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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철홍 Jun 20. 2022

'양'이라는 영화가 박물관에 전시된 이유에 대하여

영화 <애프터 양> 비평


씨네21 1359호에 오랜만에 비평 글을 썼다.


그동안 약간의 개편이 있었는지 비평 글 기본 분량이 바뀌어 있었다. 원래 200자 원고지 기준 18매의 글을 보냈었는데, 이번엔 15매의 글을 보내달라고 하셨던 것. 줄어드는 숫자가 참 상징적이군요, 하는 식으로 글을 이어가기는 좀 뻔한 것 같고.


아무튼 그래서 꾸역꾸역 압축해서 마감을 보내긴 했는데, 이건 내가 읽어도 잘 정리되지 않은, 분량 조절에 실패한 글처럼 느껴졌었고 아니나 다를까 빠꾸당했다. 결과적으로 아예 한 페이지를 더 할당받아 24매짜리 글을 적었다. 그 과정에서 꽤 많이 고쳐 쓰고 덮어쓰기 한 글. 마치 양의 기억 조각들처럼. 그나저나 몇 번 쓰지도 않았는데 18매라는 숫자에 꽤 익숙해졌었던 것 같다. 15매는 너무 너무 짧게 느껴지고, 24매는 왜 이렇게 도달하기 힘든 곳처럼 보이는 것일까. 달리기할 때 매번 5km만 달리고 뚝 멈춰버리는 나에게 15매는 3km 같고 24매는 7km 같다. 3km 뛰면 더 쉬운 거 아니냐 하고 말씀하신다면 이건 그냥 비유에 실패한 겁니다.


씨네21 링크(http://www.cine21.com/news/view/?idx=6&mag_id=100302)



'양'이라는 영화가 박물관에 전시된 이유에 대하여


코고나다 감독이 연출한 <애프터 양>의 오프닝 시퀀스는 새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새로운 것은 아니다. 한 다문화 가족이 가족사진을 찍고 식사를 한 뒤, 함께 춤을 춘다. 경쾌한 전자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다양한 4인 가족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영화가 시작될 때, 분명 처음 접한 비주얼이 ‘신선하다’는 감상을 줌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 까닭은 단순하다. 오프닝의 춤을 본 순간 비슷한 시기에 공개된 같은 감독의 작품 <파친코>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나친 끼워 맞추기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쯤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댄스 시퀀스가 끝나면 약간의 작동 오류, 즉 춤을 멈춰야 할 때 멈추지 못하는 증상을 보였던 안드로이드 양(저스틴 H. 민)이 갑자기 작동을 멈춘 상태로 한 남자의 어깨 위에 들려 있다. 영화 도입부에 움직임을 멈춘 가족의 형상이 나타나자, 앞서 고민했던 끼워 맞춤이 오류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독의 전작 <콜럼버스> 역시 가족(아버지)의 쓰러짐으로 시작되는 영화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두 영화 모두 그 후 남겨진 사람들이 그 쓰러짐의 의미에 대해 추적해나가는 방식으로 전개된다는 점에서, <애프터 양>이 새로운 와중에 꽤 익숙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한 감독이 자신의 작품에 있었던 무언가를 빌려와 새 영화를 만드는 행위가 나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어떻게 변주했는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애프터 양>에서 코고나다의 변주는 인상적이었다. 사실 글의 첫 문장에 썼던 ‘새로워 보이지만 새롭지 않다’는 말은, 뒤집어보면 오히려 칭찬에 가까운 말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코고나다는 ‘새롭지 않은 것을 새롭게 보이게’ 만드는 감독이며, <애프터 양>은 그런 그의 장점이 또 한번 발휘된 영화라고 생각한다. <콜럼버스>와 <파친코>를 통해 꾸준히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를 해왔던 코고나다는, 이번엔 가상의 도시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 현실’을 창조하면서까지 변주를 시도한다.


