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독서] 바딤 젤란드 - 리얼리티 트랜서핑

리얼리티 트랜서핑과 양자중력의 시간 속에서 길 잃은 나

by AND ONE
새로운 삶을 선택하는 방법,
그저 원하는 대로 살면 된다
사람은 정확히 자신이
선택한 것을 얻게 될 것이다

설 연휴의 마지막, 새로운 삶을 선택하는 방법에 관한 책을 읽었다. [리얼리티 트랜서핑] 1,2,3권과 카를로 로벨리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움베르트 에코의 수필집과 노자의 도덕경 몇 구절 등.. 몇 년째 내 삶의 명확한 목표를 찾지 못한 채 계속 읽는다. 계속 읽는 삶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다만, 삶은 그냥 흐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로랑스 드빌레르의 책 제목처럼 모든 삶은 흐른다고 믿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허나 기다리고 싶다. 내 영혼의 목소리를 통해 주어지는 생각을. 자발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계시처럼 주어지는 생각을 기다리고 있다. Given thought, 명확한 목표. (명확한 목표라는 건, 과거 정주영 회장이 "조선소를 지어야겠다"라는 것과 비슷할 테다. 이미 사업적 성공을 거둔 그가 조선소를 왜 지어야 된다고 생각했을까? 왜 일론 머스크는 "인류는 화성에 가야 한다"라고 믿는 것일까? 이미 충분한 사업적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말이다. 그건, 특정 인간에게만 주어지는 '명확한 목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일상성은 과대평가되어 있다. 한 사람의 힘만으로는 일상, 주변을 감싸는 에너지를 극복하기 어렵다. 그럴 때, 우리는 나에게 도움을 줄 사람을 찾는다. 그건 쉬운 선택이다. 주변을 감싸는 에너지를 극복하기 어려울 때, 역설적으로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자발적 고립. 영혼 에너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그 에너지를 주변에 발산하며, 내 주위의 환경을 스스로 바꿔내는 것. 어느 순간, 내가 살고 싶은 모습을 '내가 선택하고 실현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는 것. 믿음을 넘어 그것을 알게 되는 것.


나의 무의식을 지배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기운을 느끼려고 하는 것. '비과학적'이라고 여겨지는 모든 현상들에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초월성을 느끼는 것. 설명할 수 없음을 설명하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설명되도록 만드는 것. 우주의 시작, 태초에는 '낮은 엔트로피' 상태였다는 가설을 통해 미래는 높은 엔트로피, 복잡성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결국 삶이란,
나 자신을 어떤 '가설' 위에 두고
스스로에 대한 관점을
형성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결국 삶이란, 나 자신을 어떤 '가설' 위에 두고 스스로에 대한 관점을 형성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관점은 결코 자연히 형성될 수 없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고, 일어날 일은 일어날 것이다. 자연은 균형이다. 균형의 회복을 위해 작용과 반작용이 존재하고, 뜨거운 상태에서 차가운 상태로의 이동의 에너지의 흐름을 만든다.


허나, 자연의 원리와 나의 운명을 선택하는 삶의 방식, 우주의 원리, 시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공부가 내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새로운 세상은 이미 어릴 적 꿈에 오래된 미래처럼, 과거부터 존재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린, 현실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나의 미래에 잠시 빗겨 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어린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삶을 다시 어린 시절과 비슷하게 만들어 보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 솔직해져 보고, 책임감과 의무감을 느끼지 않고, 그저 살고 싶고 하고 싶은 것에 대해 자기 검열을 하지 않고, 타인의 시선과 평가를 의식하지 않는 일. 허나 중요한 건, 자기 확언(manifesting)을 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될 수 있다고 자기 최면을 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최대한 자연과 비슷한 상태로 회복했을 때, 들려오는 소리를 포착하는 것. 그게 어쩌면 우리가 우리의 미래를 예측, 아니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나의 과거이자 미래, 그리고 지금도 시시각각 바뀌고 있는 현실을 사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혹시라도 이 글을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이라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필자 본인도 이 글을 스스로 이해하면서, 독자를 생각하면서 쓴 글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끔은 그냥 무언가를 써야 한다고 느낀다. 그런 자연적인 의무 같은 것들이 내 삶에 하나씩 쌓이다 보면, 어떤 계시처럼 명확한 목표가 떠오르지 않을까 - 하는 마음으로 쓴다.



항상 연필로 밑줄을 그으며 책을 읽는다. 밑줄은 세상과의 만남이다. 밑줄을 긋는 행위는 본인이 어떻게 세상을 보는지에 대한 '인식'의 영역에 속한다. 책을 다 읽은 후 다시 한번 밑줄을 보며, 그때의 생각과 느낌을 반추하는 행위의 반복은 곧 자신만의 '의식'이 된다. 이러한 연유로 밑줄 긋기는 나만의 독서 의식이 되었고, 밑줄은 세상과 나를 잇는 선으로써 'MEETJUL'이 되었다.

[1권]

트랜서핑은 자신의 운명을 골라잡는 방법이다.

행복을 얻기 위해서 세상과 싸워야 한다는 게 얼마나 힘겨운 일인가? 세상이 양보해주지 않으면 또 싸워야 한다.

만질 수 있는 모든 것은 만질 수 없는 에너지로부터 비롯된다.

일어난 모든 일은 사라져버리지 않고 남아 있다. 현재란, 가능태 공간 속의 특정 구역이 인생 트랙 위에서 실현된 것이다.

사람은 정확히 자신이 선택한 것을 얻는다.

