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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수인 Sep 13. 2024

아버지 49재를 마치고

1장 유품 정리(1)






띠리릭, 띠띠띠띠, 번호 키 눌리는 소리에 일순 정적이 흘렀다. 이어 문 사이로 성진의 얼굴이 먼저 보였다. 성진은 현관문 안으로 들어 서서 시퍼렇게 접힌 플라스틱 박스를 후두두둑 떨어뜨렸다. 엄마, 이제 들어오세요. 한 쪽으로 비킨 그의 뒤에서 희주가 나왔다.


“다녀오셨어요? 엄마!”


누군가 반겼지만 희주는 응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조용히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와 내부를 침침하게 덮고 있던 두꺼운 커튼을 옆으로 치우고 부유하는 먼지들을 무료하게 들여다볼 뿐이었다. 그 사이 성진은 검은색 코트를 벗어 가죽 소파에 걸쳐두었다. 그는 희주에게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이제 막 빛을 받아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한 사물들을 차례로 둘러봤다. 그 순간, 근 10년이 다 된, 구입 당시에는 꽤 고가였지만, 요즘 나오는 제품에 비하면 한없이 투박한 벽걸이형 LED TV가 그의 눈에 띄었다.


“성진아! 오랜만이다. 저번엔 영 경황이 없어서 인사도 못했는데. 이렇게 다시 보니 되게 좋네.”


성진의 얼굴이 꺼진 LED판에 어렴풋이 비치자, TV가 몸에 붙은 먼지를 몇 개 떨어뜨리며 명랑하게 인사했다.


“잉야? 너 뭐다냐. 누나헌티 성진이가 뭐여? 암만 봐두 니가 더 늦게 나왔어야?”


“긍게 얘는 늘상 똑똑한 척은 다 허믄서 이르케 뭘 몰라서 어쪄? 분위기 파악도 못허고 위아래 구분도 못 해불고잉.”


전라도 어디 관광지에서 구입한 원앙 모양 목각인형 한쌍이 TV 아래에 나란히 앉아 핀잔을 놨다.


“아니, 내가 같은 인간도 아닌데, 꼭 그렇게 위아래를 따져야 해?”


“뭐, 맘대루 혀. 가만 보니 엄마헌티도 쟤, 너, 야. 헐 놈잉가부네.”


“아이씨! 그거랑은 다르지. 뭘 또 그렇게 말해!”


TV가 분한지 씨근덕거렸다. 어쩐지 전원도 안 들어온 까만 몸체가 후끈 달궈지는 것만 같았다. 그런 그에게 목각인형들은 몇마디 비아냥을 더 얹어 화를 돋궜다.


“그만들 좀 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소파 위에서 그들의 언쟁을 듣던 누군가가 희주를 반길 때와는 사뭇 다른 목소리로 심각하게 말했다.


“잉, 그려 너도 나와야제. 얘랑 짝꿍잉께.”


“어어, 맞어. 자, 글면 너는 또 뭐가 중허다고 하까? 시방 야가 언니헌티 하는 말을 듣고도 고런 것은 중한 것이 아니다 하니, 너가 대체 무신 말을 할랑가 고것도 함 들어봐야것제.”


빨간 원앙이 TV와 한 세트인 리모컨을 향해 쏘아붙였다. 리모컨은 툭하면 싸우려고 드는 그들에게 질린다는 듯 한숨을 내뱉었다.


“현관 앞에 저 파란 것들 보이지? 저게 뭐였는지 너넨 기억이 안 나?”


리모컨의 말을 따라 현관 앞으로 시선을 돌린 거실 물건들은 그 앞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파란색 이삿짐 박스를 보고서 불쑥 무언가를 떠올렸다.


“쩌기, 저거? 어잉, 나도 기억은 나불제에. 근디 저거시 뭐 어쪘다는 것이여?”


파란 원앙의 성의 없는 대꾸에 다른 거실 물건들이 조금씩 웅성거렸다.


“답답하네. 진짜. 아무래도 넌 새대가리가 맞아.”


“그럼 내가 새지……, 아야, 잠깐만, 너 시방 고것의 참 뜻이 또 뭐다냐?”


“작고 소중한 네 머리로는 진짜 감이 안 오는 거 같다는 말인데?”


“옘병, 이제 봉께 이게 또 나한티 시비를 털라고 헌 말이네?”


“제발 빨강이랑 붙어서 남들 염장만 질러대지 말고, TV 시청이나 더 열심히 해. 그 명당 자리에 앉아서 그거 안 하고 뭐 하니? 그래야 너의 지적 능력과 기억력이 아주 조금이라도 더 향상이 되고 그러지.”


