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히피 지망생 May 26. 2020

글 안에는 내가 있다

20대 초반의 내가 쓰다 - Radiohead 앨범 리뷰

컴퓨터 파일을 뒤지다가 낯익은 파일명을 발견했다.

'상처 받은 영혼들의 피난처, Radiohead - 세상에서 가장 주관적이고 건방진 앨범 리뷰'



설마...? 반가운 마음에 열어봤다. 대학 새내기 시절, 자의식 과잉을 연료 삼아 썼던, 세상 단 하나뿐인 '라디오헤드 베스트 앨범' 리뷰였다. 사연인즉슨, 대학 시절 공 CD에 좋아하는 노래를 구워서 좋아하는 사람에게 CD째 선물해주던 때가 있었다. 당시 라디오헤드의 열혈 팬이었던 나는 라디오헤드 베스트 앨범 CD를 만들어 나눠주곤 했다. 그때 CD 케이스에 CD만 넣어서 주면 뭔가 허전할 것 같아 '앨범 속지'를 끼워넣기 시작했고, 속지에 앨범 리뷰를 써넣으면 의미 있겠다 싶어 썼던 글이 낯익은 파일명의 정체였다.


(행여 저작권 걱정은 넣어두시라. 17년 전 얘기다. 그때만 해도 '소리바다'에 가면 공짜로 mp3를 다운로드할 수 있었고, '벅스 뮤직'에 가면 하루 종일 공짜로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런 시절이 있었다. 저작권이라는 개념이 있는 줄도 몰랐지. 이렇게 쓰고 보니 나이 많은 사람처럼 느껴진다. 하하)


글을 꺼내 다시 읽어보니 싸이월드에서 오래된 옛 사진을 발견한 느낌이다. 20대 초반의 풋풋한 감성과 대학생 특유의 우울한 정서가 적절히 섞여 '또 하나의 흑역사'가 탄생하고 말았다. 그러나 흑역사라고 치부해버릴 수만도 없는 것이, 처음엔 웃으면서 글을 읽어 내려갔는데 글을 읽다 보니 글 안에 '20대 초반의 나'가 들어있는 거다. 서랍장 깊은 곳에 감춰둔 앨범에서 빛바랜 사진을 발견해 꺼내봤더니, 바라볼수록 더 선명해지는 느낌이랄까.


그래, 지금의 내 삶은 펑크지만, 한 때 내 삶의 바탕색이 온통 Radiohead 였던 때도 있었지. 어두운 셀로판지를 덧대어 세상을 바라보듯, 모든 게 뿌예 보이던 시절.

그때 그 시절, 20대 초반의 내가 썼던 라디오헤드 앨범 리뷰를 공개한다. 두둥-


*

손발 오그라듬 주의. 오그라든 손발 펴달라고 산재 신청하기 없음

**

글이 상당히 길다. 이걸 어떻게 썼나 싶다. 돌아오라, 20대의 열정이여ㅠ






상처 받은 영혼들의 피난처 RADIOHEAD

- 세상에서 가장 주관적이고 건방진 앨범 리뷰


2003.   

 

※ 이 글은 앨범 리뷰임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주관적인 글임을 밝힙니다^^

필자의 음악적 소양 부족으로 주워들은 이야기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음(..;)



프롤로그...


지독한 불면증이었다. 이른 새벽이었지만 그날도 잠은 오지 않았다. 늘 하던 대로 컴퓨터를 켰다. 하루의 마무리로 온라인 음악 감상 카페에 들어가 그 날 올라온 뮤직비디오들을 감상했다. 라디오헤드? 분명 낯익은 이름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와 이들의 만남이 이렇게 긴 여정이 될 줄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이렇게 나와 이들의 운명적인 만남은 시작되었다.                                     


RADIOHEAD? RADIOHEAD!!!


