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서 봄으로의 계절 변화는 일상화된 국민들의 무기력함을 녹여내기에 충분하였다. 그 따뜻함은 개별적 의지이자 열망이었고, 변화를 위한 입김이었다.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를 위한 촛불의 목소리였고, 국민의 정치적 광복을 위한 태극기의 외침이었다."
정치에 관심이 많다 보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왜 나는 복잡하고 머리 아프게 정치에 신경을 쓰는 것일까?' 질문은 생각의 산파였다. 유럽에서 체류한 6개월 동안 한국 정치 소식을 덜 접할수록 내 삶의 질이, 행복의 순도가 더욱 높아졌다고 느낀 그 순간,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렇다. 호흡의 길이가 중요했다. 덴마크에서 평생을 살 게 아니었기 때문에, 한국은 필자가 다시 평생을 살아가야 할 곳이었다. 짧게 보면, 현재의 순간적 행복이 크고 중요해 보인다. 다시 숨을 깊게 내쉬었다. 한숨을 부르는 정치 현실은 나아지지 않았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다시 정치에 관심을 갖기로 했다. 미래의 우리나라가 덴마크의 좋은 점을 닮아갈 수 있도록 이 글을 쓰는 것처럼.
이번 글은 필자가 덴마크로 교환학생을 가기 전에 한국정치학회에서 주최한 2017 전국 대학생 정치평론대회에 제출한 것으로, 본선 50명에 입선한 작품이기도 하다. [포스트 개인주의 이후의 새로운 정치 언어 : 포스팅 정치]라는 제목으로 개인이 일상에서 할 수 있는 정치 참여 방법을 제안해보았다. 우리는 정치 대화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아니, 정치 대화라는 게 애초에 가능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촛불과 태극기 그 이후는?
2016년. 지난 가을에서 겨울, 그리고 봄으로의 계절 변화는 일상화된 국민들의 무기력함을 녹여내기에 충분하였다. 그 따뜻함은 개별적 의지이자 열망이었고, 변화를 위한 입김이었다.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를 위한 촛불의 목소리였고, 국민의 정치적 광복을 위한 태극기의 외침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정치 현실은 바람 잘 날 없다. 좌우로 부는 동풍과 서풍은 이제 과거의 흔적을 지우고 변화의 바람이 되어야 한다. 동시에 시민들의 정치 참여가 더 이상 '문화제'로서의 전시용 참여가 아니라, 개인의 일상적 삶의 수준까지 전이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기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것이 필요하듯, 우리 정치도 새로운 그릇이 필요하다. 정치의 그릇은 프레임이다. 프레임은 정치 언어의 압축적 사고체계다. 과거 정치인들의 이분법적 언어 사용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자연적 퇴화와 더불어 SNS와 빅데이터에 고스란히 남는 기록의 압력이 퇴화의 속도를 부추겼다.
유시민 작가(?) : 포스트 개인주의 시대의 타고난 정치인
바야흐로 지금은 포스트 개인주의 시대다. 정치는 한 시대의 속성을 가장 잘 반영하는 사회 체계 중 하나다. 포스트 개인주의란 무엇인가. '포스트(Post)'를 어떤 개념에 반하여 등장한 후기 개념으로 본다는 차원에서 '포스트 개인주의'는 결합된 개인이다. 빗대자면, 청어 떼와 같다. 공통의 목적을 위해 움직이지만 어떠한 통일성과 집단성을 강조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非) 유기적이다. 개인과 집단 사이의 경계에서 자유롭게 옮겨 다니고 싶은 정치 유목민들은 각자의 온라인 공간에서 저마다의 Post 즉, 기둥을 쌓는다. 자유롭고 싶지만 독립적인 ‘정치적 사고’ 훈련을 받지 않은 대중들은 Post를 찾는다. 정치 예능은 SNS 시대의 대표적인 포스트다. 정치가 중요한 것을 알지만, 정치 현상을 해석하고 판단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푯대로 기능한다.
활자보다는 영상을 주로 소비하는 정보 습득 환경은 정치의 속성을 변화시키고 있다. 과거 정치의 상징인 ‘개인의 카리스마적 기질’은 수많은 데이터와 포스팅 앞에서 무기력해진다. 과거의 언행은 더 이상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인지부조화에 기생해 정치의 선순환을 왜곡하던 구태 정치는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하고 있다. 모든 것이 기록되고, 영상으로 송출되며,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정치의 영속성은 언행불일치의 모순 정치를 조금씩 게워내는 중이다.
