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우는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눈이 떠졌다.
간밤에 쏟아진 비는 어느새 그쳤고, 창가엔 맑은 햇빛이 조용히 내려앉아 있었다.
어깨를 감싸는 피곤함은 있었지만, 마음은 이상하리만큼 맑았다.
그는 스트레칭을 하며 부엌으로 향했다.
평소처럼 원두를 갈고 드립포트를 올렸다.
보글보글 끓는 소리 사이로, 전날의 라이브 방송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고래책방님, 오늘도 오셨네요.”
그 말이 아직도 생생했다.
자주 보이는 닉네임이었지만, 유난히 기억에 남는 몇몇이 있다.
‘고래책방’도 그중 하나였다.
조용한 분위기에, 말이 많지 않았지만 기억에 남는.. 예의 바르고…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마음이 이끌리는 느낌을 받았다.
감정이 묻어 있는 글이었다.
그는 노트북을 켰다.
어제 방송 댓글이 벌써 몇백 개가 쌓여 있었다.
그중, 다시 그 이름을 찾았다.
“고래책방입니다.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어요.
그 목소리에 기대어, 하루를 잘 마무리했습니다.”
짧은 문장이었다.
그런데 읽고 나면 묘하게 숨이 멎는다.
시우는 그런 댓글을 좋아했다.
들떠 있지 않고, 감정을 꾸미지 않은 말.
조용하지만 정확하게 따뜻한 말.
그는 잠시 창밖을 바라봤다.
하늘은 투명했고, 새소리가 들렸다.
문득 어릴 적의 기억이 떠올랐다.
고요한 새벽, 혼자 피아노를 치며 마음을 달래던 날들.
말을 많이 하지 않는 아이였던 그는, 그 시간에만 비로소 온전히 자기 자신이었다.
지금도 그 감각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래서 그는 음악을 통해 마음을 건넨다.
누군가 그런 음악을 듣고 말없이 눈을 감아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은 다르다.
그 댓글 하나가 자꾸만 마음에 남는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지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일지 상상하게 된다.
책을 좋아할까?
밤에 혼자 있는 걸 즐길까?
눈웃음이 예쁠까?
말을 잘 하지 않아도, 마음은 누구보다 섬세할까?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노트북 앞에 앉았다.
오늘은 방송이 없는 날이었다.
하지만 무언가 쓰고 싶었다.
손끝이 피아노 건반을 떠올리듯, 키보드를 두드렸다.
새로 쓸 자작곡의 가사였다.
‘당신이라는 이름이, 내 하루의 끝에 걸려 있습니다.
조용한 숨처럼, 사라지지 않는 메아리처럼…
닿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그런 이름이 있어요.’
시우는 문장을 한참 바라보다가 살짝 미소 지었다.
어쩌면 이건, 그 사람을 위한 노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유튜브 커뮤니티에 짧은 글을 올렸다.
� [오늘의 노트]
“어제도, 오늘도 고맙습니다.
익숙한 닉네임을 보면 문득, 내가 누군가의 밤에 닿고 있다는 걸 느낍니다.”
– 시우
글을 올리고 나니,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댓글을 확인하고, 혹시라도 '그 이름'이 또 나타나 있을까, 기다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걸 시우는 알고 있었다.
한때는 그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이었지만,
지금은 어떤 한 사람의 ‘존재’를 기다리는 곳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날 밤, 시우는 불을 끄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불빛 없는 공간 속, 그는 처음으로 진짜 질문을 자신에게 던졌다.
“...당신은 누구예요?”
그리고 처음으로,
누군가를 향해 곡을 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