라디오헤드? 어디선가 들어본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고... 혹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의 예측이 맞다면 지금 CD 3번 트랙을 먼저 들어보자. (말투가 건방져도 이해 바란다. 컨셉이다^^) 분명 어디선가 들어봤으리라, 감히 확신한다. 이 노래는 라디오헤드의 존재를 전 세계에 알린 기념비적인 노래지만, 팬의 입장에서 보면 뭔가 아쉽고 조금 얄밉기까지 한 노래다. 불행히도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이 라디오헤드를 'Creep을 부른 밴드'로만 기억하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이런 글을 쓰게 된 경위가 궁금해질 것인 즉, 한 장 짜리 불법(?) 앨범 달랑 내밀고 당신도 이들을 좋아해 주기를 강요하는 바는 아니다.


살다 보면 나만 알고 있기엔 아까운 것들이 있다. 길을 걷다 제일 먼저 발견한 무지개처럼... 나에게 라디오헤드가 그렇다. 우연히 무지개처럼, 나만 알기 아깝고 아름다운 음악을 만났다. 누구나 좋아하는 무지개처럼 듣는 이들 모두 이들의 음악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 CD를 듣는 그들 중 누군가는 나처럼 이들의 음악을 무지개보다 더 좋아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그 누군가를 위해 나만 알기엔 아까운 그들을 소개한다.      


WARNING


이들의 음악은 슬프고 우울하고 무겁다. 때론 처절하다. 이런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가?

그래도 들어봐라. 나도 그랬다. 이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듣다가 안 맞는다 싶으면 안 들어도 좋다. 어차피 대부분의 사람이 좋아하는 건 세상에 그리 많지 않고 또 그걸 바라는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제일 처음에 말했지 않나? 지극히 주관적인 글이라고...^^


가끔 이유 없이 기분이 가라앉을 때가 있지 않은가?  혼란스러운 감정에 휩싸였을 때 마음을 가라앉혀줄 뭔가가 필요할 때가 있지 않은가? 아니, 쉽게 가자. 슬플 때 신나는 음악을 듣는가? 슬픈 음악을 듣는가?

슬픈 음악을 듣는다면, 그리고 나의 물음들에 공감하고 있다면, 당신은 라디오헤드의 음악을 좋아할 가능성이 많은 사람이다. 슬프거나 우울할 때 이들의 음악을 들어라. 라디오헤드가 당신을 도와줄 것이다.

세상에 치유되지 못할 상처란 없다.


부작용 - 극도로 우울할 때 들으면 사람에 따라 자살 충동 발생할 수 있으니 알아서 처신하시오^^;     


ARE YOU READY?


당신은 이제 라디오 헤드라는 잠수함을 타고 감정의 바다를 항해할 것이며 아마도 도착지는 감정의 저 밑바닥이 될 것이다. 불편하다면 중간에 내려도 좋다.

준비가 되었다면...

지독한 슬픔, 이유 모를 공허함, 꿈을 꾸는 듯한 나른함, 안개에 싸여 그 너머가 궁금해지는 신비로움과 구름 위를 거니는 듯한 약간의 환각.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감싸 안을 한줄기 빛을 향해 항해를 시작하자.




BEST ALBUM Review


1. NO SURPRISES


내가 세상에서 젤 좋아하는 노래이다. 지독한 불면증에 아무 생각 없이 열어본 뮤직비디오가 내게 준 충격이 내가 이들을 좋아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렇다.‘이른 새벽, 컴퓨터를 켜고 아무 생각 없이 클릭했던’ 뮤직비디오, 그때 들었던 노래가 바로 이 노래다. 그리고 지금, 그때 나 자신의 선택에 감사한다.  


나와 이들의 첫 만남은 이렇게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 (creep이 워낙 유명해서 이들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땐 만남보단 스침이란 표현이 맞을 거 같다^^;) 처음 뮤직비디오를 봤을 때만 해도 시작 부분의 멜로디만 듣고 연주곡인 줄 알았다. 뮤직 비디오의 정체모를 불빛들을 보고는 더욱 그랬다. 하지만 잠시 후 들려온 슬픈, 아니 슬프다 못해 처절한 목소리. 바로 그때, 내가 보고 있던 뮤직 비디오에서는 짝짝이 눈을 가진 한 남자(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보컬 톰 요크였다)가 너무나도 슬픈 표정으로 수조 속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수조는 점점 물로 가득 찼고, 급기야 물은 얼굴까지 차올라 이제 숨을 쉴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 남자는 고통스러운 듯 보이지만 노래는 계속된다. 호흡의 한계에 다다르자 극도의 고통 속에 일그러지는 남자의 얼굴.

