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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기자 Jan 14. 2023

말을 잃은 여자와 빛을 잃은 남자

한강, <희랍어시간>


여자는 말을 잃은 경험이 있다. '실어증'이라 부르는 그것이다. 그것이 그녀에게 처음 왔던 것은 열일곱 살. 언어를 잃은 그녀에게 말문을 다시 틔어준 것은 낯선 프랑스어 한 단어였다.


남자는 빛을 잃어가고 있다. 시한부 같은 그의 인생은 종착역으로 치닫고 있다. 꿈에서 깨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닌, 꿈 속에서만 세상을 볼 수 있는 삶이다. 독일에서 한국으로 홀로 돌아와 희랍어를 가르치는 남자는 과거의 한 여자를 그리워한다.


시간이 흘러 여자는 결혼을 했지만 그 끝은 이혼이었다. 하나 뿐인 아들의 양육권은 빼앗겼다. 정신병적 질환으로 분류되는 실어증 병력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그리고 또다시 말문을 막아버리는 '그것'이 찾아왔다. 언어를 다시 찾기 위해 그녀는 낯선 언어인 희랍어 수업에 등록한다.


책은 말을 잃은 여자와 빛을 잃어가는 남자의 이야기다. 말을 잃은 여자는 단순히 다른 사람과 소통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언어는 단순한 소통의 도구가 아니다. 인간의 사고 방식을 결정하는 불가분의 요소이다. 언어로써 발현되지 않는 단어를 우리는 생각할 수 없다.


영화 '컨택트'의 원작 소설로 유명한 테드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 여러 단편 중 이를 다룬 소설이 나온다. 지구를 방문한 외계인들은 언어학자인 주인공에게 자신들의 언어를 전수한다. 그 언어는 과거, 현재, 미래 시제가 하나로 응집된 언어다. 과거를 얘기하기 전부터 미래를 알고 있고, 미래와 현재의 이야기가 한 단어로 표현된다. 주인공은 그들의 언어를 습득하면서 자신의 비극적인 미래를 알게된다. '알게된다'는 표현은 어색하다. 태초부터 그 미래를 품고 태어난 것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리고는 그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희랍어시간의 여자에게도 언어는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 말을 잃은 그녀는 타인의 말들을 물론 모두 이해한다. 하지만 말을 잃은 순간부터 그녀의 머릿속은 언어로 된 사고를 따로 진행하거나 처리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말이나 언어 따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별도로 생각하고 움직인다. 소설을 읽으면서 마치 아득한 태초의 세계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도 받게 된다. 여자는 말이 아닌 어린이용 비누 냄새나 손가락을 움직여 남자의 손에 글자를 적는 촉감 등으로 기억된다.


빛을 잃어가는 남자에게 세상은 새카맣거나 새하얀 것이 아니다. 오히려 희뿌연 색에 가깝다. 남자는 오로지 꿈과 기억을 통해서만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어렸을 적 받은 시한부 선고라 담담하게 받아들이려 하지만 그는 과거에 만났던 한 여자에게 집착함으로써 꿈과 기억에 매달린다. 


여자와 남자는 어둠 속에 놓여 더듬거리며 서로가 서로를 잇대어 간다. 그 끝엔 결국 뭐가 있었을까. 희극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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