“워매 진짜, 이것 보소? 너 말허는 뽄새가 점점 껄쩍지근허다?”


“이게 다 과거를 통해 교훈을 얻고 학습하는 네 능력이 거의 제로에 가까우니 딱해서 하는 소리야. 다른 애들 한 번 봐 봐. 벌써 저게 뭔지 알고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걱정하고 있잖아. 근데 너희들만 이 상황의 심각성을 전혀 모르고 있다니까?”


“뭐? 학습 능력이 제로? 하! 아야! 너야말로 뭘 몰라서 긍가븐대, 새도 대그빡이 꽤 괜찮은 종족이여! 너 쩐에 나랑 같이 테레비서 봤잖여. 그 꺼멓게 까까 우는 새!”


“까까 우는 새?”


“그려! 그 꺼먼, 아니, 잠깐, 근디 고거시 이름이…… 뭐시였더라?”


그때 파란 원앙을 향해 누군가가 “까마귀”하고 속삭였다.


“잉, 그려, 까마귀. 고놈이 한겨울 눈이 내려가지구 꽝꽝 언 지붕 위에따가 병뚜껑을 따악 갖다 놓구서 미끄럼틀을 타기 시작하는 것이여.”


“아니, 그러니까, 그 소리가 지금 왜 나오는 건데?”


“기가 멕힌다 이 말이여. 우덜 종족이 도구와 환경을 누구보다 잘 활용하고, 유희와 오락을 즐기는, 똘나고 똘난 상급 종족이다 이거여! 그니께 더 무시허지 말고! 앵간치 좀 혀라고!”


“얘 또 핀트 못 맞추네. 그래. 알았다. 알았어. 너 말처럼, 너희들 참 똘똘해. 근데 지금 같은 위기에 얼빠진 얼굴을 하고서 뭐가 어쨌다는 거냐는 그 반응은……, 정말이지 나로선 이해하기가 참 힘들다. 너어, 진짜 기억 않나? 성진이 누나 결혼한다고 저쪽 방 싹 비우던 그때?”


파란 원앙은 그때의 일이 금방 떠오르지 않는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빨간 원앙을 슬쩍 쳐다봤지만 그도 마찬가지였다.


“아, 그래. 그거는 벌써 5년이나 지나서 너희는 기억을 못할 수도 있겠다. 그러면 재작년에 성준이 형이 장가 가느라 방 정리했던 건? 그건 기억하지?”


“아, 고건 기억이 나는 것도……. 에라이 진짜! 자꾸 무시하지말랑께! 다 나! 싹 다 기억이 난대니께!”


“그래, 그럼. 다행이네.”


리모컨이 더 물어 뭐 하냔 식으로 말을 마쳤다. 그러자 빨간 원앙이 갑자기 빼액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런 썩을 놈의 것이! 나으 지아비께서 무시허지 말라 말했는디도 또 저 지럴이네!”


“아이고, 이젠 쌍욕까지 하세요?”


“고냥 본론만 톡 까불고 말을 허면 되지. 꼭 다른 애들 앞에서 울 서방님을 면박을 주고, 상모지리로 맹글어야 쓰것냐?!”


까맣게 색칠 된 원앙의 눈이 리모컨을 향해 붉게 빛났다.


“아니, 야, 빨강아, 너무 흥분하지 말고 내 말 좀 들어 봐라.”


지켜 보고 있던 TV가 슬쩍 중재에 나섰다.


“리모컨 쟤 말의 요지는, 여차하면 우리 모두 여기서 사라지는 수가 있다 그거거든? 이씨 집안 남매들 출가할 때마다 저기, 저 파란 판때기가 등장했단 말이야? 저거 접어서 상자로 만들면 그 안에 온갖 물건들이 싹 담겼고. 그런 후에는 어떻게 됐냐? 단 한 물건도 다시 돌아온 게 없지? 그러니까 쟤가 지금 저렇게 민감하게 구는 거야.”


“아니, 긍께, 그른 거면 고냥 말을 딱 해부러. 왜 빙빙 돌라냐고. 우덜 열 받게.”


“암튼 이제 오해 풀고, 대책이나 세워 보자. 아 유 오케이?”


“오께이!”


파란 원앙이 냉큼 대신 대답했다. 빨간 원앙은 눈치 없는 지아비를 보며 눈을 흘겼고, 다른 이들은 과거 정들었던, 그러나 지금은 사라져 없어진 물건들을 떠올리며 떠들어댔다.


“근디 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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