하지만 다행히도 잠시 후 수조 속의 물은 내려갔고, 고통 속에서 노래를 부르던 남자는 점차 평온을 되찾으며 노래를 이어간다. 뮤직비디오가 끝나자 백만 볼트짜리 전율이 나를 감쌌다ㅜ.ㅜ 그 후로 아마 수 천 번은 더 들었을 거다. 처음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노래 전체를 관통하는 차가운 멜로디(처음엔 키보드 소리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기타로 내는 소리이다)는 정말이지 지겹게 들었지만 들어도 들어도 지겹지가 않다.      


이해할 수 없었던 뮤직비디오 속 남자의 그 표정은 이 노래가 죽기 직전(정확히 말하면 자살 직전)의 환각 상태를 표현한 노래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에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그 남자를 보며 생각했다.

‘자살을 앞둔 사람이 마지막으로 노래를 부른다면 아마 저런 모습이 아닐까?’  

자신에게 닥칠 미래를 아는 듯 극도의 불안감과 슬픔을 머금은 눈동자. 물이 차오를수록 죽음의 공포 앞에 그 슬픔의 강도는 더해진다. 그는 생각한다. 너무 힘들지만 내가 선택한 일이다. 지금처럼 사는 것보다는 낫겠지... 하지만 극심한 고통 앞에 자살은 결국 실패하고 다시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새로운 이상향을 그리며 끝을 맺는다.

(보컬 톰 요크는 가사에서 어떤 놀라움도 없기를 노래하고 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영국의 주력 음악잡지 NME는 이 노래가 들어있는 「OK COMPUTER」 앨범을 ‘지금까지 나온 모든 록 앨범들 중에서 가장 놀라운 앨범’이라 평가하며 앨범 완성도 10점 만점에 10점을 주었다.)      


a handshake with carbon monoxide

일산화물과의 한 번의 조우

no alarms and no surprises (x3)  silent(x2)

그 어떤 불안이나 놀라움도 없기를 고요하기를...      

this is my final fit my final belly ache     

이것은 나의 마지막 발작.. 나의 마지막 불평..  

such a pretty house and such a pretty garden

그토록 아름다운 집과 아름다운 정원..      

no alarms and no surprises(x3)   please..

어떤 불안도 충격도 없기를.. 제발..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많은 놀라운 일을 겪는다. 그 놀라운 일이 기분 좋은 놀라운 일이라면 다행이나, 항상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다. 기뻐서 놀라운 일은 쉽게 잊히나,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고 그래서 더 크게, 더 깊이 마음속에 박히는 건 '좋지 않은' 놀라움이기에... 기분 좋은 놀라움은 마음속에 와 닿을 뿐이지만, 좋지 않은 놀라움은 마음속 깊이 박혀 나갈 줄을 모른다.

그래서 톰은 노래한다. 나는 공감한다.  NO SURPRISES...

그래. 그 어떤 놀라움도 없기를...


2. FAKE PLASTIC TREES


슬픔을 머금은 서정적인 멜로디. 톰 요크의 가녀린 보컬은 이와 얼마나 잘 어울리는가? 슬퍼서 슬픈 건지, 슬퍼서 아름다운 건지, 아름다워서 슬픈 건지, 이것도 아니면 슬프도록 아름다운 건지...? 아직도 무엇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모든 미사여구를 갖다 붙여도 아깝지 않은 노래임에는 틀림없다. 지금 나의 문장력으로는 이 노래에 대한 느낌을 딱 잘라 표현할 수식어가 없다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가사를 보면 가짜 플라스틱 나무, 가짜 플라스틱 사랑, 합성수지 인간, 성형 수술...

가사랑 대량 소비 시대랑 어떤 관련이 있다는 건지..? 가사도 그렇고, 멜로디만 들어보면 멜랑콜리(?) 러브 송으로 딱 어울릴 듯한 것이 아무래도 사랑에 대한 노래 같은데.. 사실, 나도 궁금하다. 가사가 너무 철학적이라 해석 불가능^^; 그냥, 조용히 눈을 감고 음악에만 귀 기울여보자. 가짜가 판치는 세상, 그러나 감동은 오리지널이다.      


