이 될 수 있고, 형벌권을 발동한 국가에 맞선 한 개인의 인권은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피고인의 절차적 권리가 무너진 곳은 야만과 문명의 경계가 사라진 곳이다.
그렇지만 절대선은 없는 법이다. 선한 제도 뒤에 숨은 악인을 바라보는 피해자에게 형사재판 절차는 그저 악인을 보호하는 악법일 뿐이다. 피고인의 권리 보호와 실체적 진실과 응보라는 정의가 충돌 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법정은 실로 입자가속기 같은 곳이다.
판사는 대폭발의 혼돈 속에서 의미 를 부여하기 위해 번뇌한다. 형사재판의 법관은 형사 실정법과 이념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게 숙명이다. 다만 재판을 거듭해도 적응하기 어려운 숙명이다. 법이 규율하려는 경계나 보호하려는 울타리가 어디까지인지를 밝히는 작업은 지극히 외롭고 고독하며 두려운 길이다. 가보지 않은 길이 부지기수고, 자신이 그은 경계 밖 낭떠러지 로 무수한 이를 떠밀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법감정으로 일컬어지는 시대정신과 법규정 사이에 큰 괴리가 있을 때 그 접점을 모색하는 작업은 판사에게 엄청난 압박감을 준다. 시대적 요구가 법의 테두리 안으로 포섭될 수 없을 때, 즉 그 요구는 입법의 영역이라고 선언해야 하는 상황은 판사에게 피하고 싶은 순간이다. 다시 머리를 싸맨다.
과연 해석으로 포섭이 불가능한 영역인가? 최선을 다해 경계를 밀고 나아가보았는가? 주류에 속해 있으면서 폭주하는 사건을 핑계 삼아 안이하고 협량한 해석으로 경계를 긋지는 않았는가? 아니면 무리한 해석으로 적법이라는 미명 아래 불법의 영토를 확장한 것은 아닌가? 경계 너머 낭떠러지에 매달린 수많은 사람의 절규를 외면하진 않았는가?
#"삶이 있는 저녁"
'저녁 있는 삶'을 추구하는 이 시대 대한민국에서, '삶이 있는 저녁'을 걱정하는 노동자와 그 가족이 다수 존재한다는 현실은 서글프기 그지없다. 우리나라는 인구 10만 명당 산업재해 사망 숫자가 32.9명으로 OECD 국가에서 압도적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지난 4년간 하루 평 균 다섯 명이 직장에서 일을 하다 목숨을 잃은 셈이다.
#인권은 시혜가 아니다
대학시절 밤늦게 하숙집 으로 돌아가다 머리를 도로 쪽으로 해서 몸 절반을 도로에 두고 누 워있던 또래 청년을 봤다. 대로이긴 했으나 어두운 편이라 몹시 위험해 보였다.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청년을 안전한 곳으로 옮긴 다음 택시라도 태워 보낼 요량으로 그를 부축해 인도 쪽으로 이동시켰다. 그런데 그 친구가 나를 한 번 째려보더니 갑자기 주먹으로 내 턱을 강타했다.
아마 술김에 내가 자신을 해코지하는 거라고 착각한 것 같았다. 황당했다. 술에 취해 몸을 못 가누는 이 친구를 끝까지 바래 다줄 것인가, 아니면 위험한 상황은 벗어났으니 그냥 내버려둘 것인가를 고민하던 잠깐 사이 주먹은 연이어 날아들었다. 나는 그에 대한 동정을 즉각 철회했다.
연민으로 내민 손은 이처럼 작은 계기만 있어도 즉시 회수된다. 수전 손택의 말처럼,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 아니라 우리의 부 고함까지 증명해주는 윤리적 알리바이에 불과하다. 밥차나 노숙인 쉼터나 매달 내는 후원금은 동정이든 연민이든 어떤 이름으로도 시작할 수 있고, 즉흥적인 시도여도 소중하다. 그러 나 법의 영역에서 동정이나 연민은 위험하다. 인권은 시혜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수자에 대한 법적 보호를 시혜라고 보면, 그 시선은 언제 철회해도 무방한 것이 된다. 소수자라고 특별히 보호되는 것이 아니다. 법이 보호하기 때문에 보호받는 것이다. 다수가 합의하에 만든 법이 그들도 보호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보호받는 것이다.
