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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집의 정령>

by 김철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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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아나는 언니와 함께 동네 영화관에서 <프랑켄슈타인>을 본다. 그런데 제임스 웨일 감독의 1931년 영화 <프랑켄슈타인>에는 중대한 결함이 있었다. 영화엔 괴수가 ‘실수로’ 한 소녀를 물에 빠뜨려 죽게 만드는 장면이 있는데, 그 장면이 감독의 의도와 상관없이 보여지는 행위 그 자체가 잔혹하다는 이유로 검열되어 삭제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프랑켄슈타인>엔 ‘소녀가 물가에서 괴수를 만난 이후 시체로 발견되었다’, 라는 불완전한 인과 관계만이 존재한다. 이 인과 관계를 받아든 극중 마을 사람들은 프랑켄슈타인을 의심한다. 이건 당연하다. 그것이 작가의 의도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삭제된 장면으로 인해 영화를 보는 관객들까지 괴수를 의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건 분명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다.

빅토르 에리세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벌집의 정령>엔 검열된 버전 그대로의 <프랑켄슈타인>이 나오지만, <프랑켄슈타인>이 검열로 인해 불완전한 인과 관계를 지녔다는, 그래서 보는 사람들이 잘못된 감상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고지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프랑켄슈타인>이 검열되었다는 사실은 오직 영화 바깥에 있는 정보이며, 빅토르 에리세는 그 사실을 영화 안으로 끌고 들어오지 않는다.


영화 속에선 <프랑켄슈타인>의 그 장면과 이를 보는 아나의 표정이 번갈아 등장한다. 아나는 당연히 영화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중요한 장면이 삭제되었기 때문에. 괴수가 소녀를 위해, 꽃을 강에 던지면 배처럼 뜨는 것을 알려준 그 소녀를 즐겁게 하기 위해 기쁜 마음으로 강물에 던져버리는 그 장면이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침대에 누워 잠에 들려는 언니에게 계속해서 아까 본 영화에 대해 묻는다. “괴물이 왜 그 애를 죽인 거야? 사람들은 왜 괴물을 죽인 거고?” 그러나 언니도 당연히 같은 영화를 봤으니 그 답을 알지 못한다. 모르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아는 척, 아나에게 거짓말을 한다. “괴물도 죽지 않았고 아이도 죽지 않았어. 영화는 다 가짜야. 전부 속임수야.”

<벌집의 정령>은 줄거리만 간단히 요약하면 언니의 그 말을 믿은 아나가 벌이는 작은 소동극이다. 언니는 괴물이 밤에만 나타나는 ‘정령’이라고 말을 하고, 아나는 정령과 친구가 되고 싶어 한다. 이 영화는 널리 알려져 있기론, 당시 스페인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을 품고 있는 정치적 영화에 속한다. 그런 영화 밖 맥락을 알고 영화를 보면, 영화의 주요 설정과 여러 장면에서 스페인 내전 후 독재 정권을 수립한 프랑코 정권 시대에 대한 은밀한 비판 메시지를 어렵지 않게 짚어낼 수 있다. 실제로 이 영화가 스페인에 개봉했던 해에도 프랑코 정권이 여전히 집권하던 시기였으므로, 빅토르 에리세를 비롯한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영화를 최대한 정치와 상관없는 영화로 보이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했다고 한다. 누가 <벌집의 정령>을 두고 프랑코를 저격하는 거냐고 물어보면 극중 언니의 말을 빌려 이렇게 대답했을 거라는 것이다. “영화에서 말하는 거 다 가짜야. 전부 속임수라니까.”

그러나 시간이 지나 알 사람들은 다 알게 되었다. 이 영화가 은유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대상이 프랑코였다는 것을. 그러나 아직도 언니의 거짓말을 믿고 있는 인물이 있으니, 그건 바로 아나다. 아나는 언니의 말을 믿는다. 그래서 밤마다 상상 속에서 정령이 살고 있을 법한 곳을 찾아다닌다. 영화는 주로 상상의 장면을 보여주지만, 어느 장면에선 실제로 정령을 찾아다니다 위험에 빠지기도 한다. 의사와 가족들은 아나가 병들었다고 판단하기까지 한다. 아니 어쩌면 아나는 실제로 병이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언니는 이것까지 의도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영화는 어디까지 의도할 수 있을까. 아무리 가짜라고 말해도, 다 속임수라고 말해도 보는 사람들을 기어코 홀려버리는 힘을 가진 것이 영화다. 아나의 엄마는 오늘도 만날 수 없는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아빠는 또 다시 책상에서 뭔가 끄적거리다 잠이 든다. 아나만 홀린 것이 아니다. 이제 아나까지 홀린 거다. <프랑켄슈타인>에서 빠진 장면과 <벌집의 정령>에서 빠져야 했던 장면들로 인해, 이제 영화 너머 바깥의 사람들까지 홀리기 시작한다. 오늘은 모든 걸 잊고 어딘가 숨어 있을 정령을 한 번 불러보고 싶은 밤이다. “나야, 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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