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하늘을 따르는 도시 이야기(2)

29. 빗소리에 스며드는 매화의 시간처럼

by AND ONE

"무진에서는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타인은 모두 속물들이라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타인이 하는 모든 행위는 무위(無爲)와 똑같은 무게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장난이라고" - 김승옥 무진기행 中



비가 내린다. 아침 안개는 불확실한 미래와 닮아 있다. 무기력을 감추는 안개와 무기력을 더하는 안갯속에서 김승옥의 무진기행이 탄생했다. 이곳 순천에는 무기력을 감추는 안개와 무기력을 더하는 안개 사이에서 방황하는 한 명의 청춘이 있다.


안개는 하늘 높이 뜨지 못한 채 지표면에 붙어 있는 구름이다. 청춘은 안개와 같다. 안개를 걷어내면 찬란한 태양이 있을 것만 같다. 또는 먹구름 가득한 어둠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이 모호한 동시 존재의 상태가 청춘이고 안개다.


누구나 안개 같은 비밀을 하나씩은 간직하고 산다. 쓰인 글보다 쓰이지 않은 말이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처럼, 안개 같은 비밀은 굳이 말할 대상도 아니며 캐물을 대상도 아니다. 쓸데없는 생각이 많다. 여행 중이니까 그러려니 한다.


여행은 때론 기행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선암사 대웅전에서 108배를 했다. 108배를 하면 머리가 개운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몸만 건강해진 기분이다. 한 번의 절에 관절이 꿈틀거린다. 정녕 이것이 내 몸이 내는 소리인가 싶다. 하지막 정작 내 정신을 사로잡는 소리는 따로 있었다. 법정 스님의 말씀처럼, 오늘날 인간의 말이 소음으로 전락한 것은 침묵을 배경으로 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땀이 흐른다. 비가 내린다. 비에 젖은 붉은 매화도 낙화하며 초록에게 그 자리를 양보한다. 모든 것이 아래로 향한다. 자연은 아래를 향할 때 새롭게 태어난다. 인간은 다르다. 오르막길을 통해 우리는 거듭 태어날 수 있다. 나는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아님 죽어가고 있는 것인가. 하늘 높이 오른 구름을 동경하고 높이 올라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어중간하게 존재하는 안개 같은 29살의 인생을 생각한다.


안개나루에는 오늘도 상념의 배가 정박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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