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1469호에 쓴 <트위스터스>에 대한 글에 담지 못한 여러 가지 문장들.
1. <트위스터스>를 보고 나왔을 때 느낀 벅참은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의 그것과 비슷했다. 둘 다 한 편의 장르 영화로서도 만족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감독의 가치관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가치관이 너무 멋지고 반가워서 벅이 안 찰 수 없었다.
2. 그 가치관이 뭔지에 대해선 운 좋게도 둘 다 씨네21에 쓰게 되었다. 자세한 건 전문을 읽어주시면 좋겠지만 요약하자면 <퓨리오사>에선 이야기의 주인공을 바로잡는 역할로서의 영화가 느껴졌고, <트위스터스>에서는 재난 영화의 진정한 존재 이유에 대한 감독의 생각이 느껴졌다. 본작의 1편이라고 할 수 있는 <트위스터>가 스펙터클을 즐기기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된 재난 영화의 대표주자 격인 영화이기에, <트위스터스> 역시 ‘재난 영화를 바로잡는 역할로서의 영화’라고도 칭할 수 있을 것 같다.
3. 바로잡기가 할리우드의 트렌드가 된지는 꽤 됐다. 어느 새부터 과거의 옳지 못했던 방법으로 누렸던 영광을 바로잡는 것에 몰두하기 시작한 할리우드는, 지금은 약간의 숨 고르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에 앞뒤 재지 않고, 무조건, 옳은 방향으로 수정하는 것에 풀액셀을 밟느라, 정작 승객을 만족시키는 데에는 실패한 게 요 근래의 할리우드다. 방향은 잘못이 없었으나 운전 방식을 신경 썼어야 한다는 교훈.. 을 누군가는 인지한 것일까? ‘무조건 좋은 곳에 도착’이 이 운전의 진정한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창작자가 등장하고 있다. 그중 한 명이 조지 밀러였고 또 한 명이 정이삭이다.
4. <트위스터스>의 주인공 케이트는 자칭 타칭 토네이도 전문가이다. 케이트는 <트위스터스> 세계에서 아마도 인간 중에 토네이도를 가장 잘 아는 사람으로 묘사되지만, 정작 토네이도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과거가 있다. 그런 케이트가 다시 토네이도에 맞서는 핵심 이유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서다. ‘트라우마 극복’은 너무나도 영화 주인공적인 무언가다. 트라우마를 이겨낸다는 명분 하나면, 어떤 드라마틱한 서사도 뚝딱 해결될 수 있다. 재난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주인공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자신의 미흡했던 과거를 떠올리기만 하면 상당한 감동을 자아낼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이 트라우마 극복자가 재난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이 맞는 걸까. 그 상태로 이 재난 이야기를 종료시켜도 되는 것일까.
5. 정이삭의 <트위스터스>는 트라우마 극복만 하고 멈추려는 자신의 주인공을 더 세차게 몰아붙여 그 너머의 선택을 하게 만든다. 마지막 순간에 케이트는 자신에게 주어진 '토네이도를 잘 아는 능력'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주어진 능력이 아니라, 재난 영화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주어진 능력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걸 깨닫고 결단을 내린다. 트라우마 극복을 위해 결단을 내리는 게 아니라, people을 위해. 토네이도로 고통받는 진짜 주인공들을 위해 자신을 던진다.
6. 재난 영화의 진짜 목적은 무엇인가. 재난 영화는 (그리고 영화는) 본래 즐기기 위한 구경거리로서 발명되었다. 특히 토네이도와 같은 거대한 자연 현상은, 영화 속에도 등장하는 유튜버와 그 추종자들처럼 환호성을 지르며 구경하기에 너무나 좋은 무언가다. 단, 이걸로 ‘죽는 사람’들이 없는 경우에만. 하지만 모두 알고 있듯 재난에는 늘 사상자가 따른다. <미나리>로 유명세를 얻은 정이삭 감독이 구경거리 영화를 찍는다는 소식에 띠용하면서도 기다려졌던 것은, 분명 영화에 이 찝찝한 즐길 거리에 대한 한 사려 깊은 감독의 가치관이 반영돼있을 거란 기대 때문이었다. <트위스터스>는 어느 스펙터클 영화에 못지않은 즐길 거리를 제공함과 동시에, 재난 영화들의 진짜 중심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명확히 제시하는 영화다. 그 기준까지 보여주는 스펙터클이라서, 그게 아직도 '영화'가 멋진 무언가라고 믿고 있는 내 입장에선 너무나도 즐길 거리라서. 그래서 (별점평에 썼듯) 스펙터클 위의 스펙터클이다.
