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 선 Oct 06. 2023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

나를 잃어버리는 과정

예민하단 말을 듣는 게 칭찬 같으세요 책망 같으세요?

"넌 너무 예민해서 사람을 피곤하게 해, 사람을 질리게 해"란 말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아무리 무던해지려고 노력해도 덜 예민해지진 않았어요.


우린 모두 자라며 억눌러야 했던 면과, 더 극대화하고 과장해야 했던 면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성적 잘 받으려 열심히 노력하는 면은 찬송받았을 것이고, 수업시간에 공상하게 하는 상상력은 벌받았을 확률이 큽니다. 환영받지 못한 우리의 파편들은 거부당한 기억 속 상처받은 아이인 상태에 머물러요.


살아온 삶이 다르고, 우선순위가 다르고, 너무 사랑하기에 - 부모가 아이가 타인인걸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의 연장선으로 보면, 자신의 경험에서 배운 것들만 강요하게 됩니다. 외모로 조롱받은 트라우마가 있는 부모는 아이가 사회적 미의 기준을 벗어난다면 안절부절 불안해했을 거예요 - 내가 겪은 수모와 아픔을 사랑하는 내 아이도 느낄까 봐. 가난에서 고생스럽게 자란 부모는 경제적 안정이 행복의 필수조건이라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고, 높은 확률로 아이의 성적에 과잉몰입했을 것입니다. 그러다 미처 보지 못하고 사랑해주지 못한 아이의 모습들 어쩔 수 없이 있었을 거예요. 너무 사랑해서 한 일이지만, 아이에겐 조건적인 사랑으로 입력됐을 가능성이 큽니다. 어떤 조건과 기준에 도달해야만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학습으로.


양육자에게 직접적으로 받은 영향이 아니더라도 인터넷이나 사회가 떠받드는 "미덕"을 관찰하며 간접적으로 생긴 기준도 나에게 돌리는 화살이 됐을 수 있어요. 대표적으로 미의 기준이 있습니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당연시된 생각 없는 외모평가와 명확한 미의 기준은, 그것에 부합하지 않는 나의 모든 걸 내치게 합니다.


사랑받기 위해 없애고 억눌러야 하는 나,

사랑하기 쉬우니까 부풀려야 하는 나.


내면아이가 상처받을 당시의 나와 내 본성이라면, 내면어른은 우리의 에고, 우리의 이성입니다. 내가 의식적으로 하는 생각들과 나 자신에게 하는 말들은 내면어른의 목소리예요. 내면 어른이 나의 내면아이를 대하는 방식은 - 한마디로 내가 나를 대하는 방식은 - 부모님이 우릴 어떻게 대했느냐에서 결정돼요. 부모님이 나를 박해했고 나의 감정을 버거워했다면, 어떤 나는 예뻐하고 어떤 나는 벌했다면 - 나 역시 같은 태도로 나 자신을 대할 수밖에. 내면아이는 우리에게만큼은 받아들여지길 꿈꿨겠지만, 여러 번 짓밟힌 기대에 결국 내면어른을 불신하고 경계하게 됩니다. 서로를 불신하고 갉아먹는 내 안의 균열은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자기 사랑의 첫 발자국은 버려야 했던 내 모습들이 뭔지 알아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기준들이 생긴 건 결국 사랑받고 받아들여지려 한 노력의 결과잖아요. 사회적인 동물인 우리가, 연약하고 힘이 없어 양육자 없인 살아남을 수 없던 우리가, 우리를 살리려고 한 본능적이고 궁극적인 자기 사랑이기도 해요! 그 노력을 알아봐 주고, 고마워해줘야 하지 않을까요? 그저 그 기준들은 우리가 자랄 당시의 환경, 주위 사람 개개인의 의견의 융합일 뿐, 절대적인 진리가 아닌걸 - 더 이상 나를 버려가며 맞출 이유가 전혀 없단 걸 - 내면아이에게 따듯하게 말해줄 시간일 뿐. 저의 예민함은 좀 더 무던한 사람들에겐 피곤하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전 예민해서 더 섬세하고 배려 깊게 세상을 보아요. 어떤 특성에 맞고 틀림이란 없어요. 어떻게 보느냐 - 시선에 달려있을 뿐이에요. 알록달록 나의 모든 색깔들에서 옳고 그름의 기준을 벗겨주세요. 나는 그 무엇과도 아예 비교가 불가한 고유의 사람 - 내 외적과 내적인 요소, 나의 경험들 하나하나가 특별하고 유일무이한 나라서 나를 사랑하는 마음은 날 외부에서부터 안전하게 지켜냅니다.


다음글: 를 재양육하는 방법



이전 05화 배은망덕할지라도 부모님께 책임을 물어야 하는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