질문을 이어가는 영화

앞서 언급한 ‘춤’에 대해서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애프터 양>의 춤 역시 당연한 말이지만 <파친코>의 춤과는 다른 점이 있다. <파친코>에서 인물들이 추는 춤은 각자 자신이 추고 싶은 대로 추는 자유 춤에 가까운 반면, <애프터 양>에 나오는 춤은 엄밀히 말해 춤이라기보다는 서로의 실력을 겨루는 스포츠에 가깝다. 가족들은 주최자의 구령에 맞춰 같은 동작을 함으로써 경쟁하고, 이에 실패할 시 더이상 춤을 이어갈 수 없게 된다.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양은 계속해서 춤을 춘다. 여기서 춤 ‘대회’를 한 인간과 진짜 춤을 춘 안드로이드가 대조되고, 이 대조는 춤을 추는 행위의 본질에 대하여 생각하게 만든다. 과연 진짜 춤이란 무엇인가, 대회에서 탈락했다 하더라도 지금 이 기분을 가족들과 함께 계속해서 이어가는 것이 진짜 춤의 목적이 아닌가. 이 질문의 답은 중요치 않다. 보다 중요한 것은 영화가 계속해서 무언가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이어간다는 것이다.


<애프터 양>에서 가장 자주 반복되며, 본질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장치가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양과 중국 가정에서 입양된 딸 미카(말레아 엠마 찬드로위자야)가 서로를 부르는 호칭이다. 양은 미카를 ‘메이메이’ (妹妹)로, 미카는 양을 ‘꺼거’(哥哥)로 부른다. 미카는 자신의 아빠와 엄마를 틀림없이 ‘대디’와 ‘마미’라고 부르지만, 양을 부를 때만큼은 중국어를 사용한다. 분명 문화 테크노(문화를 알려주는 안드로이드) 양의 교육을 통해 사용하기 시작했을 이 호칭은, 자연스레 ‘진짜 가족’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이 질문은 영화 속 미카의 플래시백을 통해서 명백히 제시된다. 어느 날 학교에서 ‘진짜 부모’에 관한 질문을 받은 미카는 이 고민을 양에게 털어놓는다. 그러자 양은 미카에게 2종의 나무가 접목되어 새로운 품종의 과일을 맺게 된 한 나무를 보여주며, 두 나무가 모두 중요하다는 말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둘이 평소엔 영어로 대화하면서도 서로를 부를 때만큼은 중국어를 사용하는 이 태도는, 그들이 두 뿌리의 중요성을 늘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은 ‘두 뿌리가 똑같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로봇처럼 한순간에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니 인간은 반대로 그것을 한순간에 해내는 사람을 ‘비인간적’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오프닝의 그 춤 장면에서, 탈락하자마자 신나게 추던 춤을 바로 멈춰버리는 사람과 계속해서 그 춤을 이어가는 안드로이드 중 어떤 존재가 더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영화의 질문이 이어진다. 아니 양의 질문이 이어진다.


영화 중반부, 제이크(콜린 패럴)는 차를 우리다가 양과 함께 차를 우렸던 기억을 떠올린다. 양이 제이크에게 묻는다. “차를 왜 좋아하세요?” 제이크가 질문을 잘 이해하지 못한 채 ‘맛에 관해 묻는 것이냐’고 되묻자, 양이 ‘그렇다면 맛 때문에 차를 좋아하는 것이냐’고 다시 묻는다. 제이크는 ‘비슷하다’고 답하지만, 그것이 차를 좋아하는 이유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제이크는 양에게 어떤 상황을 상상하도록 한다. “넌 숲속을 걷고 있고 땅엔 나뭇잎이 있어. 비가 내리다 그쳐서 공기가 아주 축축해. 이 차에는 그 모든 게 담긴 것 같아.”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차이점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이 장면은 영화의 그 어떤 장면보다 ‘인간다움’이 잘 표현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어지는 대화에서 양은 자신도 차에 관해 더 깊이 느껴보고 싶다며 아쉬움을 표하는데, 양이 제이크의 설명을 들었음에도 아쉬워하는 이유는 “차에 관한 진짜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안드로이드는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못한 것은 이해가 불가능한 존재이고, 반면 인간은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상상을 통해 감각적으로 무언가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인물의 위치 변화

