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톨 May 30. 2020

가끔은 그냥 지면 안 될까요

매일매일 이겨내는 게 버거워질 때

너무 자주 찾아오는 게 아닌가 싶지만, 고백하자면 지난 몇 주 간 슬럼프였다. 직장에서 여러 가지 일이 한 번에 터지면서 사람 스트레스와 일 스트레스가 동시에 왔고 이게 내 진로가 맞나 한참을 고민했다. 원래 주기적으로 올리던 페이스북 게시글도, 1주에 하나는 쓰자고 다짐했던 브런치 게시물도, 자기 전에 꼭 30분은 해오던 독서도 다 지겨워졌다. 모든 게 기승전‘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였다. 자매품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도 있겠다.


동기에게 사내 메신저로 이런 애기를 했었다. 이제는 돈 버는 것도 싫다고. 블로그도 귀찮고, 돈 벌려고 아등바등하는 것도 싫고, 퇴근 후 공부하는 것도 지긋지긋하고, 항상 성실해서 내가 얻는 게 뭔지 모르겠다고. 꼭 무엇을 얻자고 행동하는 건 아니지만, 대가를 바라지 않고 뭔가를 하기엔 나는 이제 지쳤다고. 왜 나는 매일 8시 반에 출근하고, 퇴근 후에 집안일과 운동과 자기계발을 하지 않으면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사람이 되어버렸느냐고. 나는 항상 성실한 그가 ‘그래도 열심히 하다 보면 더 발전한 네 자신을 발견할 거야’라는 식의 조언을 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그는 굳센 사람이니까. 그런데 대신 그는 밑의 사진을 보내줬다.



아이유가 팬카페에 남긴 말이라고 한다. 가끔은 져도 괜찮다는 말이 왜 위안이었을까? 무작정 힘내라는 말보다 나를 훨씬 위로해준 말이었다. 맨날 이겨내는 정말 대단한 사람들도 있다. 그렇지만 버거울 때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못한다고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억지로 자신을 채찍질하며 달리는 것보다 가끔은 다 잊고 다른 일을 하는 게 더 도움이 되기도 한다.


<빨간 머리 앤 Anne with an E>에서 소중한 사람을 잃고 슬퍼하는 조세핀 할머니께서 ‘슬픔은 사랑의 대가’라면서 이런 말을 한다.


감정이란 건 참 불편하고 종종 참기 힘든 거란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은 그런 감정도 괜찮구나.


나는 어쩌면 성실한 나의 모습에 중독된 걸지도 모른다. 내가 실제로 발전을 하고 재미를 느낀다기보단 남들이 나를 게으른 작심삼일형 사람이라고 욕할까봐 두려웠다. 그래서 우울하고 불안한 감정은 최대한 빠르게 제거하고 싶었다. 유연하게 휘어질 줄도 알아야 하는데 꼿꼿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나의 마음은 작은 바람에도 부러져버렸다. 가끔은 져도 괜찮은데.


그렇다고 덮어놓고 져도 괜찮은 것은 아니다. 관건은 잘 지는 것이다. 졌다고 분해하며 울먹거리는 게 아니라, 쿨하게 굿 게임! 이라고 외치면서 다음엔 어떻게 이길 수 있을지 연구하면서 자신을 다독이는 법 말이다. 퇴근 후, 지친 나 자신을 어떻게 어르고 달랠 수 있을지가 나의 최대 관심사이다. 요즘 시도하는 방법은, 캔들을 키고 노래(재즈나 때로는 프랑스 샹송)를 들으면서 폼롤러로 스트레칭하는 것. 지친 근육을 하나하나 체크하면서 상체부터 하체까지 꼼꼼하게 풀어주다 보면 나는 성실하다는 자기효능감에 행복함과 뿌듯함이 온몸에 퍼진다. 그러고 나면 자연스럽게 책상 앞에 앉게 되더라.


삶을 이겨내는 게 힘들 때면 가끔은 그냥 지는 것도 괜찮은 옵션이다. 잘 질 수 있다면 말이다. 우울함의 구덩이를 파고드는 게 아니라,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자신을 보살피는 방법을 찾아가면 된다.

레진코믹스 <아가씨와 우렁총각> 중
매거진의 이전글 참을 수 없는 손절의 가벼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