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행동들이 나라와 나라 사이를 잇고 연결된 것이 당연한 시대. 인스타그램을 이용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전 세계적인 플랫폼을 사용하는 것으로, 국경과 국경을 넘는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경계 없음이 오히려 인터내셔널이라는 자각 없음으로 이어지는 건 왜 이리도 슬프게 느껴지는 것일까.
이제는 지구촌도 아니고 지구별도 아닌 하나의 세계에서 수많은 인종이 하나의 삶을 추구하는 듯한 기이한 행동을 벌이는 것만 같은 이곳은 알고리즘 속 나만의 인터내셔널.
인터내셔널 하이스쿨을 졸업. 말만 인터내셔널이지 사실상 외고와 다를 바가 없었고, 한국인 재학생 95% 이상의 특목고였음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중국, 일본에서 온 친구들이 학교의 위상을 '인터내셔널'로 격상시켰으나 필자가 생각하는 인터내셔널은 아니었다. 서울이 아닌 곳에서의 '인터내셔널'이었기 때문일까? 서울의 것이 진짜일 것이라는 지독히도 도메스틱한 착각.
통상 非서울 지역의 인터내셔널은 비자발적이다. 비자발적 인터내셔널의 형태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국제결혼을 통해 이민자가 늘어난 지역, 대표적으로는 시흥과 안산 등지의 불법체류자 밀집 지역과 대림 등지의 조선족 밀집 지역, 이슬람 사원을 지으려는 대구의 이슬람 세력들 그리고 아프간 구출 작전을 통해 난민을 떠안게 된 울산과 국제결혼으로 노총각 신세를 탈피하였으나 전재산을 탈탈 털리는 사기 결혼의 피해자들과 한국 국적을 취득한 더운 나라의 사람들. 브라운관에는서울 방송국에 나와 한국말을 유창하게 구사하는 이상적인 인터내셔널까지.
인터내셔널은 이상하다. 이상한 사상으로 인터내셔널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난민기구 홍보대사를 자처하던 연예인이, 이민청을 설치하자는 정치인이, 최저 시급 그 이상의 금액을 철저히 보장하여 외국인의 권리를 드높여 주는 서울시장 등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운 요즘의 위정자들.
돈 많은 사람들에게 인터내셔널은 필요에 따라서 구분된다. 이미 영국과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스웨덴 등 유럽의 병든 선진국들이 자칭 똘레랑스와 인구 감소와 저출산 대응의 목적으로 난민과 이민자를 수용했으나 그들은 병들고 말았다. (제국주의 행태에 일말의 죄책감에서 그랬다면 이해라도 될 텐데...)
이해가 되지 않는 인터내셔널 다이내믹스. 다이나믹 듀오와 Kero one이 같이 부른 <지구본 뮤직> 가사처럼 노래로 국경을 부수는 현상의 최대 수혜자가 되고 있는 우리나라는 역설적으로 우리의 멋을 잃고 있다. 가사에 의미가 있었고 멜로디에 서사가 있었으며 가창력에 감동이 있던 그 순간에는 아틀란티스 별에서 온 것만 같은 보아가 있었고, 보아가 넘버원이었고 보아의 마이네임이 아시아의 별이 아니라 전 세계의 별로 불리기에는 유튜브의 떡상 시점이 다소 아쉬웠다.
유튜브라는 인터내셔널. 이 녀석은 파도처럼 우리 안으로 휩쓸려 들어오면서 망망대해로 뻗어나갔다. 모든 것이 기록되었다. 시간과 장소를 구애받지 않은 동시대성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동 시대의 인터내셔널은 보통 직접 그 장소를 방문해서만 느낄 수 있는 현장감이 중요한 것이었으나, 이제는 사전에 여행을 세우고 그토록 많이 보았던 사진들을 눈으로 확인하고 사진으로 기록하고 브이로그 편집을 하여 기념하는 일종의 저장 3종세트를 통해 인터내셔널은 마치 마이 인비테이셔널로 바뀌어 자신의 인스타로 유입시키기 위한 촘촘한 스토리 라인을 통해 강화되는 것이었다.
스토리 넘치는 화면 너머로 서사 없는 내가 있다. K = 1,000을 의미하고 M=1,000,000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그 옆에 보이는 팔로잉 숫자와 대조되며 자신의 인터내셔널은 결코 당신처럼 넓지 않음을 과시한다. 인터내셔널은 이제 더 이상 광범위 하게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광범위하게 연결될 수 있는 여지를 대중에게 주되 동시에 자신의 이미지가 대중에게 끊임없이 소비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소비 인터내셔널의 다이내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