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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한 ‘무지의 베일’

알 수 없다

by 한수

우리는 싸운다.

나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더 좋은 것을 얻기 위해,
많이 가지기 위해.
그리고 또, 더 많이 가지기 위해.

더 많이 가지기 위해?


누군가 굶주림에 주저앉아도 나는 관심이 없다. 병에 쓰러져도 괜찮다. 하루 한 끼 먹는 것도 어려운 사람을 보아도, 겨울에는 냉골 여름에는 찜통인 옥탑방에 사는 사람이 있어도, 수해로 집을 잃어도 그냥 그렇다. 내 일이 아니니까.


부자 감세
나에게 재산이 없을 때, 부자 감세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함께 사는 세상 아닌가. 잘 버는 사람이 잘 사는 사람이 더 부담해서 사회를 위해 쓰는 게 당연하다. 나에게 재산이 많을 때, 부자에게만 높은 세금을 요구하는 건 부당하다. 내가 누구를 속여 돈을 벌었는가? 사람을 해하고 돈을 빼앗았는가? 말도 안 된다.


장애인 이동권
비장애인인 나는 장애인의 이동권 주장이 너무 과하다 생각한다. 길 한복판을 차지하고 시위하는 모습은 정말 좋게 볼 수 없다. 출근길 지하철을 가로막는 행위는 또 어떤가. 지하철 역사에 엘리베이터도 부족하다고? 한두 정거장 돌아가면 되는 거 아닌가. 어차피 전동휠체어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장애인인 나에게 세상은 너무 각박하다.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없다. 심지어 말을 들어주지도 않는다. 목소리를 크게 하지 않으면, 길을 막지 않으면 고개조차 돌리지 않는다. 싫지만 어쩔 수 없다.


누구의 말이 맞는가.


미국의 정치철학자 존 롤스(John Rawls)는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이라는 사고 실험을 제시했다. 사람들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 성별, 인종, 재능, 부와 같은 개인적 특성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사회의 기본 원칙을 선택한다면, 더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 규범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무지의 베일을 써 보자.


나는 부자일 수도 있고 빈자일 수도 있다. 남자일 수도 여자일 수도 있다. 성소수자일지도 모르고. 장애인인지 비장애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성인 어쩌면 어린 아이다.


이제 다시 시작하자.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어디인가?


그렇다. 가정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성별도 재산도 나이도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틀렸다. 적어도 어떤 것에 대해서는 틀렸다. 어떤 것에 대해서는 “그런 가정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말할 수 없다.


언젠가 부자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언젠가 빈자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반드시 나이를 먹는다. 대부분 몸과 정신이 쇠약해질 것이다. 뿐만 아니라 평소라면 상상하지 못했던 사건에 휘말릴 수도 있다.


역시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그리고 당신이 얼마나 특별하기에?


얼마 전 인도의 억만장자 사업가가 폴로 경기 도중 벌을 삼켜 알러지 반응으로 심장마비를 일으켜 사망했다고 한다. 우리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


다시 장애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Please In My Front Yard
어느 지역에 장애인학교를 세우려 할 때, 무릎 꿇고 울부짖는 부모를 차갑게 외면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가끔 궁금하다. 그것을 강렬히 반대했던 그들 모두 여전히 같은 주장을 하고 있을까? 뻗뻗했던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굽히게 된 사람이 한두 사람은 있지 않을까? “내 집 앞은 안 돼! (Not In My Back Yard!)”에서 “내 집 앞에! (Please In My Front Yard!)”로 바뀐 사람이 없으리란 보장은 없다. 상황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무지의 베일은 가상의 조건을 설정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 두려움을 갖게 해 줄지도 모른다. 알 수 없는 내일, 혹여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미리 상상해 보는 것이다. 말했다시피 미래는 누구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두려움을 갖고 살기를 바란다. 그 두려움이야말로 평등을 향해 나아가는 원동력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른 이를 위해서일 필요도 없다. 오직 나를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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