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고래책방의 밤

그가 나를 불렀다.

by 카르페디엠

봄비가 내리고 있다.
기상청은 오후 늦게 그칠 거라고 했지만, 비는 저녁이 넘어 밤까지, 질기게도 이어지고 있었다.

정은하는 여느 때처럼 회사에서 나와 무거운 걸음으로 집에 도착했다.
양손 가득 노트북과 원고 더미가 든 가방을 내려놓고는, 식탁에 앉아 물을 한 잔 마셨다.
물은 차가웠고, 그 차가움은 오늘 하루의 잔재를 씻어내 주는 듯했다.


조용한 집 안.

하루 종일 사람들과 이메일을 주고받고, 편집부 안에서 말을 아끼며 지내는 그녀에게 이 시간은 쉼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외로움일 수도 있겠지만, 은하에겐 익숙한 고요였다.

거실 한켠, 노란 조명 아래 둥글게 놓인 테이블.
그 위에는 항상 읽고 있던 책과 노트, 커다란 머그잔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은하는 전자레인지에 우유를 데워 머그에 부었다.
카모마일 티백을 하나 툭 떨어뜨리자 향긋한 내음이 부드럽게 퍼졌다.

책상 앞에 앉았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감은 내일이었다. 손끝은 멈췄고, 뇌는 멍했다.


숨을 크게 쉬며 노트북 화면을 보다, 무심결에 익숙한 탭을 열었다.

유튜브.

“오늘도 고생 많으셨죠. 이 밤, 당신을 위한 한 곡이에요.”

익숙하면서도 처음 듣는 듯한 목소리였다.
모니터 속 남자는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그의 눈동자는 조용한 깊이를 담고 있었다.

피아노가 흘렀다.
은하는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어깨에 묻어 있던 긴장이 서서히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는 마치 내 하루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했다.

“오늘은 유독 마음이 붉게 물든 분들이 많으신 것 같아서요.
지금 들려드릴 이 곡은, 그런 당신을 위한 위로의 노래입니다.”

말이 곧 음악이었고, 음악이 곧 마음이었다.


은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밤, 그리고 비, 그리고 음악.
이 이상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위로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의 이름은 한시우.
‘하늘담은 목소리’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 외에는 잘 알지 못했다.
다만, 며칠 전 우연히 이 라이브 방송에 접속했던 순간부터,
은하는 밤이면 이 채널을 찾고 있었다.


그가 부르는 노래에는 허세가 없었다.
어디선가 많이 들었던 곡도 그의 목소리로 들으면 처음 듣는 노래처럼 느껴졌다.
감정이 담긴 목소리, 그리고 그 감정에 기댈 수 있는 시간.


은하는 댓글 창에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고래책방’이라는 닉네임으로, 몇 번 댓글을 단 적이 있다.
대단한 말은 아니었다.
그저 ‘잘 들었습니다’, ‘감사해요’, 그런 말들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더 전하고 싶었다.


고래책방입니다.
오늘도 목소리에 위로받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이 수천 개의 댓글 속, 내 글이 닿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매번, 그렇게 썼다.
어디에라도, 내 마음을 걸어두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의 목소리에 조금 더 고마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그가 고개를 들며 미소 지었다.


“아, 고래책방님. 오늘도 오셨네요.”


은하의 심장이 순간 멈췄다.
모니터 화면 속 그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심히 내뱉은 듯하지만, 분명히 ‘고래책방’이라고 말했다.

“항상 따뜻한 댓글, 저한텐 참 큰 위로예요.
고맙습니다. 오늘도 좋은 밤 되세요.”


은하는 그대로 손을 떼고,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다.
잠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심장이 쿵쿵 소리를 냈다. 이게 진짜야?

그는…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내 존재를 알아봤다.


아무 말도 덧붙이지 못한 채, 은하는 입술을 꼭 다물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무언가에 기대고 싶었던 마음.
사람들에게 말하지 못했던 하루의 쓸쓸함.
나를 이해해주는 누군가가 이 세계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은하는 노트북을 살짝 덮고 조용히 머그잔을 들어 입을 축였다.
티의 향이 여전히 따뜻했다.


그리고 그녀는 알았다.
자신의 밤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걸.


랜선 너머의 누군가로 인해.

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