3. CREEP


이들의 데뷔 앨범 「PABLO HONEY」에 수록되어 있으며 영화 ‘씨클로’에 OST로 삽입되면서 국내는 물론 전 세계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영국 음반시장에 처음 데뷔했을 당시에는 차트 TOP 75에도 못 미쳤고 라디오에서조차 외면당했다. 실제로 영국의 라디오 방송국 radio 1은 노래가 너무 우울하다며 단 두 번만 틀고 곡 목록에서 제외시켰다고 한다. 지금이야 라디오헤드 류의 음악이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아  coldplay, muse, travis, starsailor 등(그래서 이들은 싫든 좋든 ‘제2의 라디오헤드’라고 불린다) 수많은 브릿팝 밴드들이 이들의 영향 아래 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라디오헤드 같은 음악을 하는 밴드는 드물었으니까.


톰은 이 곡을 쓸 때 8개월 동안 집착증에 시달렸고, 곡에 나오는 '그녀'는 자신이 이 곡의 주인공이라는 걸 알 것이라고 말했다. 가사의 뜻에 대해서는 많은 설이 있었지만 톰이 공연에서 말한 부분적인 설명에 따르면, 이 곡은 톰이 Exeter 대학에 다닐 때 쓴 것으로, 좋아하는 여자가 있어 관심을 끌어보려고 하지만 자신감 부족으로 실패하는 한 남자 학생에 대한 얘기라고 한다.


아직까지도 라디오헤드 최고의 히트곡이자, 오늘날의 라디오헤드를 있게 해 준 고마운 곡이지만 정작 멤버들은 이 노래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 노래 하나로 자신들의 음악이 규정지어지는 것이 싫었으리라(아님 말구^^) 이 곡을 녹음할 때, 밴드는 녹음테이프가 돌아가는지도 몰랐으며 다른 곡을 하기 전에 연습으로 연주했다고 한다. 절정 부분의 기타 파열음도 사실은 이 곡을 맘에 들어하지 않았던 기타리스트 조니가 곡을 망치려는 의도로 그랬다는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결과적으로 그 파열음이 지금의「creep」을 만들었다.     


4. YOU NEVER WASH UP AFTER YOURSELF


「MY IRON LUNG」 EP 앨범에 수록된 곡. 정규 앨범 수록곡이 아니다 보니 싱글 커트되지도 않았고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노래도 아니지만 이상하게 처음 들을 때부터 끌렸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지만 나한테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것들. 살다 보면 가끔씩 이런 것들이 있지 않은가? 이 노래가 나에게 그런 의미이다. 2분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이런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이 주위에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어쿠스틱 기타 반주를 자세히 들어보면 하나의 멜로디가 계속 반복되고 있다. 단조롭게 반복되는 기타 멜로디 속에 이런 슬픔을 녹여내는 일은 그런 슬픔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톰의 보컬을 들으면서 감싸주고 싶은 보호본능을 느끼는 건 아마도 이 때문이 아닐까.     


5. KARMA POLICE


Karma Police라는 말은 밴드가 공연하는 도중 한때 사용했던 캐치프레이즈였다. 누군가 바보같이 행동하면 Karma Police가 언젠가 너를 잡아갈 거라고 말해줬다고 한다. 앙갚음의 뜻보다는 네가 행동한 대로 받을 거라는 사실을 장난스럽게 말한 거라고. Karma는 힌두교나 불교에서 운명과 업보를 뜻하는 말.

라이브에서 더 빛을 발하는 트랙이다. ‘음악에 젖어있다’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톰의 노래 부르는 모습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불가침의 영역으로까지 느껴진다. 눈을 감고 이 노래의 후렴 부분(this is what you get~)을 관객들과 함께 부르는 모습은 감동 그 자체다. 출렁이는 감동의 물결에서 나도 같이 헤엄치고 싶으나 우리나라에 와야 말이지. 한국에 절대 오지 않는 밴드 1위 라디오헤드. 조만간 우리나라도 와 주기를..

