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랜 75>와 <오키쿠와세계>에 대하여
별의별 사건이 일어났음에도 세상이 아무런 변화 없이 평화를 유지하고 있을 때 나는 안평화를 느낀다. 안평화는 평화의 반의어로 한 번 써본 표현이다. 0이 보통 기분이고 평화가 50이면, 그 정확 반대편의 기분인 -50을 표현하는 단어가 뭔지 몰라서다. 그런데 나는 가끔 마이너스 50보다 더 마이너스인.. 예를 들어 -60, -70, -80의 기분을 느끼기도 하는데, 그건 별의별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에 버금가는 또 다른 별의별 사건 때문에 세상이 평화로워질 때다.
요즘 <파묘>(아직도 안 봤다)를 두고 가장 많이 들리는 말이 전반부까지 좋았지만 후반부가 아쉬웠다는 평가인데, 2월 초 개봉한 하야카와 지에 감독의 <플랜 75> 또한 <파묘>에 버금갈 정도로 전반부와 후반부의 편차가 큰 영화이다. <파묘> 아직 안 봐서 말 줄이고 싶지만 한 마디만 더 얹자면 두 영화의 큰 차이점은 <플랜 75>는 감독의 데뷔작이라는 점.. 아무튼 <플랜 75>는 후반부의 문제 해결/상황 수습 파트는 다소 아쉽지만, 전반부 문제 제시/상황 세팅 파트만큼은 정말 멋진 영화였다. 적어보니 <듄> 파트1&2에 관한 얘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플랜 75>는 오프닝에 끔찍한 노인 혐오 살인 사건을 배치하며 영화를 시작한다. 노인을 생산성 없이 나라의 희소한 자원만 축내는 존재로 여기는 청년이 거행한 범죄였다. 분명 나라가 들썩일 정도로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 건데, 영화가 보여주는 다음 장면들은 일본의 평화로운 일상들이다. 그러니까 <콘크리트 유토피아>로 예를 들면 오프닝에 하늘 땅 위 아래가 다 뒤집어졌는데, 다음 장면에서 아무 변화가 없는 세상을 보여주면 이상하지 않는가. <플랜 75>는 심지어 옴니버스 형식이라서, 이 ‘평화’가 더 잘 드러난다.
그런데 솔직히 영화를 처음 볼 땐 이 이상함을 잘 느끼지 못했었다. 아니 감지하지 못했었다. 마치 '이상함 불감증'에 걸린 것처럼 이상한 이 상황에 익숙해졌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과 함께 시작한 글이다. 이상한 것을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할 때, 변화해야 하는데 변화하지 않을 때, (몸이) 움직여야 하는데 움직이지 않을 때 나는 악취에 대해서 썼다. 참고로 움직여야 할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표현은 죽음에 대한 비유이고. 변화해야 하는데 변화하지 않는 사회는 곧 죽은 사회라는 표현이 비유가 아닌 것 같은 사회를 살고 있다는 생각, 별의별 사건에 더 이상 둔감해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요즈음이다.
오프닝에서 끔찍한 노인 혐오 살인 사건이 일어났음에도 <플랜 75> 속 세상은 평화롭다. 특정 세대를 향한 증오가 살인이라는 극단적 형태로 발현됐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일상을 계속하며 각자의 미래를 계획 중이다. 영화의 첫 번째 주인공인 미치(바이쇼 지에코)는 건강검진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새로운 일자리를 찾고, 두 번째 주인공인 청년 히로무(이소무라 하야토)는 친절한 태도를 유지한 채 노인들을 응대한다. 세 번째 주인공인 마리아(스테파니 아리안) 역시 딸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한 노동을 멈추지 않는다. <플랜 75>의 전반부는 이 이상한 지속 때문에 서늘하다. 분명 엄청난 일이 벌어졌는데도 아무도 이에 관해 말하지 않아서. 말하자면 사람들 모두가 나를 속이고 있는 것만 같은 세상에서 눈을 뜬 기분이 드는 것이 <플랜 75>의 전반부의 인상이다.
그런데 그뿐만이 아니다. 영화가 오프닝에서 제공하는 또 하나의 끔찍함은, 이 나라가 오늘 막 고령자들의 합법적인 안락사를 지원하는 정책인 ‘플랜 75’를 입법화한 나라라는 사실이다. 이 정보는 살인 현장에 틀어져 있던 라디오 뉴스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는데, 이를 토대로 위에 언급한 ‘이상한 지속’을 해석하면 정말로 괴이한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살인이 일어났지만, 플랜 75가 통과되었으므로, 사회 구성원들이 평범한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혐오 살인이 일어났음에도/플랜 75가 통과되었음에도 평화로운 사회보다 더 섬뜩한 사회는, 플랜 75 ‘때문에’ 평화로운 사회다. 플랜 75가 세상을 더 살기 좋게 만들 것이라는 믿음이 공유된 사회가 훨씬 더 무섭고 병든 사회라는 것이다. 그래서 <플랜 75>가 오프닝을 제외한 전반부 내내 그 어떤 죽음을 보여주지 않았음에도, 외려 따뜻함이 느껴질 정도의 일상을 묘사했음에도, 영화에선 지독한 악취가 난다. 다시 한번, 혐오 살인이 일어나서, 국가가 자행하는 합법적인 살인이 일어나는 세상을 그리고 있는 영화라서 죽음의 냄새가 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죽음이 느껴지는 건, 움직임이 있어야 하는 곳에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다. 하야카와 지에 감독은 이 영화의 전반부를 통해 그것이 이 사회가 지니고 있는 문제의 본질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부동의 냄새 <플랜 75>
그 죽음의 냄새를 가장 먼저 맡는 존재는 미치다. 미치는 영화 러닝타임의 절반이 넘어가는 시점에 실제로 죽은 사람의 냄새를 맡게 된다. 어느 날 절친한 직장 동료가 퇴직 후 며칠째 전화를 받지 않자 미치는 직접 그의 집으로 향한다. 잠겨 있어야 하지만 (당연히) 잠겨 있지 않은 문을 연 미치는 곧바로 코를 막는다. 영화는 움직이지 않는 한 사람이 엎드려 누워 있는 뒷모습을 보여주고, 우리는 그가 죽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영화가 50분 동안 ‘평화’를 보여줬으므로, 그러므로 이 부동(不動) 또한 죽음이 아닌 단잠을 자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음에도 우리가 죽음을 확신하는 건, 미치가 바로 앞 장면에서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다.
