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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을 인정한다는 것

니 맛도 내 맛도 아니면 누군가의 맛이겠지

by 한수

“에이 맛없어.” 음식을 찾아다니지 않는다 해도 사람은 늘 먹어야 한다. 먹고 싶지 않아도 먹어야 한다. 이왕이면 맛있는 게 좋다. 먹는 것에 크게 의의를 두지 않아도 맛 없는 것보다는 맛있는 게 낫지 않은가.


음식이나 재료의 이름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맛있고 맛없는 건 안다. 적어도 내 입에 어떤지는 늘 느끼고 있다. 나 역시 맛있는 음식이 좋다. ‘맛’이라는 건, 내 입이 결정한다. 내 입에 맞으면 ‘맛있는 음식’, 내 입에 맞지 않으면 ‘맛없는 음식’이 된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이제 고작 몇 번이지만, 나는 가끔 이렇게 음식평을 한다.

“내 입엔 안 맞지만 맛은 좋네.”


십여 년 전이라면 이 말은 거짓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실이다. 나와 맞지 않음은 분명한데 맛은 괜찮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맛이라는 건 매우 주관적이지만 나의 느낌은 실제다. 나의 입맛과 그 맛 자체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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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모습이 객관적으로 드러나지 않기를 바랐다. 나의 본모습을 알면 사람들이 나를 좋게 보지 않으리라는 우려를, 나 역시 가지고 있다. 그래서 종종 거짓을 보이고 거짓을 말한다.


어른이 되어 좋은 것 중 하나는, 전에는 드러내기 싫었던 나를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누구나 다르다는 것,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는 것, 그래서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어 그렇다. 함께 하기 위한 규칙을 위배하지 않는 이상, 정말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의 그것이 누군가의 눈에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라면 ‘꼰대’나 ‘아저씨’라는 말 한 번 들으면 그만이다.


그렇게 나에 대해 조금은 객관적이 되어가는 중, 나 외의 것에도 전에 없는 시선을 보낼 수 있게 됐다. 누군가의 외모, 재력, 성격에 대해서는 물론, 어떤 일 혹은 물건에 대해서도 그렇다. 좋고 나쁨은 내가 정하는 게 아니다. 내가 할 수 없거나 하지 않았거나 싫어한다고 해서 나쁘거나 쓸모없는 게 아니다. 그것은 그것 나름의 의미가 있다. 그것에 대한 나의 느낌은 중요하지 않다.


음식 맛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입안의 작은 혀의 판단은 내 몸에만 관여하면 된다. 너무나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맛이 없는데 그렇게 많이 나오고 있다는 건, 그들에게는 적당하거나 맛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이제야 알아가고 있다.


그래서 가끔 생각이라는 걸 해 본다.

‘사람들이 맛있다고 하는 게 바로 이 부분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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