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노트] 천명관 장편소설 '고래'

붉은 벽돌에 새긴 침묵의 노래: 코끼리 점보와 나

by haoinana
침묵은 가장 거대한 언어였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혀를 찼다. 어머니 금복의 화려한 미모를 닮지 못한, 거대하고 둔탁한 육체를 가진 재앙의 덩어리라고. 하지만 나는 그들의 말소리를 듣지 못했다. 내게 세상은 귀로 들리는 소음이 아니라, 발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대지의 진동과 코끝을 스치는 맵싸한 불꽃의 냄새로 기억될 뿐이었다. 그 거대한 침묵 속에서 나를 유일하게 이해해 준 것은 사람이 아닌, 나만큼이나 거대하고 외로웠던 존재, 코끼리 ‘점보’였다.


​짐승의 언어, 영혼의 진동
​점보의 거친 피부에 손을 올렸을 때, 나는 비로소 알았다. 언어라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점보의 눈동자 속에는 내가 겪어보지 못한 먼 평원의 바람과, 인간들이 탐욕으로 더럽히기 전의 순수한 슬픔이 고여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거대한 몸을 맞대고 체온을 나누며, 세상이 우리에게 씌운 '괴물'이라는 멍에를 견뎌냈다.
​점보가 죽고 그 뼈만 남았을 때도, 나는 그 곁을 떠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죽은 고기를 탐내고 가죽을 벗겨갔지만, 나는 점보의 영혼이 깃든 그 뼈대를 지키며 붉은 벽돌을 구웠다. 벽돌 한 장 한 장에 점보와 나누었던 무언의 대화를 새겨 넣었다. 그것은 복수도, 성공도 아닌, 그저 '존재함' 그 자체에 대한 증명이었다.


​붉은 감옥이자 성벽이었던 벽돌 공장
​어머니 금복이 세운 고래 모양의 극장은 화려한 불꽃과 함께 사라졌지만, 나는 그 잿더미 위에서 다시 시작했다. 나에게 벽돌을 굽는 일은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가마 속의 뜨거운 열기는 내 안의 슬픔을 단단하게 구워냈고, 갓 구워져 나온 벽돌의 붉은빛은 내 심장의 색깔과 닮아 있었다.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그 폐허에서 나는 외롭지 않았다. 내 곁에는 점보의 거대한 골격이 성채처럼 서 있었고, 내가 쌓아 올린 벽돌담은 세상의 비웃음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유일한 성벽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가련하게 여겼을지 모르나, 나는 그곳에서 누구보다 자유로웠다. 욕망에 눈이 멀어 서로를 할퀴는 인간들의 세상 밖에서, 나는 오직 흙과 불, 그리고 점보의 기억만으로 충분했으니까.


​마지막 벽돌을 놓고 고래의 등으로
​세월이 흘러 내 육신도 점보의 뼈처럼 앙상해졌을 때,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어머니가 평생을 갈구했던 그 '고래'는 먼바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고통스러운 삶을 묵묵히 견뎌낸 내 등 위에 있었다는 것을.
​내 삶의 마지막 벽돌을 내려놓으며, 나는 이제 점보가 기다리는 그곳으로 가려한다. 거대한 고래의 등이 파도를 가르듯, 나 또한 이 지긋지긋한 생의 무게를 벗어던지고 깊고 푸른 안식 속으로 침잠한다.


​브런치를 찾는 당신에게
​나, 춘희의 이야기를 읽는 당신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그토록 치열하게 자신만의 성벽을 쌓고 있는가. 그 성벽 안에 당신을 진심으로 안아줄 '점보' 한 마리 품고 있는가.
​비록 내 이름은 붉은 먼지가 되어 사라지겠지만, 내가 구운 벽돌 어딘가에 남은 온기만은 기억해 주길 바란다. 말하지 못한 진심은 때로 가장 단단한 물질이 되어 남는 법이니까. 나는 이제 말을 멈추고, 영원한 진동 속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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