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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 ONE Mar 01. 2018

정치 대화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1

22. 행복의 정치, 썰전과 냉전 사이의 외줄 타기

"미세먼지 가득한 하늘 아래, 기침으로 졸린 몸을 깨우고, 지하철에서 들리는 말소리를 알아듣게 되어 책에 집중할 수 없는 데 맥락 없는 정치 소리까지 배경음악으로 깔릴 때면, 나 몰래 나오는 한숨이 다시 덴마크에 닿기를 바랄 때가 있다."

 


    Democracy. 민주주의라는 이 단어는 dêmos(people) krátos(power)의 합성어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는 사람의 힘으로 직접 자신들의 리더를 선출할 수 있었다. 아테네에 존재하는 생물 중 사람은 10-20%에 불과했는데 그 이유는 성인으로서 군 복무를 마친 아테네 남성만이 사람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죽지만 사람의 힘이 담긴 단어는 그렇지 않았다. '민주주의'는 올림픽의 성화가 아테네에서 평창으로 도착하듯 희미하지만 끈질긴 생명력으로 한국을 비추는 것처럼 보인다.



1. 전쟁 같은 대화, 정치를 얘기하다.

    불빛의 모양은 다양했다. Enlightenment, 계몽도 그중 하나였다.  빛을 비춘다는 의미의 계몽  손에 쥔 것이 태극기이든 촛불이든 가리지 않았다.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심화되는 갈등의 불꽃이 강해지는 게 문제였다.  필자도 이런 시류를 피할 수 없었다. 보통 사람들은 정치 얘기가 밥 먹여주냐며 회피하려고 한다. 이 말은 일상과 괴리된 정치 현실을 정확히 꼬집는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접점을 찾지 못한 대화가 산으로 향하다가 결국 활화산이 되어버리는  불편한 상황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을 회피하고자 대부분 사람들은 대화를 멈춘다. 그러면  편해진다. 일시적으로.


    하지만 필자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대화를 나누다 큰 소리를 내시며 더 듣기 싫다는 아버지의 반응은 정치 성향과는 다른 문제였다. 대화 상대로서 존중받지 못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이 감정을 직접적으로 얘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신뢰 있는 대화 상대로서의 모습을 보이고자 Tvn에서 주최하는 대학토론배틀에 참가신청을 했다. 논리력으로 진정성을 보여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아진 것은 없었다. 일찍 탈락해서 그랬는지, 격변의 시국이 잠잠해져서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정치 대화 자체를 회피하고 서로에게 조심하려다 보니, 어느 순간 내게 남은 건 가족의 근황과 안부를 묻는 것뿐이었다.


2. 왜 가난한 사람이 부자를 위한 투표를 할까?

    필자가 정치를 논할 때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현상은 '왜 가난한 사람이 부자를 옹호하는 집단을 지지하는가'였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제 손으로 가난의 굴레를 악화시키는 비이성적인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했다. 그러던 중 조지 레이코프의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를 읽고 모든 의문이 풀렸다. 본인은 당연히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투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따라 투표한다. 그래서 이익 극대화가 아닌, 투표를 통해 '자기실현'을 재현(representation)하고자 하는 것이다. 정치인이 국민들의 대리인이자 대표(representative)인 이유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누군가는 정치 대화의 핵심을 '설득'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래서 이성적인 주장과 논거로 상대방을 이기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때의 근거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설득력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다.  그 내용이 논리적이라고 할지라도 결코 상대방의 태도와 의견에 영향을 줄 수 없다. 개인의 가치관은 환경에 따른 축적된 정체성에 기인한 것이지 논리로 쌓은 지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Robb Willer도 [HOW TO HAVE BETTER POLITICAL CONVERSATIONS?] 제목의 Tedtalk에서 이를'moral value'라는 용어로 지적한다. 예를 들면, 일반적으로 보수주의자(conservative)들은 환경 문제에 관해서 진보주의적 논거가 포함된 글보다 중립적인(moral purity) 글을 읽었을 때, 더욱 친환경적인 정책을 지지한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연사는 "If you want to persuade someone on some policy, it's helpful to connect that policy to their underlying moral values."라고 언급하면서 자신의 논리가 아닌 그들의 논리 - 기저에 깔린 그들의 태도와 정체성 - 이해하고 설득을 시도하자고 말한다.


    하지만, 상대방의 입장이 현저하게 잘못되었다고 느껴 논리적으로 설득하고 싶다면? 그때는 Moral reframing을 해야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19대 대선후보 토론 때 홍준표 후보의 질문 <동성애를 찬성하십니까 반대하십니까>에서 비롯된 당시 문재인 후보와 심상정 후보의 답변 차이다. 당시 문재인 후보는 [Yes or No]에서 답하는 것이 아니라  심상정 후보처럼 동성애는 찬성과 반대의 문제가 아니라는 새로운 프레임을 제시했어야 한다. 그래야만 이미 홍준표 후보가 설정한 프레임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머리로 동의한 것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르다. 그래서 우리의 정치적 선택은 자신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https://www.ted.com/talks/robb_willer_how_to_have_better_political_conversations/discussion)


3. 썰전과 냉전 사이의 행복 대화

     문제는 정체성이라는 것이 결코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SNS의 발전은 양극화를 심화시켰다. 여러분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팔로우 취소하였는가? 나와 맞지 않는 사람들과 단절한 만큼 생긴 공간을 페이스북 광고가 차지할수록 우리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 SNS는 나와 타인의 연결이 아닌 나와 비슷한 또 다른 나와의 연결을 심화시켰고 우리가 아닌 '무리'를 양산했다.


     같은 것을 항체를 초래하지 않는다. 무리의 의견은 중도를 모르고 극단을 향하며, 주장의 무결함을 강조하다가 대중과 멀어진다. 그래서 필자는 우리 사회에서 누구나 고민하면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주제로 대화를 시작하는 게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맞다. 바로 '행복'이다. 일상의 고민이자 평생의 고민이며, 빈부를 가리지 않는 보편의 주제가 바로 '행복'이라는 가치인 것이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행복한 대화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른 주제를 다루기 위해서 우리는 행복 자체를 논해야 한다. 로스쿨을 합격한 친구에게 행복한 모습을 묘사해보라고 했다. "혼자 방에서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노놓고 스타크래프트를 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로스쿨생 답지 않은(?) 답변이라고 생각하시는가? 하지만 이 친구가 평생을 공부 압박에 시달리며, 스스로 채찍질한 후 합격의 기쁨을 얻었을 때, 술잔이 부딪히며 빚어낸 감정은 행복이 아닌 해방감이었다. 


  행복을 주제로 글을 쓰고, PT도 하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은 점은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난 19대 대통령 선거까지, 10년 지기 친구들과 때론 목청 높이면서 얘기도 했지만, 우리 4명이 지지한 후보는 모두 달랐다. 어느 한 명도 "그 후보는 별로야, 너는 도대체 왜 그 사람을 찍는 거야?"와 같은 말을 하지 않았다. 각자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와, 친구의 삶 그 자체를 이미 진심으로 존중했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살고, 여행도 하면서 만난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 느낀 건 국적, 인종, 직업이 무엇이든 사람들의 고민은 대부분 비슷하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잘 사는 것일까, 무엇이 행복한 삶일까'의 질문들은 형태를 가리지 않았다. 다만,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것처럼 행복 담론을 정치 대화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했다. 냉전보다는 썰전이 낫다. 대화는 가능성이라는 성을 짓는데 필요한 주춧돌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떻게 쌓을 것인가다. 23번째 글쓰기 [포스트 개인주의 시대의 새로운 정치 언어 : 포스팅 정치]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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