(2012년 드디어 첫 내한 공연을 했고, 당시 호주에 살던 나는 대한민국으로 날아와 그들을 영접했다. 처음 등장하자마자 울었다) 다이하드의 라스트 신(scene)을 연상시키는 뮤직비디오 마지막의 사랑스러운(?) 반전에 올인!     


6. NICE DREAMS


잠자기 전 눈을 감고 들을 것! 반드시 눈을 감고 들어야 한다. 듣고 있으면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몽롱한 환각을 느낄 수 있다.

이런 게 플라시보 효과 (약의 성분이 아닌 약을 먹었으니 나을 거라는 기대가 효과를 일으키는 현상. 약국에 가서 수면제를 달라고 했을 때 약사들이 그냥 소화제를 주어도 그 약을 먹은 사람은 수면제라는 믿음 때문에 잠이 잘 오게 되는 것도 일종의 플라시보 효과라고 한다) 일까? 이 노래를 들으면서 자면 잠이 잘 오는 거 같다. 음악도 이럴 땐 건강한 마약이다. 듣다가 잠들면 하늘에 떠다니는 꿈을 꿀 것만 같다.

오늘 밤도 Nice dream~ Nice dream~


7. HIGH AND DRY


톰 요크는 시끄러운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 나이 든 사람들을 위한 곡이라고 자주 말해왔다. 어쿠스틱 기타와 드럼이 조화를 이루면서 곡의 분위기를 이끌고 있으며 미세하게 떨리는 톰의 가성이 매력적이다.

Don't let me high~ Don't let me dry~~~ (날 버리고 가지 말아 줘)

이렇게 애절한 보컬을 누가 버리고 갈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어린 왕자도 일찍이 말한 바 있으나 톰의 감성이라면 어렵지 않을 거 같다. 내 마음은 움직인 지 오래됐다.


8. JUST


라디오헤드 음악 중에서는 ‘쎈’ 음악에 속한다. 이 곡이 수록된「THE BENDS」 앨범을 살펴보면 전반적으로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 이따금씩 터져 나오는 시원한 질주가 슬픔의 완충역할을 해주고 있는데 이 곡도 그중 하나이다.「THE BENDS」는 영국 음악지 NME로부터 ‘90년대 나온 모든 락 앨범들 중 가장 완벽한 앨범’이라 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뮤직비디오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도 유명하다. 길거리에 쓰러져 있던 남자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일으키려 하지만 그는 강하게 거부한다. (라디오헤드, 건물 방 안에서 이 곡을 멋지게 연주하다 방 밖으로 힐끔 쳐다보면서 잠시 등장^^) 그 남자에게 계속 일어나라고 해도 신경 쓰지 말고 제발 가 달라는 답변뿐이다. 마침내 경찰까지 나서는데 그 남자가 한 마디를 하자 거기 있던 모든 사람이 쓰러진다.


이 남자가 뭐라고 했는지는 팬들의 오래되고 집요한 궁금증이었지만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뮤직 비디오 감독은 ‘알게 되면 비디오의 충격이 떨어지고, 그 남자처럼 도로에 눕고 싶을 것’이라고 말했다. 안 가르쳐 줄 거면서 왜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감독의 의도를 고려하여 추측컨대, 다 누우면 그때 일어나겠다고 말한 건 아닐까?^^   


조니의 카랑카랑한 기타가 귀에 감기는 My iron lung


9. MY IRON LUNG


음악과 거리가 먼 표현이라는 걸 알지만 이 곡을 들을 때마다 ‘멋있다’라는 단어가 젤 먼저 떠오른다. 내 걸음걸이마저 그 리듬에 맞춰버릴 정도로 인상적인 시작 부분의 기타 리프를 비롯하여 중독성 강한 멋진 기타 연주가 가득하다. 보컬과 기타가 분노에 찬 듯 갑자기 질러대는(?) 부분도 좋다. 톰이 가지고 있던 보컬 문제 때문에 Reading Festival에서 나가 줄 것을 요구당한 날 쓰인 곡이기 때문에 가사는 매우 절망적이다.