前정치인이자 現작가인 ‘유시민’의 방송 출연이 대표적인 예다. 개인의 정치 성향과 판단능력은 오랫동안 쌓인 사회 하부구조의 퇴적물이다. 개인의 정치적 판단은 ‘이해관계’ 보다는 고유의 ‘정체성’에 근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개인의 생각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유시민 작가는 진보 어용 지식인을 자처했다. 그리고 방송을 선택했다. 언어가 곧 프레임이고, 사고체계가 개인의 판단 구조를 지배한다는 사실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리라. 그는 자신만의 정치적 언어로 사회 하부구조에 조금씩 그러나 깊숙이 스며들고 있다.
인간은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이 있다. 정치는 곧 설득의 과정이다. 따라서 위와 같은 인간의 본능적인 거부감을 어떻게 제어하는가가 곧 정치 수완이자 정치력이다. 현재 대한민국은 ‘방송과 예능’이라는 형식에 ‘정치’라는 내용을 담아내어 시민들과 정치의 거리를 좁혀나가고 있다. 더 이상 방송은 전파를 타고 각 가정으로 도달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방송 내용은 급속도로 회자되고, 재생산된다. 동영상은 이미지로 편집되고, 압축된 언어로 공유되는 과정에서 공감을 얻으며 방송 정치는 일상의 언어로 자리 잡고 있다.
포스팅 정치: 정치 양극화에 기둥(post)을 세우다.
그러나 아직까지 정치 담론의 재생산은 열렬한 지지자들에 의해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재생산이 될수록 ‘편집성’이 강해진다는 점에서 과잉의 언어인 정치 언어를 극단으로 밀어붙인다. 결국 우리가 지향해야 할 한국 정치의 목표는 '자각의 정치'다. 스스로가 의식을 가질 수 있을 때, 정치인의 눈과 입을 빌려 형성했던 의존적 사고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자각의 정치란 결국 모든 생각이, 정치 현상이 상대적임을 인식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리고 상대를 '인정' 할 수 있는 능력이 뒤따라야 한다. 자각이란 정치를 자신만의 호흡으로 대하는 것이다. 자신만의 것을 갖기 위해서는 기준이 필요하다. 그 기준은 '경중'과 '맥락'이라는 단어와 같다. 이때의 경중과 맥락은 자신의 삶 속에 녹아있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나’라는 존재가 사는 '사회'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 '공명'이 생긴다. 공명은 곧 공생의 정치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떻게 사회 하부에서부터 '정치 공명' 현상이 발생하도록 만들 것인가. 우리는 '직업으로서의 정치'와 '소명으로서의 정치'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직업으로서의 정치’만을 생각한다면 ‘정치혐오’가 발생하기 쉽다. 하지만 정치 혐오는 일부 직업 정치인들이 원하는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관심은 국민의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들에게 표를 주는 유권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소명의식' 즉, 일상의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이를 위해선 국가 구성의 최소 기둥인, 가정에서부터 정치를 대하는 태도의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이념' 차원의 얘기가 아니다. 다름을 인정하고 차이를 존중하는 쌍방의 태도를 기르는 것이다. 정치의 범위는 제한이 없다. 복수의 존재가 모인 시공간 모두가 정치의 장소다. 그러한 장소에서 자각의 정치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대화'가 시작되어야 한다. 하지만 정치 대화는 어렵다. 부모와 자식 간의 대화 자체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정치 대화는 사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한다. 일시적 봉합 상태, 침묵의 안정은 세대 간극과 사회 갈등의 상처를 곪게 만들기 때문이다.
메신저로 소통하는 것이 일상화된 시대다. Posting은 생각의 차이를 잇는 시발점이다. 공유한 글을 같이 읽는 것만으로도 생활 정치는 시작된다. 포스팅은 곧 , 기둥을 세우는 것이다. 故신영복 교수는 동료 수감자가 집을 그릴 때, ‘기둥’부터 그리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기둥과 하중의 평형상태는 균형을 만든다. 정치의 하중은 포스팅으로써 가벼워질 수 있다. 형태의 제약은 없다. 반드시 제도권에 들어가 ‘특별한’ 행위를 할 필요는 없다. 정치는 특별하지도, 특별할 필요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활 그 자체여야 하는 것이다. 정치의 언어는 변하고 있다. 포스트 개인주의 시대의 정치 언어는 포스팅이다. ‘자각’을 위해 각자의 기둥을 세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