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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바다

칠순여행

by 하늘바람

무심코 달력을 넘기다 아버지의 생신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다. 칠순이라는 숫자가 마음을 무겁게 했다. 언제부터인가 아버지의 등이 조금씩 굽어가고 있었고, 검던 머리카락 사이로 하얀 서리가 내렸다. 시간은 참 야속하게도 한 방향으로만 흘러갔다.


"아버지, 이번에 다 같이 여행 한번 가요."


퇴근길에 전화드렸을 때, 아버지는 잠시 말씀이 없으셨다. 우리 가족은 늘 각자의 삶이 바빴다. 명절에도 겨우 하루 만나 식사하는 게 전부였다. 그래서일까.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설렘이 묻어났다.


여행지로 코타키나발루를 고른 건 순전히 아버지 때문이었다. 젊은 시절 아버지는 바다를 무척 좋아하셨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를 키우느라 바다는커녕 제대로 된 휴가 한 번 가본 적이 없다고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비행기에서 내리자 후텁지근한 공기가 우리를 반겼다. 아버지는 공항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야자수를 보며 연신 감탄하셨다. 마치 소년처럼 들뜬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우리도 모두 웃었다.


첫날은 탄중아루 해변에서 시간을 보냈다. 모래사장 위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 수평선을 바라보는데, 아버지가 불쑥 옛날 이야기를 꺼내셨다. 내가 태어났을 때의 일, 누나가 처음 걸음마를 배우던 때, 동생이 중학교에 입학하던 날... 아버지의 기억 속에는 우리의 모든 순간들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그땐 정신없이 바빠서 이렇게 애들이랑 편하게 앉아있을 시간도 없었는데..."


아버지의 말씀에 우리 모두 잠시 말을 잃었다. 파도 소리만이 우리들의 침묵을 채웠다.


다음 날은 사피 섬으로 향했다. 배를 탈 때부터 아버지의 표정이 조금 굳어지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는 수영을 전혀 못하셨다. 그런데도 우리와 함께 스노클링을 하시겠다고 했다. 구명조끼를 두른 아버지의 뒷모습이 어쩐지 더 작아 보였다.


"아버지, 무서우시면 그만하시고 배에서 쉬세요."

"괜찮다. 너희들이랑 있으면 되지."


투명한 물속으로 들어가자 알록달록한 열대어들이 우리 주위를 맴돌았다. 아버지는 내 손을 꼭 잡고 계셨다. 예순이 넘어 처음 해보는 스노클링이었지만, 아버지의 눈빛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첫 수영을 배우는 아이 같았다.


저녁이 되자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우리는 해변가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평소 과묵하신 아버지는 오늘따라 말씀이 많으셨다. 젊은 시절 고향 앞바다에서 놀았던 이야기, 첫 월급으로 어머니와 근처 바닷가로 드라이브 갔던 추억, 그리고 우리가 어렸을 때 가족여행을 가지 못해 미안했다는 말씀...


"아버지, 우리가 미안해요. 이제야 이런 선물을 해드리네요."

"무슨 소리니. 너희들이 이렇게 잘 자라준 게 내겐 최고의 선물이야."


마지막 날 밤, 우리는 깜짝 이벤트를 준비했다. 아버지의 영상편지를 만들었는데, 보시자마자 아버지는 고개를 돌리셨다. 하지만 숨기려 해도 아버지의 눈가가 붉어지는 걸 우리는 모두 보았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아버지는 곤히 주무셨다. 옆자리에서 아버지를 바라보며 문득 깨달았다. 우리에게 아버지는 언제나 커다란 산처럼 든든한 존재였지만, 어쩌면 아버지도 우리처럼 때로는 두렵고 외로웠을지 모른다는 것을.


이제 아버지의 어깨는 더 이상 예전처럼 넓지 않다. 하지만 그 어깨가 품은 사랑의 크기는 여전히 우리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넓고 깊다. 코타키나발루의 바다처럼.


비행기 창 밖으로 구름이 흘러간다. 아버지의 주름진 손을 살며시 잡아본다. 거칠지만 따뜻한 이 손이, 우리가 흔들리지 않게 잡아주었던 이 손이, 앞으로도 오래오래 우리 곁에 있기를.


창밖으로 보이는 새하얀 구름이 마치 시간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숨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은 추억을 만들 수 있을까.


여행을 다녀온 지 몇 달이 지났다. 아버지 댁 거실에는 코타키나발루에서 찍은 사진이 걸려있다. 에메랄드빛 바다를 배경으로 환하게 웃고 있는 우리 가족의 모습. 아버지는 그 사진을 보실 때마다 여행 이야기를 하신다. 마치 그때로 다시 돌아가신 듯이.


나이가 들수록 더욱 분명해지는 것이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는 것.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더욱 소중하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아버지와 함께하는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특별한 선물인지를.


바다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지만, 우리의 시간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나는 다짐한다. 이제는 더 자주 아버지를 찾아뵙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더 많은 추억을 만들어야겠다고. 그래야 먼 훗날, 나도 아버지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추억을 들려줄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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