‘두 뿌리 모두 중요하다’, ‘차가 좋은 이유’, ‘인간다움’ 등 <애프터 양>은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추상적인 개념들을 앞서 말한 간접경험의 방식으로 깨닫게 만드는 영화다. 영화는 이질적인 춤과 호칭 등을 통하여 관객의 머릿속에 질문이 떠오르게 만든 다음, 마침내 양의 기억을 스크린에 재생시킨다. 그렇게 우리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다 고장나버린 한 존재의 일대기를 경험하게 된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코고나다가 이번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번 영화가 다루는 것 역시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다만 표현의 방식이 바뀌었을 뿐이다. 이는 같은 구조와 시점을 갖고 있는 <콜럼버스>와 비교해보면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선 <콜럼버스>에 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특히 이 영화는 개봉 당시 영화가 지닌 디아스포라적 측면보다는 아름다운 건축물을 우아하게 담아낸 연출이 더 주목받은 작품이었기 때문에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콜럼버스>는 한국인 진(존 조)과 케이시(헤일리 루 리처드슨)가 극을 이끌어가는 영화다. 영화는 아버지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콜럼버스를 찾은 진과 콜럼버스 거주인 케이시가 함께 도시를 거니는 모습이 주를 이룬다. 부모와 정서적으로 완벽히 이어져 있지 못한 상태의 둘은 ‘부모의 도시’에서 혼란스러워 한다. 그래서 하루빨리 이 도시를 떠나려고 애써보지만 이를 막는 것 역시 가족이다. 그렇게 진은 콜럼버스에 머무는 동안 케이시의 안내로 건축이론가인 아버지가 걸어온 길을 눈으로 확인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케이시 역시 무언가를 깨닫게 된다.


<콜럼버스>가 진과 케이시 두 인물의 비중이 거의 동등하게 그려진 영화인 것은 맞다. 그렇지만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감독 코고나다의 정체성을 생각한다면, 같은 정체성을 가진 배우 존 조의 몸으로 구현된 진이라는 캐릭터에 조금 더 눈이 가는 것은 사실이다. 진은 비록 (배우와는 달리) 한국에 사는 한국인이라는 설정을 갖고 있지만, 그 역시 이주민이 겪었을 법한 혼란을 느끼고 있다. 아버지라는 뿌리와 단절된 삶, 그래서 어디에도 속해 있지 못한 삶을 살아온 이 캐릭터는, 배우와 감독의 정체성이라는 영화 외부의 요인과 결부되어 특별한 감상을 이끌어낸다. 특히 영화 말미에 진은 케이시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회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속마음을 고백하는데, 그러면서 “한국이었다면 가장 슬픈 표정으로 곁을 지켜야 했다”는 말을 한다. 한국인 진이 미국 땅에서 다른 나라 사람의 존중을 받는 아버지를 어떤 나라의 방식으로 떠나보내야 하는지 고민하는 이 모습은, 진(감독)의 고민을 국가적 특성과도 연결시키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이렇듯 <콜럼버스>가 디아스포라적 고민을 부자 관계로 풀어낸 작품이라면, <애프터 양>은 그것을 인간과 안드로이드간의 차이를 통해 그린 작품이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두 작품의 가장 큰 차이점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인물의 위치다. 정확히 말하자면 감독의 페르소나 격인 그 인물의 서사 내 위치가 바뀌었다. <콜럼버스>에서 ‘혼란자’가 스스로 무언가를 깨우치는 주인공의 자리에 있었다면, <애프터 양>에선 반대로 혼란자가 주인공이 이해해야 하는 대상으로 자리를 바꾸었다. <애프터 양>이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코고나다의 성장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이 자리 바꿈에 있다. 정체성의 혼란을 느껴보지 못한 대다수 관객 입장에서, 그 당사자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콜럼버스>는 설득력이 떨어질 수 있음을 감독이 깨달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 깨달음의 결과로 우리는 제3자(제이크) 입장에서 양의 고통을 조금 더 쉽게 헤아려볼 수 있게 된다. 양은 자신의 고통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계속해서 질문하다가, 자신이 소중하게 압축해놓았던 기억을 사람들에게 공유할 뿐이다. 그렇게 양(이라는 영화)은 인간에게 중요한 존재로서 박물관(영화관)에 영원히 전시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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