7. Thank you, 정이삭. 그 덕분에 나는 이제 재난 영화를 마음 놓고 즐길 수 있게 되었고, 영화가 아직 멋지다는 믿음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그런 관점에서 정이삭은 나에게 넥스트 스티븐 스필버그다.
이하 씨네21에 실린 글.
http://cine21.com/news/view/?idx=0&mag_id=105661
토네이도에 맞서는 한 인간의 서사시
“느낌이 오면, 쫓아라!” (If you feel it, chase it!) 거대 회오리바람인 토네이도를 피해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이를 쫓아 그 중심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는 미지의 영역을 면밀히 분석해 재난으로서 토네이도를 이해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토네이도가 펼쳐내는 매혹적이고 압도적인 광경을 두고 ‘자연이 빚은 걸작’이라 찬미하며 이를 즐긴다. 그리고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이를 통해 크게 한몫을 챙기려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트위스터스>는 인류가 아직 그 존재의 특성을 완벽히 파악하지 못한 토네이도와 더불어 살아가는 다양한 인간들의 이야기다. 전작 <미나리>에서 미국 중남부 아칸소주의 목가적 풍경을 사했던 정이삭 감독은, 이번엔 배경을 바로 옆에 위치한 오클라호마주로 옮겨 다시 한번 그 땅에서 최선의 삶을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미국인들의 마음을 위로한다.
영화는 오클라호마 출신 케이트(데이지 에드거존스)의 과거로부터 시작된다. 대학 시절 동료, 친구들과 자신이 개발한 화학물질을 이용해 토네이도를 길들이려던 케이트는, 예상을 넘어서는 규모의 토네이도를 피하지 못하고 그만 소중한 사람들을 잃고 만다. 오만한 마음으로 세상을 길들이려다 역으로 세상에 길들여진 케이트는 다리에 토네이도를 연상시키는 긴 상흔을 지닌 채 고향이 아닌 다른 땅에서 새 삶을 꾀한다. 그러나 운명은 남다른 재능을 가진 케이트를 절대 그대로 두지 않겠다는 듯 다시 그녀를 오클라호마로 이끌고야 만다. 표면상으론 사고의 또 다른 생존자였던 친구 하비(앤서니 라모스)의 부탁이 있기는 하지만, 케이트의 귀환은 일종의 ‘미션’처럼 받아들여진다. 누구보다 정확하게 기상을 관측하는 케이트의 특출한 감각과 반드시 목표에 다다르고야 마는 집요함. 거기에 영화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느낌’(feel)과 ‘추적’(chase)에 관한 대사는, 그렇게 <트위스터스>를 단순한 재난영화가 아닌 운명에 맞서는 한 인간의 서사시로 읽게 만든다.고향으로 돌아온 케이트는 하비가 새롭게 추진하고 있는 토네이도 데이터 수집 사업을 돕는다. 케이트는 토네이도와 거리를 조금씩 좁혀가며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해보는데 이내 방해 세력이 등장한다. 미국 중부 지역을 돌아다니며 규모가 큰 토네이도를 카메라에 담으려는 유튜버 타일러(글렌 파월) 일당이 그들이다. 타일러의 등장으로 영화는 28년 전에 만들어진 본편의 전작 <트위스터>가 그랬던 것처럼, 단순한 선악 구도 형태로 진행될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 하나 <트위스터스>가 갑자기 진로를 바꿔 카메라로 토네이도가 아닌 토네이도가 휩쓸고 간 자리에 남은 사람들을 비추기 시작하자,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메시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철저히 부수고 재건한 속편
