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0년간 세계를 바꾼 11개의 사건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책이든 뭐든 디자인이 참 중요하다. 1988년에 초판이 출간된 책이지만 지난해 10월 전면 개정을 거쳐 새롭게 나왔다. 예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표지부터 챕터의 구분까지 책 구성 전반이 깔끔해서 마음에 들었다. 유시민 작가는 서문에서 "다룬 사건은 (초판과) 거의 같지만 그대로 둔 문장은 하나도 없다. 정보량을 늘렸고 해석을 더러 바꿨으며 각주를 꼼꼼하게 달았다"고 밝혔다. 무심한 듯 밝힌 개정판 출간의 이유이자 소회가 좋았다.
참고문헌이 엄청나게 방대한 책이다. 역사학자가 아닌 유시민 작가는 수많은 앞선 저서와 관련 문건을 참고해 사건들을 엮어 나간다. 사견을 최소화하고 사실 위주로 써내려가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지만, 종종 때로는 자주 그의 생각이 엿보인다. 읽는 이가 누구든 불편할 정도는 아니고, 진보적 생각 또는 역사관에 입각해 쓰여진 정도이지 '색깔론'을 뒤집어 씌울 만큼은 아니다. 색깔론은 이 책이 가장 경계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유시민 작가에 대한 시선은 엇갈린다. 특히 최근 정국을 뒤흔든 일련의 사태들로 인해 '실망했다'는 반응을 보인 이들도 있다. 그런 점을 논외로 빼둔다면, 그의 문장과 식견은 논란의 여지가 별로 없을 것 같다. 어렵고 고리타분하기 쉬운 근현대의 세계사, 그것도 러시아 중국 동유럽 베트남 아랍의 여러나라 등 여지껏 우리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국가들의 이야기를 이렇게 쉽게 정리한 데 찬사를 보내고 싶다. 글과 문장에 있어 배울 것이 정말 많은 작가라고 생각한다.
누가 옳고 그른지, 누구의 방법이 최선책일지 판단하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어려운 일이다. 유대인학살부터 인종차별, 무조건적인 민족주의 등 지금 보면 황당하기까지 한 여러 생각들은 그 당시에 절대 다수의 민중으로부터 인정을 받았고, 열렬히 지지하며 이론적 토대를 만들어 내던 엘리트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의 시각으로 보면 대개 올바른 선택지는 존재한다. 100% 정답일 수는 없지만, 보다 존중받아야할 가치라는 것이 마땅히 존재한다. 최소한 '차악'의 선택지는 항상 존재해왔다. 그래서 항상 끊임없이 고민하고 경계해야 한다. 내가 마땅히 옳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사실은 잘못된 것은 아닌지, 보다 나은 선택지가 분명히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코로나19에 확진된 탓에 꽤 두꺼운 책이지만 단번에 읽어내려갔다. 읽으면서 뒷날 한번쯤 다시 생각해봤으면 하는 문장과 문단을 정리해뒀다.
3. 러시아혁명
사회혁명은 구체제가 스스로 무너진 뒤에 일어났다. 기존권력보다 더 강력한 힘이 일으킨 게 아니었다. 러시아는 강력한 군대와 행정조직을 보유한 제국이었다. 유능한 권력자가 최소한의 개혁을 실시해 민중의 마음을 붙들었다면 그런 혁명은 없었을 것이다. 니콜라이 2세는 민중의 신뢰와 존경을 스스로 짓밟았고 병사들의 충성심을 자기 발로 걷어찼다. 구체제는 스스로 무너졌고, 주인 없는 권력을 그들이 집어들었을 뿐이다. 혁명의 적은 탄압이 아니라 개혁이다.
4. 대공황
자유무역이 거래 당사자 모두에게 이익을 준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거인과 꼬마가 뒤섞여 사는 국제사회에서는 종종 강자가 약자를 압박하는 무기가 되기도 한다. 어느 시점에서 산업기술이 뒤처진 나라가 자유무역 이론을 추종해 '비교우위' 산업에 집중하면 영원히 저부가 가치 소비재만 생산하면서 고부가가치 첨단산업을 갖춘 선진국에 종속된다는 주장이 틀렸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중략) 대공황은 사람들이 더 많은 상품의 생산에 열광하고 물질적 부의 축적을 최고의 선으로 여기던 시기에 세상을 덮쳤다. 인간은 자신이 요술램프에서 불러낸 거인을 다루지 못하는 소년과 같았다. 오늘 우리는 그때와 얼마나 다를까?
7. 팔레스타인
2천년 전 조상이 떠난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팔레스타인 땅을 빼앗은 시온주의자의 행위가 정당하다면, 빼앗긴 지 얼마 안 된 땅을 되찾고자 행사하는 아랍인의 무력행사도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중략) 평화로운 공존을 원한다면 가해자인 이스라엘 정부와 국민들이 팔레스타인 민중을 피해자로 인정하고 그들의 억울함과 분노를 풀어줄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유럽에서 수천 년 동안 당했던 박해와 홀로코스트의 참극을 돌아보며 느끼는 감정을 팔레스타인 민중에게 고스란히 떠안겼다.
8. 베트남
정부가 부패와 폭정을 저지르자 전국의 농촌에서 무장 세력이 출현했다. 남베트남과 미국 정부는 '베트콩'(베트남 코뮤니스트)이라 했지만 대부분 지식인과 불교도였으며 소수민족도 일부 있었다. 정부군과 미군한테서 빼앗은 총으로 무장하고 각양각색의 깃발을 들었던 남베트남 무장 세력은 1960년 해방전선을 결성하고 전국적인 게릴라전에 들어갔다.
용명하기로 명성이 높았다는 '따이한 부대'가 그토록 많은 사상자를 냈다면 변변치 못한 무기를 들고 싸운 해방전선의 손실은 얼마나 컸겠는가. (한국의) 베트남전재의 상처는 어디까지나 '가해자'로서 입은 것이다.
그 문제를 덮어두고 한국과 베트남의 우호관계를 말하는 것은 남과 자기 자신을 모두 속이는 일이다. 조선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가리켜 '제국주의 시대에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난 불행한 일'이라거나 '좋은 미래를 위해 어두운 과거를 얼른 잊어버리는 게 좋다'고 하는 일본 우익과 다를 바 없다. 베트남에 파병한 덕에 우리 기업이 사업 기회를 잡았고, 그렇게 벌어들인 외화로 산업화를 성공시켰으니 잘된 일이라고 한다면, 정당화할 수 없는 침략전쟁은 없을 것이다.
9. 맬컴 엑스
미국 인종문제의 핵심은 '소수인종'이 아니라 '백인'에게 있다. 그들은 인종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미국을 건립했으며 인종주의적 특권의식에 의거해 흑인 노예를 부렸다. 누가 백인인지는 자기들도 모른다. 처음에는 앵글로 색슨계 이민자만 백인이었다. 독일, 아일랜드와 북유럽 이민자가 뒤를 이었고 이탈리아와 그리스를 비롯한 남유럽과 동유럽 유대인이 합류했다. 유럽 식민지였던 라틴아메리카 사람들도 대거 섞엳르었다. 그들은 피부색과 신체 특성이 모두 달랐고 자기네들끼리 혼인해 유전자가 뒤섞였다. '인종'과 마찬가지로 '백인'도 객관적인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사회적 발명품이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