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이해타산(8)
“아니다. 그리 말하지 말거라.”
윤조 에센스가 그러는 사이, 성진이 빠르게 다가와 에쎄 수를 화장대에 탁! 하고 걸쳐 놓았다.
“이리 가까이서 보는 것도 좋구나. 앞으로 너는 이 집에서 참 귀하게 쓰일 것이다. 나는 필히 그렇게 보이니 이제 너도 너를 과히 낮추는 그런 말들은 더 이상 하지 않는 게 좋겠다.”
정다운 동생을 대하는 듯 나긋한 목소리로 얘기하는 윤조에게 에쎄 수 0.1의 가슴이 크게 울렁거렸다. 고맙다고 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그 말이 쉽게 따라나오지 않았다. 몇 번을 머뭇대다가 갑자기 찌릿하게 번지는 불편한 감각에 담배는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역시나 성진이 먹이를 앞에 둔 맹수의 눈을 하고서 화장대 위를 구석구석 살피고 있었다.
“언니, 지금부터 제 이야기 잘 들으세요. 제가 곧 이 아래로 떨어질 거예요. 그러면 언닌 그때 언니 몸을 넘어뜨려서, 저 서랍 밑으로 굴러 들어가세요. 최대한 깊숙히요.”
“뭐라?”
“제발 그렇게 해요. 그래야 언니가 살아요.”
“내가 왜 그래야 하는, 윽!”
윤조 에센스는 의문을 풀기도 전에 성진의 손에 붙들려 뚜껑이 열려버리고 말았다. 성진은 연한 미색의 끈적이는 액체를 손등에 짜서 코를 들이댔다. 그러고는 반대쪽 손등을 들어 에센스를 묻힌 손에 대고 살살 문질렀다. 에센스가 피부로 기분 좋게 흡수 되자, 성진은 오, 이거 괜찮네? 향도 좋고. 라는 짧은 감상평을 남겼다. 그는 이제 에센스 병을 똑바로 들어 실눈을 뜨고 빛을 통과시켜 보았다. 안을 유심히 들여다보다 그렇게 많이 남진 않았네? 하는 얼굴이로 고민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본윤 에센스와 에쎄 담배는 긴장감에 몸서리가 쳐질 지경이었다.
“부인, 괜찮으시오? 혹여 공주마마가 부인을 버린다 한들 나 또한 바로 따라갈 터이니, 걱정할 거 하나 없소.”
“예, 폐하……. 소첩……, 괜찮사옵니다.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그러나 윤조 에센스는 제가 하는 말과는 달리 누가 들어도 두려움이 뚝뚝 묻어 나오는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이, 성지니 너는 뭘 그르케 보는 겨. 고만 내려 놓고 따른 일을 좀 혀 봐. 응?”
가죽 지갑이 회유하는 투로 한마디 늘어놓았다. 그러자 용하게도 성진이 그에게 시선을 두고 윤조 에센스 뚜껑을 눌러 닫기 시작했다.
“이이. 잘헌다. 긍디 나 그르케 쳐다보믄 가슴이 막 쫄려부는디, 너무 그르케 빠안히 보지는 않았음 좋것어. 이이.”
그 말도 알아들은 듯 윤조 에센스에게로 시선을 옮긴 성진은 화장대 위에 그를 똑바로 세워두었다.
“허휴. 십 년 감수했네.”
“그래. 하하. 나도 참 많이 놀랐구나. 막상 죽음이 내 앞으로 닥쳐 오니 정신이 자꾸 혼미해져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행이오. 참으로 다행이야. 이렇게 무사히 돌아왔으니.”
“예, 폐하. 그저 이대로 이렇게 무탈하면 좋겠…, 앗! 폐하!”
성진이 이번엔 본윤 에센스의 몸을 들어 이리저리 살폈다. 이어 이건 아빠 건가? 하며 윤조보다 묵직한 병체와 뚜껑을 분리했다. 킁킁, 여성용보다 조금 더 상쾌하지만 무거운 향이 나는 그것을 두고 코를 벌름거리던 중 성진이 에센스 병을 거꾸로 뒤집었다. 그러자 안방에 아직 살아 남은 물건들 모두가 깊이 탄식했다.
“아이, 굳이 저걸 왜 확인하는 겨! 고냥 넘어가도 될 거슬!”
지갑의 역정에도 건수를 잡은 성진의 얼굴에는 산뜻한 미소가 서렸다.
“아우야.”
윤조 에센스가 이전과 다르게 흔들림 없는 차분한 목소리로 에쎄 담배를 불렀다.
“저 부르신 거예요? 언니?”
“그래. 아까 네가 내게 아뢴 일을 지금 당장 행해 줄 수 있겠느냐?”
“네, 당연하죠. 그렇게 하면 언니가 죽지 않을 수 있는데요!”
“허면, 곧 어마마마께서 이리로 나오실 모양이야. 내가 셋을 외치는 때에 네가 저 아래로 좀 떨어져주련?”
“네! 그럴게요. 맡겨만 주세요.”
“그래. 고맙구나. 내 이 은혜는 필히 잊지 않으마.”