<트위스터스>는 본래 속편이 아니라 리부트를 위해 진행하던 프로젝트였다. 얀 드봉의 <트위스터>는 당시 세계적으로 흥행 면에서 좋은 결과를 얻기는 했지만, 현시점에서 보면 썩 만족스럽지 않은 시각효과와 빈약한 서사가 아쉬운 영화다. 제작자 입장에선 언젠간 다시 만들어보고 싶은 욕심이 남았을 터. 그런 프로젝트를 애매하게 손보는 게 아니라, 속편으로 명확하게 선을 그은 채 재개한 것은 탁월한 선택으로 느껴진다. 물론 전작과 이번 영화 사이에 유의미한 연속성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영화는 <트위스터>에 오마주를 바치는 방식으로 구작에 열광한 팬들을 위로한다. 무엇보다 <트위스터스>의 초반 과거 장면에서 케이트가 동료들과 토네이도의 데이터를 수집할 때 ‘도로시’라는 장치를 사용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이는 전작에서 가장 중요한 소품 중 하나였기에 큰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더해 등장인물의 특정 대사나 특별 카메오 캐스팅까지(1996년 영화의 메인 롤인 빌을 연기한 고 빌 팩스턴의 아들 제임스 팩스턴이 출연한다). 영화는 전작에 대한 충분한 예우를 갖춘 다음, 이를 철저히 부수고 재건한다. 이제 더이상 재난을 즐기고만 있을 수는 없기에. 재난으로부터 파생된 고통을 없는 셈 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기존의 선악 구도에서 벗어난 영화는, 비로소 재난의 당사자를 진심으로 품을 수 있게 된다. 스티븐 스필버그와 캐슬린 케네디, 프랭크 마셜을 비롯한 거물급 영화인들이 참여한 이 프로젝트가 단순한 산업 논리에 따른 결과물로 보이지 않는 이유다.
그렇다고 <트위스터스>가 머금고 있는 스펙터클이 전혀 부족하게 느껴지는 것도 아니다. 정이삭 감독은 본작 관련 인터뷰에서 오래전부터 블록버스터를 연출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고 밝힌 바 있는데, 그의 말마따나 <트위스터스>에선 마치 이런 영화를 꾸준히 만들어온 감독의 작품인 것 같은 능숙한 완급 조절이 느껴진다. 현실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블루스크린을 활용해 스튜디오 촬영을 하는 대신 최대한 토네이도의 본고장 오클라호마 현장에서 촬영을 진행했으며, 이와 부합하는 목적으로 35mm 필름 촬영까지 과감히 밀어붙였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완성된 하이라이트 신에서의 휘몰아침은, 그 어떤 재난영화에도 뒤지지 않는 숨막히는 경험을 제공하는 데 성공한다.
재난영화의 목적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잔잔한 휴먼드라마로 분류되는 <미나리>를 통해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정이삭 감독의 다음 행보에 의문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았다. 재난 장르의 전형으로 평가받는 <트위스터>의 속편을 맡으면서, 연출자가 자신이 가진 고유한 색을 잃고 또 한명의 할리우드 히트메이커가 될 수도 있다는 우려는 나름 일리 있다. 그렇다면 정이삭은 왜 <트위스터스>를 선택한 것일까. 그가 토네이도에 매료된 이유는 무엇이며, 그가 이 영화를 통해 세상에 심고 싶은 씨앗은 무엇일까.
이는 영화 속 인물들의 토네이도에 대한 관점의 변화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재난을 정복하는 것을 그저 자기만족이나 트라우마 극복, 그것도 아니면 또 하나의 돈벌이 수단으로만 생각하던 인물들은, 결국 이야기의 끝에 이르러 자신의 행위가 무엇을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된다. 오직 재난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서만 재난을 다뤄야 한다는 지당한 사실을 깨달은 그들은 그렇게 타인에게 손을 내민다. <미나리>에서 데이빗이 지금의 자신을 존재할 수 있게 만들어준 할머니를 진심으로 이해한 뒤 손을 내미는 것처럼 말이다. <트위스터스>는 한편의 재난 장르영화로서도 의심할 여지 없이 훌륭하지만, 동시에 ‘재난영화에 관한 영화’로서도 동시대 영화들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할 영화다. 영화에도 언급되듯 토네이도는 그 강도의 등급을 토네이도 자체의 파워가 아닌, 이로 인해 커뮤니티가 입은 데미지를 바탕으로 측정한다고 한다. 빗대어 표현하자면 <트위스터스>는 그 규모 때문에 스펙터클한 영화가 아니라, 많은 사람의 머릿속에 있는 ‘재난영화’라는 개념을 송두리째 뽑아버릴 거라는 점에서 최고의 스펙터클로 평가받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정이삭의 목적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