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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철홍 Oct 15. 2024

호아킨 피닉스를 향한 물음표 <조커: 폴리아되>


씨네21 1476호, <조커: 폴리 아 되> 개봉을 계기로 호아킨 피닉스 배우론을 썼다.


<조커: 폴리 아 되> 영화에 대한 이야기나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력 자체에 대해 얘기한 건 아니고, 그의 반복되는 그리고 예상되는 연기 패턴의 아쉬움을 적었다.


글 마지막에 생략한 한 마디를 여기에 남긴다..



호아킨 피닉스가 또 호아킨 피닉스 한다 하더라도, 나는 호아킨 피닉스를 보러 극장에 갈 것이긴 하지만.




http://cine21.com/news/view/?mag_id=106102



물음표 그 자체인 배우에게 던지는 물음표


토드 필립스와 호아킨 피닉스의 야심작 <조커: 폴리 아 되>는 조커의 화려한 귀환을 오랜 시간 기다려 왔던 전 세계 관객들의 머릿속에 거대한 물음표를 남길 작품이 분명하다. 특히 전작 <조커>의 엔딩에서 긍정의 의미든 부정의 의미든 큰 충격을 받은 관객의 입장에선 더욱 그렇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조커>를 통해 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악당인 조커의 ‘비긴즈(begins)’를 목격한 우리는, 이어지는 에필로그의 해당되는 장면에서 조커가 그 명성에 걸맞게 맥락 없는 살인을 저지르는 것을 마지막으로 보게 된다. 그렇게 완성형 조커가 이리저리 도주하는 것을 끝으로 엔딩 크레딧이 오른다.


그 사이에 어떤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 <폴리 아 되>가 시작되자마자 물음표가 떠오르는 것은 이 조커가 그 조커가 아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교도소에 갇혀 있다. 어떠한 준비 동작 없이 사람을 죽이는 성정을 지녔던 조커는 완전히 온순한 존재가 되어 있다. 교도관이 조롱하듯 오늘의 농담은 없냐고 물어도 대꾸하지 못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조커라면 분명 교도관의 조롱을 받아쳐야 한다. 그 대가로 받게 되는 교도관의 발길질에도 끝까지 웃음을 멈추지 않는 게 맞다. 그러나 그는 웃지 않는다. 대체 무슨 사연이 있었던 건지 되묻게 된다.


그럼에도 이 오프닝 시퀀스엔 떨치기 어려운 긴장감이 느껴지는데, 그건 오로지 배우 호아킨 피닉스의 얼굴 덕분이다. 그의 알 수 없는 표정이 이 순간에 서스펜스를 불어 넣는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반격할 틈을 보고 있는 것일까? 훗날 행할 복수를 상상하며 속으로 웃고 있는 건 아닐까? <폴리 아 되>는 이렇게 수많은 물음표와 함께 시작된다. 그리고 그 물음표들의 출발점에 호아킨 피닉스가 있다. 아니 모든 물음표들을 모자이크처럼 한곳에 모아보면 그 형태가 곧 호아킨 피닉스/조커다. 심지어 그의 돌출된 한 쪽 어깨와 굽은 등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그 자체로 물음표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착시가 느껴지기도 한다.


궁금하지 않은 물음표

<폴리 아 되>는 지금까지 여러 번 스크린에 구현됐었던 조커라는 강력한 느낌표를 구부러뜨려 울퉁불퉁한 물음표로 만든다는 측면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거뒀다고 평할 수 있는 작품이다. 아무런 부연 설명이 필요 없는 아이콘에 이토록 뜨거운 논쟁을 일으켰다는 것만으로도 토드 필립스의 영화는 세간의 주목을 받을 자격이 있다. 그러나 과연 그 성과가 호아킨 피닉스에게도 긍정적이라고 볼 수 있을까. 매번 관객에게 답을 주지 않았던 그가 또 한 번 같은 표정을 지었던 것은 아닐까. 늘 알 수 없는 인물로 등장하여 영화가 단일한 의미로 해석되는 것을 막아냈던, 그래서 구스 반 산트, 제임스 그레이, 폴 토마스 앤더슨, 아리 애스터를 비롯한 수많은 시네아스트들의 러브콜을 받았던 그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가 선보이는 물음표의 형태가 지나치게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가 어렵다. 다시 말해, 물음표를 구현하는 방식이 궁금하지 않아졌다는 것이다.