안방 화장실 세면대에서 쏟아지던 물소리가 끊겼다. 윤조는 바로 ‘하나’라고 외쳤다. 고무 슬리퍼가 타일 바닥에 닿아 나는 소리가 끊겼다. 윤조가 ‘둘’을 외쳤다. 희주의 손에 문고리가 잡혀 딸각하고 돌아가는 소리가 나자마자, 윤조가 ‘셋’을 외쳤고, 그 즉시 화장대 위에 애매하게 올려져 있던 에쎄 담배가 그 밑으로 떨어졌다. 성진이 그걸 보고 바로 몸을 숙여 담배를 집어들었다. 윤조 에센스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몸을 날려 마침내 방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 희주가 안방으로 몸을 밀고 들어왔다. 윤조는 그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멀리, 그리고 최대한 빠른 속도로 몸을 굴려서 희주의 앞으로 달려갔다.
“어마마마! 제발, 제발, 소첩의 청을 들어주시옵소서! 저와 제 지아비는 어마마마와 아바마마께서 각별히 아끼시던 것들이옵니다. 두 마마께서 매일 조금씩 저희를 찍어 바르시면서 파안대소 하시던 일들을 다 기억하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그러니 마마, 제발 소첩과 저의 지아비를 버리지 마시옵소서!”
윤조 에센스가 희주의 발 앞에서 거의 울다시피 소리쳤다. 그러나 그 처절한 몸부림이 무색하게도 성진의 그 다음 동작이 너무나 빨랐다. 그는 어느새 희주 앞으로 다가와 무심하게 손을 뻗었고, 그저 바닥에 굴러 떨어진 윤조 에센스를 들어올리며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아니, 머리라도 맞았으면 어쩔 뻔했어? 왜 갑자기 굴러 떨어지고 난리야? 성진의 일상적인 투덜거림에 모두들 할 말을 잃고 망연자실했다.
“부인, 어찌 그리하였소. 부인이라도 살아야지.”
“폐하아—. 소첩은…….”
윤조 에센스는 성진의 반대편 손에 붙들린 자신의 지아비를 바라보며 더 이상의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야, 뭐냐? 희주가 무신경하게 성진의 양손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성진은 들고 있던 두 화장품을 뒤집어 희주에게 보여줬다. 봐, 봐. 엄마. 이거 둘 다 날짜가 지났어. 희주는 성진에게서 그것들을 받아들었다. 성진도 별 생각 없이 그것들을 건넸다. 희주가 침침한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깨알 같은 숫자를 읽어 나갔다. 작년 12월까지라고 적힌 글씨가 깨 한 톨만 하다. 성진은 그 새 종량제 봉투를 가져오려는 중이었다.
“이이—?!”
지갑이 이상한 탄성을 냈다. 최후의 순간임을 알고 에센스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않으려던 에쎄가 무심결에 시선을 돌렸다.
“어머! 어머! 저것 좀 봐. 결국 살겠네! 저 둘! 어머!”
재봉틀이 아주 반색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희주가 화장대 바로 아래에 떨어져 있던 에쎄 담배까지 위로 올리자, 그곳에 있던 모든 물건들이 어안이 벙벙해진 채로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 성진이 부리나케 달려 와 종량제 봉투를 내밀었다.
“아이, 쟤는 왜 저르케 집요한 겨? 이이? 고만 좀 내비두면 어디가 덧나는 겨?”
희주는 오히려 그를 보고 아주 덤덤하게 왜? 하고 말았다. 그거 버리라고. 성진은 괜히 더 짧게 답했다. 그러자 희주의 미간이 눈에 띄게 좁아졌다. 아이 참. 나 당장 쓸 거 없어. 그리고 이게 얼마나 좋은 건데. 그렇지만 성진은 쉬이 포기하지 않을 모양인지 본윤 에센스가 있는 쪽으로 손을 뻗었다. 아이! 냅두래두! 쫌! 준이가 사준 거야! 이거! 희주가 결국 신경질을 내며 성진의 손을 쳐냈다. 어지간히도 비싼 걸 사줬나 보다. 성진은 아픈지 눈이 빼족해져선 제 손을 거둬 가며 유난스럽게 문질러댔다. 아니, 이건 왜 못 버리게 하는데? 아빠 쓰던 거라 엄마가 바르는 것도 아니잖아. 괜히 더 심퉁을 섞어 말하는 와중에 희주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성진이 들고 있던 종량제 봉투를 빼앗아 들고 몸을 돌렸다. 엄마! 성진이 못 참고 빽 소리 질렀다. 그러자 희주가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침묵했다. 성진은 그 순간 제가 너무 내질렀나 싶어서 살짝 반성하려는 마음이 솟을 참이었다. 그러다 뒤돌아 선 희주의 다음 말을 듣고 는 한참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어야만 했다. 늬 아부지 냄새 나서 그런다. 왜.
“아이고. 진짜 라뷰 스토리 한 번 다이나믹하네요.”
“그니께. 고때나 지금이나 한결 같어. 이이.”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넘기며 얼이 빠져 버린 에센스들은 아직도 무슨 말이 없었다. 그것들 대신에 에쎄 담배와 지갑이 재미 좋게 도란거렸다. 그런데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그것은 또 다른 폭풍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였다.
이 글의 시작이 궁금하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