#I'm not a doc
나는 사회보험번호 숫자도 아니고 컴퓨터 속의 한 점도 아닙니다. 묵묵히 책임을 다하며 살았습니다. 이웃이 어려우면 도움을 주었고, 자선을 구걸하거나 굽신대지 않았습니다. 나는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내 이름은 다니엘 블레이크, 한 명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이것 이 정답이다. 내가 틀렸다. 입장을 수정한다. 왜 소수자를 보호해야 하는가? 내가 개가 아니듯 다니엘 블레이크도, 경비원 B씨도 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개가 아니다. 개가 아닌 인간은 똑같이 존중받아야 한다. 다니엘 블레이크의 "I'm not a dog"이라는 말이 내 게는 자꾸만 "I'm not a doc"으로 들렸다. 그는 개가 아니고, 서류나 기록도 아니다.
#한 아이를 학대하는 데도 한 마을이 필요하다
소년들의 강력사건이 발생하면 어김없이 소년범을 엄벌해야 한 다는 말이 나온다. 그 말이 전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아이들의 육체적·정신적 성숙이 점점 빨라지는 상황에서 괴물 같은 아이들이 저지르는 강력사건에 적절히 대처할 필요가 있다. 다만 그 몇몇 아이 때문에 나머지 아이들에 대한 처벌이 덩달아 엄해지고, 그나마 턱없이 부족한 사회적 관심과 배려가 줄어들까 무척 염려된다.
보스턴 천주교 사제들의 아동성추행을 보도한 <보스턴 글로브> 의 실화를 옮긴 영화 <스포트라이트>의 잘 알려진 대사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 한 마을이 필요하듯, 한 아이를 학대하는 데도 한 마을이 필요하다." 이 말은 소년범을 대할 때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말이다.
여기에 한 마디 덧붙이자면, 한 아이가 망가지는 데도 온 집안과 마을이 필요하다. 이 아이들이 모두 엄벌을 받아야 한다면, 아이들을 유기하고, 방치하고, 학대하고, 눈길조차 주지 않은 부모와 가족, 그 아이들 중 누군가와는 같은 마을 사람들인 우리도 함께 엄벌을 받아야 한다.
#위증은 기억에 반하는 증언을 처벌하는 것
CCTV나 DNA처럼 객관적 증거가 없는 재판은 기억을 재구성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기억은 법적 사실이라는 존재의 집이다. 기억이 없으면 사실도 없다. 기억하지 못하고, 기록되어 있지 않다면, 적어도 재판에서는 그날 그 일은 벌어지지 않은 것이다. 나의 실감만으로 내 존재를 입증하지는 못한다. 누군가 나를 기억하고 언급하지 않으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적 존재는 물질이 아니라 기억과 이야기로 이뤄진다.
문제는 기억이 믿을 게 못 된다는 점이다. 기억의 불명료함에 대 한 수많은 연구와 논증이 있다. 기억은 빠르게 소멸되고, 기꺼이 왜곡된다.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는 것은 아주 얇은 막 하나다. 법정에서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는 위증은 사실과 다른 진술을 처벌하는 범죄가 아니다. 기억에 반하는 증언을 처벌하는 것이다.
위증은 재판이 실체적 진실에 다가가는 데 있어 강력 한 방어막 역할을 한다. 이중, 삼중으로 수비한다. 그러나 허점이 있 다.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기억에 반하는 거짓 진술은 본질적으로 오류를 내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인간은 영악해서 여기에도 대책을 세운다. 바로 오기억이다. 스스로 조작하고 신뢰해 강화한 오기억은 거짓말의 어수룩함을 덮는다. 강력하다.
#버려진 아이는 슬프지만, 발견된 아이는 희망적이잖아요.
1933년 평양에서 태어나 연세대 의대를 나온 뒤, 서울시립아동 병원과 홀트아동병원에서 50년간 버려진 아이들 6만~7만 명가량 을 치료해온 '할머니 의사' 조병국 선생의 인터뷰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분의 삶 전체가 영웅적이었지만, 특히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아이들 입양 서류에 '어디에서 발견되었음'이라고 기록한다는 부분이었다. 선생의 말씀이다. "버려진 아이'는 슬프지만 '발견된 아이'는 희망적이잖아요. 미국 사람들한테 배웠어요. 그전만 해도 우리는 정직하게 '기아'라고 썼는데, 나중에 장성한 아이들이 그 단어를 보고 다시 상처를 받는다는 거예요. 제발 '어밴던(abandon, 버리다)'이 란 단어를 안 쓰면 안 되겠냐고 해서 80년대부터 고쳐쓰기 시작했지 요." 단지 단어 하나를 치환했을 뿐인데, 의미는 전혀 다르게 와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