노인의 죽음이 냄새로 표현되었다는 점에서, 어쩌면 냄새는 죽음과 묘한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인상이 생긴다. 무엇보다 냄새는 인간이 여기 살아 있었다는 것을 그 어떤 감각보다 확실하게 말하는 증거이며, 동시에 그 어떤 것보다 지우기 힘든 흔적이다. 그리고 미치는 그걸 깨닫는 순간, 플랜 75를 선택한다.
사실 미치는 동료의 죽음을 목격했음에도 삶을 이어가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었다. 미치의 다음 행선지가 플랜 75 지원소가 아닌 ‘생활지원과’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담 시간을 놓친 탓에 미치는 허탕을 치게 되고, 낙담한 채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미치에게 누군가 무료 급식을 건넨다. 그 누군가가 영화의 두 번째 주인공인 히로무라는 사실은 옴니버스식으로 전개되는 이 영화가 선사하는 또 다른 묘미 중 하나이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이 장면이 매우 인상적인 까닭은 히로무가 건넨 따뜻한 음식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는 것이 눈에 선명히 보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그 김이 정확히 미치의 코를 향해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음식 냄새를 맡던 미치의 모습에 바로 이어지는 다음 컷으로, 집에서 플랜 75의 팸플릿을 만지작거리는 미치의 모습이 붙는다. 미치는 자신의 코를 찌른 두개의 냄새를 통해 무엇을 느꼈던 것일까. 자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냄새로 발견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 것일까. 움직여야 할 때 움직이지 않은 자신에게 악취가 날 것이 걱정되었던 것일까. 구린 냄새가 나는데도 계속해서 젊은이들로부터 좋은 냄새를 제공받는 자신이 더이상 살 가치가 없다고 느낀 것은 아닐까. 그 어떤 답도 마땅히 세상을 떠나야 할 이유는 되지 않으므로 이제 우리는 움직여야만 한다, 가 <플랜 75>가 전하려는 메시지일 테다. 비록 영화는 후반부에서 인상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지 못한 채 마무리되지만, 그럼에도 <플랜 75>를 통해 맡게 된 우리 사회의 고약한 냄새만큼은 오래 남아 있을 것만 같다.
순환의 냄새 <오키쿠와 세계>
관련하여 국내에 비슷한 시기에 개봉해 유사한 냄새를 풍기면서 결말까지 아름답게 마무리되는 다른 한편의 일본영화를 언급하고 싶다. 사카모토 준지 감독의 <오키쿠와 세계>다. 이 영화 또한 <플랜 75>처럼 코를 막아야 할 정도의 악취가 나지만, <오키쿠와 세계>의 냄새는 부동이 아닌 무한동력, 즉 순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청년 야스케(이케마쓰 소스케)와 츄지(간이치로)는 인분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둘이 온 힘을 다해 퍼나른 인분은 밭의 거름이 되고, 그곳에서 자란 수확물을 먹은 인간들은 또다시 부지런히 인분을 생산한다. 사람들은 사실 둘이 마을에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온몸에 변을 묻히고 다니는 이들을 향해 혐오의 표현을 쏟아내곤 한다. 그런 청년 츄지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한 인물이 있으니, 바로 오키쿠(구로키 하루)다. 오키쿠는 츄지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지 못해 츄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츄지에게서 나는 냄새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냄새는 움직임이 필요한 곳에서 계속해서 움직였던 사람만이 풍길 수 있는 냄새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두 사람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모습으로 종장을 맞는다. 츄지는 “말로는 못하겠어요”라고 말하며 자신의 애정을 몸의 움직임으로 표현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가슴에 주먹질을 하고, 땅을 치고, 하늘을 가리켜봐도 오키쿠는 알아듣지 못하지만, 츄지는 절대로 멈출 생각이 없다. 빈 양동이에 눈이 소복이 쌓일 정도의 시간이 흘러도 츄지의 움직임은 계속된다. 아니, 오히려 더 거세진다. <오키쿠와 세계>는 이 거센 움직임이 분명 이들의 미래에 평화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말하고, <플랜 75>는 움직이지 않는 것이 어떤 악취를 풍길지에 대해 경고한다. 두 영화 사이의 어느 시점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는 우리는 언제 움직임을 시작할 수 있을까. 이제 75까지는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