강조하건대 이 비판은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력’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의 영화를 휘어잡는 힘이 그 어떤 배우보다도 강력하다는 것에 대해선 이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그가 출연한 영화 중 상당수는 그의 등장만으로도 이미 여러 가지 실리를 취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영화에 매겨진 암묵적인 등급이나 관객 수 같은 세속적인 부분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있음으로써 영화는 결정적으로 불필요한 씬을 생략할 수 있다. 다른 배우라면 반드시 필요할 인물의 과거 서사를, 호아킨 피닉스는 한 쇼트로 납득시키기도 한다.


<마스터>의 오프닝에서 그가 연기한 프레디가 해변에서 동료 군인들이 모래로 여성의 형상을 쌓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때, 좌측으로 허리를 숙인 그의 모습이 또 다시 물음표의 모양을 띄고 있어도 우리는 그가 얼마나 뒤틀린 인물인지를 단번에 파악하게 된다. 또는 <투 러버스>에서 강에 빠졌던 레너드가 집으로 돌아와 방에서 젖은 몸을 말릴 때 보인 축 처진 뒷모습은, 그가 헤어 나올 수 없는 깊은 슬픔의 늪에 빠져 있음을 설명한다. 뿐만 아니라 <보 이즈 어프레이드>의 초반부 상담실에서 핸드폰에 엄마의 이름이 계속해서 뜨는 것을 쳐다보는 보의 표정은, 너무도 쉽게 보와 엄마의 이상한 관계를 암시해 내기도 한다.


그러나 호아킨 피닉스가 점점 더 쉽게 인물의 과거를 납득시킬수록,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그린 인물들의 미래가 더 이상 궁금해지지 않게 되고 있다. 그가 수월하게 표현해낸 양면성을 지닌 주인공의 끝이 늘 비슷한 형태를 띠기 때문이다. 혹은 한 편의 영화에서 그가 연기한 배역의 서사가, 그가 다른 영화에서 맡은 인물의 전사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작품 간의 시대적 배경을 잠시만 무시해 본다면, <투 러버스>의 레너드가 흑화해서 조커가 되었다고 하거나, 은퇴한 조커의 미래 이야기가 <보 이즈 어프레이드>라는 농담도 가능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앞서 언급한 호아킨의 연기력 신화 또한, 그가 이전 작품에서 완성시킨 캐릭터들의 축적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다. 우울증, 불행한 유년 시절, 애정결핍, 외상 후 스트레스, 알코올/약물 중독, 신경 쇠약 등 그가 주로 맡았던 인물들의 특징을 나열한 뒤 그걸 배역들과 연결시켜보면 이것이 꽤나 그럴듯한 가설로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키워드들이 만나는 지점에 몸이 비쩍 마른 조커가 있다. 온몸에 긴 연기 생활의 모든 흔적을 잔뜩 머금고 있어서일까. 기형적으로 튀어나온 뼈가 그래서 더 섬뜩하게 다가온다. 그렇게 <조커>에서 그는 또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냈다. 오스카 남우주연상이라는 세속적 성공을 거뒀을 뿐만 아니라, 의도치 않게 (<그녀>의 대필 작가 테오도르처럼) 특정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결과를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호아킨 피닉스는 조커를 다시 한번 스크린에 소환한다. <폴리 아 되>에서 조커는 자신이 탄생시킨 또 다른 조커에게 찔려 죽음을 맞이한다. 이 사건은 호아킨 피닉스 개인 입장에서 보면 상징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가 과거에 만든 캐릭터들이 자꾸만 자신을 덮쳐대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지금이 만족스러울까, 불행할까. <그녀>의 테오도르는, <너는 여기에 없었다>의 조는, <인히어런트 바이스>의 닥은, <이민자>의 브루노는, <위 오운 더 나잇>의 바비는 영화의 끝에서 기뻤을까, 슬펐을까. 아니 그들은 죽음을 생각하고 있을까, 다음을 생각하고 있을까. <폴리 아 되>의 끝에서 차디찬 교도소 바닥에 얼굴을 붙인 채 쓰러져 있는 아서/조커는 어떤 미래를 상상하고 있을까. 그 캐릭터들이 남긴 위대한 물음표들은, 어쩌면 우리 세대가 세상을 떠난 먼 미래에도 살아남아 세상에 유의미한 변화를 이끌어낼지도 모른다. 반면 호아킨 피닉스는 아직까진 자신의 내면에서 그 캐릭터들을 지울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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