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되지 못한 나날들 - 전염병 시대를 위한 즉흥곡
시속 80km로 달리는 승용차의 창밖으로 스쳐가는 풍경을 본다. 기억하지 못한 시간 속에서도 이 풍경은 늘 존재했었다. 낙엽이 진 자리 혈맥처럼 하늘을 향해 솟아나는 메타세쿼이아. 그 너머 가로막힌 철조망, 회색의 콘크리트 장벽 너머로 보이는 파란 하늘, 그 사이로 질주하는 듯 보이는 가로등과 전깃줄, 기분 탓인지 생동감 없었던 길 밖의 뻔한 풍경들을 문득 기억해야겠다고 느껴 나는 핸드폰 카메라를 켰다. 하루가 지나고 그 영상을 봤을 때 나는 이 풍경이 아름답지도 기억해야 할 순간이라고 느끼지도 않았다 그것은 그냥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보았던 차창 밖의 풍경이었고, 이 순간은 기억할만한 어떠한 특별한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코로나가만들어낸 지난 2년간의 시간도 이 차창 밖 풍경처럼 지나갔다. 뜻대로 되지 않았던 상황은 늘 즉흥극을 하듯 멈췄다가 갑자기 시작하기를 반복했고, 나는 즉흥적으로 무대에 서서 어떻게든 이 순간이 지나가기를 기원하는 배우처럼-내가 하는 다음 행동 다음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체 내일을 맞이했다. 해야 할 일의 끝은 주어져있지만 그 과정은 늘 이런 식의 연속이었다.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일들의 연속, 그 속에서 갈팡질팡하며 느슨한 일상이 팽팽하게 당겨지길 반복하며, 어떻게든 다음을 준비하지만 늘 그 준비와는 상관없는 전혀 다른 상황 속에 내던져질 뿐이다. 언젠가 이렇게 지나간 날들이 돌이켜본다면, 이 날들을 우리는 기억할 수 있을까? 기억은 그렇게 불과 몇 시간 전의 일 조차도 추상의 영역으로 넘겨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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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신비주의자 구르지예프는 그의 회고록에서 어린 시절 전설 속에 샐러맨더(불도마뱀)를 목격했다고 한다. 그리고 상황을 함께 목격한 그의 아버지는 어린 구르지예프의 뺨을 내갈겼다. 평생 아버지는 폭력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고, 그를 때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아버지의 느닷없는 행동에 구르지예프는 불도마뱀을 발견했을 때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는 말했다 평생 이 순간을 잊지 말라고.
커트 보니것은 <제5 도살장>의 프롤로그에서 도시가 초토화되었던 드레스덴 대학살의 생존 경험에서 온 기억이 너무 강렬했기에, 이를 그대로 소설로 옮기는 것은 너무도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고 수 십 번의 수정, 그리고 뒤엎기를 반복한 끝에 <제5도살장>을 완성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 드레스덴의 경험으로부터 이 소설을 완성하는데 2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보르헤스는 그의 단편 <기억의 천재 푸네스>에서 기억의 한계에 대해서 언급하며 푸네스라는 절대 기억을 가진 한 소년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는 낙마로 하반신이 마비된 체 평생을 침대에 살아야 할 운명에 처하지만 그의 기억은 더 강하게 작용하기 시작하며, 세상을 새로운 방식으로 인지 하게 된다. 매 초 변화하는 세계를 기억 할 수 있는 그에게 있어 눈앞에 장미는 1시간 전의 장미가 다르며, 좌에서 볼 때와 우에서 볼 때 같은 장미가 아니다. 그 시간만큼 장미는 달라져 있고, 보는 위치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그는 그 각기 다른 장미를 다른 존재로서 인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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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매번 다르게 작용하며 시시때때로 달라지는 변화 속에서 또 다른 인지를 필요로 한다. 우리가 기억을 머릿속 저 깊은 심연으로부터 끌어올릴 때, 내 상황은 매번 다를 수밖에 없고 그 기억을 바라보는 시각 또한 매 순간 달라진다. 이처럼 코로나 바이러스는 엄청난 충격을 모두의 뇌리에 박으며 등장했지만 2년이 지난 지금의 느낌은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린 멈춰버린 일상-그리고 이러한 일상으로부터의 회복을 이야기했지만 지금에 와서 이 문장을 듣는다면 다소 의아해지는 때가 올 것이다. 우리의 일상은 멈춘 적이 없었고 계속 흘러가고 있다. 아니 애초에 멈춘 적이 없었다. 멈추던 순간조차도 우린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다만 모든 조건이 이전과 같지 않다는 사실만이 펜데믹 이전의 나와 현재의 나를 가를 수 있는 유일한 차이점일 것이다.
코로나 이전과 이후가 결코 같을 수가 없는 부분은 바로 여기에 있다. 집단의 생활보다는 나라는 개인에게로 향할 수밖에 없는 격리되고, 방역 수칙에 의해 행동이 관리되는 사회 구조 속에서, 내면은 타인보다는 자신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이 속에서 나는 무수한 기억 속을 헤매며 점점 더 깊어져 가는 그리움을 느낀다. 이제는 영원히 같을 수 없는 것들을, 그리고 이렇게 사라져 버린 많은 것들을 잡으려 애쓰며 헤매는 밤이면, 나는 늘 설명할 수 없는 기분에 취하면서 동시에 메울 수 없는 허전한 마음의 심연을 동시에 느낀다.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을 하다 보면 어느덧 밤은 깊어가고 잠깐 눈을 붙이면 다가오는 다음 날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생각은 늘었고 일상은 무미건조하며, 또 다시 반 복 될 하루를 피곤한 기분으로 맞이한다. 그리고 고요하게 다가오고 있는 끝을 기다린다. 물론 이것은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새로운 시작을 위한 끝을 기다릴 뿐이다.
때로는 이렇게 무미건조하게 텅 비어버린 마음으로 맞이하게 될 다가올 미래가 두렵기도 하다. 이렇게 긴 시간 동안 고독이 할퀴고 지나나 간 자리를 채울 것이 무엇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기 때문에. 결코 모든 것이 이전과 같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막연한 기대를 지우기란 어렵다. 늘 비슷하지만 같지 않을 무언가를 기다리며, 나는 매일 최고점을 갱신하고 있는 확진자 수치를 지켜본다. 숫자는 높아지지만 이전처럼 놀랍지는 않다.
일어나는 모든 일에 막막한 불안감을 가지며, 이 또한 기억되지 못한 나날의 일부가 되어 우리의 머릿속에 사라져 간다. 나는 이렇게는 견딜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빠르게 적응했고, 이제는 이 지겨운 상황에 순응할 수 있게 되었다. 공존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양극성은 시간을 타고 우리의 삶을 끌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동안 잊어버리고 있던 많은 것들이 다시 나에게 되살아난다. 빠르게 생성되면서 밀려났던 과거의 소중한 기억들이 이제는 나와 같이 서있는 느낌을 받는다.
인생에서 나를 채우고 있던 커다란 무언가가 빠져나간 자리를 이제는 혼자서 채워야 한다 .그렇다고 내가 혼자라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우리는 누군가와 함께 기억을 만들어가고 있고, 이것은 곧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에, 꼭 기억해야만 잊혀지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기억 그 자체로 인생의 의미를 찾는다. 그렇기에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결국 기억이 쌓여가는 퇴적층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