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기억되는 이름

by 카르페디엠

비는 다음 날 아침까지 이어졌다.
은하는 새벽녘까지 잠들지 못했다.
노트북 화면 속 그의 목소리가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다.

“고래책방님, 오늘도 오셨네요.”


그 말 한마디가, 고요했던 그녀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세상은 매일 수천 개의 이야기를 쏟아내고, 그 안에서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그 많은 이들 중에서, 나의 존재를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

은하에게는 기적 같았다.


책상에 엎드려 있던 그녀는 일어나 화분에 물을 주며 작은 숨을 내쉬었다.
해는 떠 있었지만, 마음은 아직 밤을 걷고 있는 것 같았다.


오전 업무 회의는 평소와 다를 것 없이 흘러갔다.
책임 편집자인 그녀는 오늘도 신입 에디터들의 원고를 검토하고, 마케팅 일정에 대해 상의했다.
하지만 집중은 되지 않았다.


회의 중 틈틈이 휴대폰을 켜고, ‘하늘담은 목소리’ 채널을 눌렀다.
어제의 라이브 방송이 아카이브로 올라와 있었다.

영상 썸네일 속 시우는 웃고 있었다.
부드러운 눈매, 하얀 피부, 그 안에서 묻어나는 따뜻한 분위기.
그는 여전히 낯선 사람이었지만, 이상하게 익숙했다.
책 속 한 장면처럼, 어딘가 내 감정과 닿아 있었다.


점심 시간, 회사 옥상.

은하는 혼자 도시락을 먹었다.
누군가 말 걸어주길 바라지 않으면서도, 혼자라는 걸 의식하고 있었다.

그때, 같은 부서의 채영이 다가왔다.

“언니, 오늘도 혼자야? 나랑 같이 먹자.”


채영은 밝고 쾌활한 성격이었지만, 은하는 그녀 안의 외로움을 느끼곤 했다.
자기처럼 말 많은 세상에서 조용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둘은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언니, 유튜브 좋아해요?”

“음, 가끔. 밤에 잠 안 올 때.”

“혹시 ‘하늘담은 목소리’라는 채널 알아요? 한시우님.”

은하의 손이 멈췄다. 채영의 말이 파고들었다.

“알아. 어제… 라이브 들었어.”
“진짜요? 대박. 언니도 시우님 팬이구나! 저 어제 댓글 엄청 달았어요!”


은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세상은 생각보다 더 촘촘히 연결돼 있는지도 몰랐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온 은하는 조용히 책을 펼쳤다.
읽는 둥 마는 둥 페이지를 넘기던 그녀는 책갈피 사이에서 오래전 메모 하나를 발견했다.

"누군가의 말 한 줄이, 마음을 바꿔놓는 밤도 있다."


몇 년 전, 자신이 쓴 문장이었다.
편집하면서 남겨둔 메모였는데, 그 문장이 이제 와서 더 깊게 다가왔다.

시우의 말 한마디.
그 한 줄이, 그녀의 마음을 바꿔놓은 밤이었다.


노트북을 켜고 댓글을 다시 열어보았다.
자신의 닉네임.
‘고래책방.’


이상하리만큼, 그 이름이 오늘따라 낯설지 않았다.
처음에는 책을 좋아해서 붙였던 이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겨진 이름이 되었다.

은하는 천천히 키보드를 두드렸다.

“고래책방입니다.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어요.
그 목소리에 기대어, 하루를 잘 마무리했습니다.”


그리고 ‘보내기’ 버튼을 누르기 직전, 잠시 멈췄다.

이 말을… 그가 또 기억해줄까?

하지만 이젠 꼭 기억해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저, 말하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누군가에게 마음을 보내는 일이 생각보다 따뜻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밤은 다시 찾아왔고,
은하는 커튼을 반쯤 걷은 채, 조용히 그날의 마지막 음악을 틀었다.
노래는 여전히 따뜻했고,
그 안에는 여전히, 한 사람의 목소리가 있었다.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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