가사를 잠시 살펴보면,  

- 이게 우리가 새로 만든 노래. 지난번 노래하고 똑같을 뿐이지만. 완전히 시간만 낭비한 셈인가. 철제 호흡 보조기가 필요해 -


그래서 제목이 my iron lung(철제 호흡 보조기)인가 보다. (난 철로 된 폐인 줄 알았다__:)

다른 버전으로 톰과 기타리스트 죠니가 단 둘이서 어쿠스틱 기타를 치며 부르는 버전도 있는데 이것도 강력 추천! 남자가 봐도 반한다(>. <)      


10. STREET SPIRITS(fade out)


팬들의 영원한 애청곡이다. 최면을 일으키는 듯한 에드의 완벽한 아르페지오 기타 연주와  톰 요크의 절규가 만나 절제된 슬픔의 아름다운 조화를 만들어낸다. 비 오는 날 들으면 상황에 따라 환각효과가 나타난다.

이 노래를 이야기함에 있어 한 편의 예술작품으로 평가받는 뮤직비디오를 빼놓을 수 없다. 정지와 움직임을 절묘하게 편집해 뛰어난 영상 미학을 보여주는 뮤직비디오는 외팔(힘없고 왜소한 자기 자신을 상징하는 듯)의 톰이 하늘을 향해 힘껏 도약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데, 이는 아마도 힘없는 한 인간의 거친 세상을 향한 비상을 표현한 것이리라 추측해본다. 그래서 그의 절규가 메아리 없는 외침으로 느껴지는지도.


라이브에서 항상 제일 마지막에 부르는 이유에 대해 톰 요크는 이렇게 말했다.      


'라이브에서 이 노래를 마지막으로 부르는 이유는 매번 연주할 때마다 나를 소모시키고, 흔들고, 지옥같이 고통스럽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 노래의 진짜 의미(악마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것에 대한 것)를 잊은 채 웃고 환호하는, 마치 개가 꼬리를 흔드는 것 같은 관중들의 모습은 내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난 이 곡을 쓰지 않았어요.'


천재들은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갈까? 얼굴 잘 생기고 노래 잘 부르고 기타 잘 치고 피아노 잘 치고 음악 창작력은 말할 것도 없고. 신은 그에게 너무 많은 능력을 준 것을 실수라 판단해서 일부러 불완전한 영혼을 주신 게 아닐는지.. 역시 세상은 공평하다.      


오늘의 유행인 것이 내일은 쓰레기다. 나는 감정의 쓰레기장이다.    - 톰 요크 -     


11. AIRBAG


가까스로 자동차 사고를 피하고 살아있음을 느낄 때의 기쁜 심정을 노래한 곡이라고 한다.

여기서 잠시 보컬 톰 요크의 에어백에 대한 생각을 들어볼까?     


'에어백이 내 목숨을 구한 적이 있었을까? 아니..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둬. 매번 가까스로 사고를 피했을 때, 그냥 안도의 한숨을 쉬고 계속 가기보다는 , 차를 세우고 도로를 뛰어가면서 " 살았다! 난 살았다고! 오늘 난 새 삶을 얻었어!"라며 외쳐야 할걸. 솔직히 우리는 매번 차에서 내릴 때마다 그래야 해. 우린 그런 것들을 타고 다닌다고.. 정말로 우리 손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닌..'      


톰 요크는 자동차에 대한 이유 없는 공포증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글만 보더라도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태도로 자동차를 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사람이 이런 말 하면 이상하게 볼 거 같은데 톰이니깐 이해가 간다^^ 어쨌거나 여러 대의 기타 사운드가 뒤엉켜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며「Ok computer」 오프닝 트랙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Ok computer」에서 라디오헤드가 당신의 감정에 날리는 첫 번째 펀치!      


12. EXIT MUSIC


로미오와 줄리엣(디카프리오 나온 판)의 제작자로부터 영화가 끝난 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쓸 배경음악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만든 곡이다. 줄리엣이 권총을 머리에 가져가는 장면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톰의 애절한 보컬이 심금을 울린다. 특히 중반 이후 터지는 클라이맥스의 절규는 처절하기까지 하다. 로미오가 줄리엣이 죽어가는 실제 상황에서 이 노래를 부른다면 비슷한 느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감정이입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한 가지 결정적으로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노래가 영화 장면에 삽입되지 않고 엔딩 크레딧으로 쓰였다는 점. 기타리스트 에드의 말을 빌리자면 이렇게 좋은 노래가 영화 끝날 때 나와서 사람들의 의자 접는 소리와 경쟁을 해야 한다는 점이 가장 나쁘다고... 가사는 시처럼 함축적이라 언뜻 이해가 안 되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의 내용을 알고 본다면 이해가 한층 쉬울 것이다.   

  

『 로미오는 줄리엣과 같이 도망을 친다. 둘을 반대하는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줄리엣은 아프다. 곧 죽을 것만 같다. 숨을 쉬어요. 나 혼자선 이 일을 할 수 없어요.

노래를 불러요. 죽지 않도록 노래를 불러요. 하지만 결국 줄리엣은 죽는다.

로미오도 결국 여자를 따라 죽고... 로미오는 그들 둘을 죽게 만든 사람들을 원망한다.

당신들이 정해놓은 규칙과 자유. 그 규칙에 눌려 숨 막혀 죽어버려라. 』              

                      

- 가 사 -

꿈에서 깨어나요. 메말라가는 당신의 눈물에서도 벗어나요.

오늘 우린 탈출하는 거야. 여길 빠져나가는 거야. 짐을 싸고 옷을 입어요.

당신의 아버지가 눈치채기 전에 그 모든 귀신들이 다 쏟아져 나오기 전에

숨 쉬어 봐요. 계속해서 숨을 내 쉬어요

용기를 잃으면 안 돼. 숨 쉬어요. 계속 숨을 들이마셔요.

나 혼자서 만 계속해 나갈 수는 없어요.

우리에게 노래해 주세요. 우리의 온기를 유지시켜줄 그런 노래 하나만....

그 차가운 냉기.. 너무 차가워... 차가워....

웃으려면 웃어요 의미라곤 없는 공허한 웃음을 말이야.

당신의 규칙과 지혜란 것들이 당신을 질식시키기를 바랄 뿐

이제 우리는 하나가 되었어. 영원한 평화 속에서

당신이 질식하기를... 당신이 질식하기를...      


13. LET DOWN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는 듯한 중독성 강한 기타 멜로디와 톰의 흐느적거리는(?) 보컬(마땅한 표현이 없다. 또다시 표현력의 한계;;)이 다시 한번 그들만의 몽환적인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대개 브릿팝 밴드들의 음악이 그렇듯, 흐린 날이나 비 오는 날에 들으면 감동이 배가된다. 영국의 일 년 날씨 중 절반 이상이 흐린 날씨라는 사실이 브릿팝의 슬픈 감수성을 설명하는 열쇠가 되지 않을까. 비가 오면 마음이 가라앉는 건 누구나 다 똑같을 테니...


이 노래만 들으면 몽유병 환자가 생각난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디론가 끌려가는 몽유병 환자. 어둡거나 약간 안개가 꼈을 때 길거리를 걸으면서 들으면 이와 비슷한 느낌이다. 최면에 걸려 자석처럼 어디론가 끌려가는..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몽유병 환자는 진짜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는 거. 하지만 나는 어디로 가는지는 안다는 거^^

사족. 마지막에 나오는 정체불명의 전자음(?)은 70년대 멤버들이 가지고 있던 컴퓨터에서 만들어진 소리라고....     


14. TRICKSTER


데뷔 앨범 「PABLO HONEY」와 두 번째 정규 앨범 「THE BENDS」 사이에 발표된 EP 앨범 「MY IRON LUNG」에 수록된 곡. 사람들은「THE BENDS」 앨범을 통해 이들의 음악 정체성이 자리를 잡았다 생각하지만, 데뷔 시절의 풋풋함에서 벗어나 이들의 음악적 색깔이 확연해지기까지, 그 사이에 바로 이 EP 앨범이 있었다.    

다행히 우울한 노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럴 뿐, 가끔은 이렇게 느낌 좋은 상큼한(?) 노래도 있다. 너무 많이 가라앉았나? 이제 희미하게 도착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서 잠시 쉬어가자.

Hey~ Hey~ Hey~     


15. CREEP (ACOUSTIC VERSION)


「creep」의 어쿠스틱 버전. 멤버들이 싫어한다는 노래를 굳이 두 가지 버전으로 넣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있었으나 정작 중요한 건 듣는 사람의 느낌이다. 가장 대중적인 곡이기도 하고 어쿠스틱 사운드가 주는 꾸밈없는 매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장미라 불리는 저 꽃도  이름이 어떻게 달라지든 그 향기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 「로미오와 줄리엣」 중


이 곡도 조금 다르게 연주한들 그 감동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보너스 트랙으로 마지막에 넣으려 했으나 반드시 마지막에 들어가야만 하는 노래가 있어 어쩔 수 없이 여기에 넣었다. 대신, 이번엔 가사랑 같이 들어보자. 전 세계 음악의 한 흐름을 주도하는 톰 요크도 여자 앞에서는 이렇게 작아진다. 하긴,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인 거 같다.     


16. A WOLF AT THE DOOR


작년에 발표된 6집 앨범의 마지막 트랙으로, 2집과 3집의 분위기로 회귀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때문에 4집과 5집에서의 파격적인 실험성에 적응을 못했던 팬들이 가장 반겼다. (여기서의 팬은 모든 팬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4집과 5집에서의 변화에 적응을 못했던 일부 팬들을 지칭한다)


톰 요크의 읊조림은 나를 다른 세계로 이끌어내려는 주문처럼 들리기까지 한다. 들으면 들을수록 어디론가 빠져드는 느낌. 그러나 거부할 수 없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영화 흑백 장면의 삽입곡으로 쓰면 잘 어울릴 것 같다. 주인공이 서서히 죽어가면서 점점 희미해지는 영상에 넣으면 딱 어울릴 거 같지 않나? 계속 듣고 있으면 환각 증세가 나타날지도 모르니 너무 오래 듣지 말 것^^      


17. MOTION PICTURE SOUNDTRACK


제2의 「THE BENDS」,「OK COMPUTER」를 기다렸던 팬들에게 4집 앨범 「KID A」는 실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4집 앨범의 모든 작업을 마쳤다. 나는 지금 산책하러 간다’며 창작의 고통을 넌지시 내비쳤던 톰 요크와 멤버들은 모든 이들의 예상을 깨고 그 결과물로 차가운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세상에 내놓았다. 진보적이면서 실험성 강한 음악에 사람들은 이들의 예상치 못한 변화를 환영하는 사람들과 예전의 라디오헤드를 그리워하는 사람들로 나뉘었지만 그들 모두 한 가지 생각에는 동의할 것이다. 이들의 음악적 창작력의 끝은 어디일까. 다음에는 어떤 변화를 시도할까.    


듣다 보면 어떤 의도인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갭이 있어, 어쩔 수 없이 마지막 곡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났다. 낡은 오르간 소리와 전자음, 또다시 흐느적대는 톰의 목소리, 정체불명의 여성 소프라노(?).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여러 가지 소리가 서로 뒤엉켜 ‘음악’을 만들어냈다.      


EPILOGUE


자, 여기까지... 지극히 주관적이고 졸라 건방진 글을 읽느라 수고했다. (마지막도 건방^^;)

세상을 살다 보면 인연이란 게 있긴 한 것 같다. 우연으로 시작된 나와 이들의 만남도 이젠 필연처럼 다가오는 걸 보면... 스무 살 즈음에 처음 만난 라디오헤드, 하지만 그때 이들을 처음 만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이들을 한 번은 만났을 것이고, 그때도 아마 지금처럼 좋아했을 것이다. 그 시기가 늦어지고 처음 만나게 되는 상황이 다를 뿐, 언젠가는 어떻게든 만났을 것 같은, 우연 같지만 만난 후엔 돌이켜보면 필연처럼 다가오는 것... 이런 게 인연 아닐까?

비록 당신과 이들과의 만남은 '억지로 만든 우연'이지만 부디 인연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작가의 이전글 오직 셋을 위한 우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