가능태 공간 속 시나리오의 내용을 고칠 수는 없다. 오직 다른 시나리오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분명 우리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다.

의무감도 죄책감의 한 형태다.

두려워하거나 혐오, 경멸하는 것과 같이 당신이 꺼리는 것들은 계속 따라다닐 것이다. 피하려는 욕구가 강해질수록 그걸 갖게 된다.

선택하기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려면, 거부하기를 먼저 배워야 한다.

거부하기 위해서는 ‘받아들임’이 필요하다.

모든 것이 균형을 향해 움직인다.

어떤 평가에 지나치게 많은 의미와 중요성이 부여될 때, ‘잉여 포텐셜’이 발생한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단점 극복을 위해 자신과 싸운다. 허나 자신의 불완전함을 숨기고 제거하려는 노력은 정반대의 상황을 낳는다.

균형력의 작용은 어린이에게 뚜렷하게 나타난다. 에너지 변화에 더욱 민감하여 자연스럽게 행동하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아이가 칭찬을 너무 받으면 그는 심술을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당신이 아이에게 비위를 맞추기 시작하면, 그는 당신을 경멸하거나 최소한 존경은 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이를 손님처럼 대하고, 선택의 자유를 준다.

당신의 애정 어린 감정이 응답받기를 원한다면, 사랑 받기를 애쓰지 말고 그저 사랑해야 한다.

정의감은 우리로 하여금 사람들을 비난하도록 끊임없이 부추긴다.

비난 행위의 결과로 자신의 주변에 잉여포텐션을 낳게 된다. 비난받는 사람이 나쁘면 나쁠수록 당신은 더욱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람을 경멸하지 말라. 균형력의 작용에 의해 당신도 비난받는 사람과 동일한 위치에 놓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경멸과 허영은 인간의 악덕이다. 동물들은 경멸과 허영을 모른다.

흔히들 문제는 세상에 불가피한 것으로 여겨지나 문제를 겪는다는 것은 이례적이고 비정상적인 현상이다.

어느 단체에서든, 리더가 되는 사람들은 자신의 신조에 따라 사는 사람이다.

원하는 대상과 의존적인 관계에 빠지면 결국 탈진할 것이다. 결국 당신은 아무런 성취없이 욕망을 포기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균형’을 찾게 된다.

‘언제나 모든 것에 책임을 느끼는’ 타고난 성향에서 ‘근거없는 죄책감’은 가장 큰 잉여포텐셜을 낳는다.

자연은 정의감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끝없는 불행에 시달리는 사람은 죄책감을 타고난 착한 사람들이다.

누군가가 죄책감을 받아들일 기미가 있어보이면 조종자는 흡혈귀로 변신한다. 조종자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죄책감 느끼기를 거부하기만 하면 된다’. 그 누구에게도 자신을 정당화 할 필요가 없으며, 누구에게도 어떤 빚을 지지 않았다.

(그래서) 통치자, 지도자들에겐는 죄책감이 거의 발달되어 있지 않거나 존재 않는다. 양심 없는 사람들에게 죄책감은 낯선 개념이다.

죄책감의 반대는 ‘대담함’이다. 용감한 사람은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 않는다. 그들은 두려워할 게 없다. 그들 내면의 재판관이 그들 스스로를 이미 옳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죄책감 해소를 위한 방안을 발명했다.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한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위엄의 열쇠는 죄책감이 없는 데 있다. 개인의 진정한 힘은 타인의 목을 조르는 능력이 아니라, 죄책감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 지에 달려 있는 것이다.

누구든 자신의 목표를 추구하기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 돈은 생각하지 말라. 당신이 원하는 목표에 대해서만 생각하라.

돈을 쓰기로 결정했다면 나중에 그것을 후회하지 말라. 돈을 가능한 적게 써서 조금이라도 아끼려고 애쓰면 잉여포텐셜만 가득해진다.

삶에 대해 단순한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다. 무시하지도, 과장하지도 말라. 사람들이 좋은지 나쁜지 생각 말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유머란 곧 중요성의 거부이며, 풍자요 조롱이다.

소리 내어 뱉은 말은 그저 공기의 진동일 뿐이고, 혼잣말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신념은 비록 들리지는 않더라도 강력한 에너지다.

궁색한 자에게 부는 안락지대가 아니다. 부유함이 불편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이 모든 것으로부터 너무 동떨어져있기 때문이다. 궁색한 사람은 오직 부의 표면만 바라본다.

사람들은 어처구니 없게도 공격성을 힘의 상징으로, 불만을 정상적인 반응으로 여기고 있다.

상식적인 추론이 결코 올바른 해결책을 보장하지 못한다. 문제는 자신의 기분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느낌보다 논리적 근거를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영혼의 상태에 집중하는 법을 잊게 된다.

간청하는 자는 더 높은 힘에 호소하지만, 그 힘은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다.

이 일을 하는 가장 ‘단순한’ 방법은 무엇일까? 먼저 지켜보고, 다음 행동하라.

만일 “그렇다” 라고 말하기 위해 자신을 설득해야 한다면, 그것은 영혼이 “아니라”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일어난 일, 변화 시킬 수 없는 일에 대해 비판하지 말라.

영리한 사람은 타인의 실수를 통해 배우고, 바보들은 자신의 실수에서 배웁니다.

당신이 세상과 싸우면, 세상은 당신과 싸웁니다. 당신이 싸움을 멈추면, 세상이 다가와 당신을 맞이할 것입니다.

참된 지식은 느닷없이 저절로 나옵니다.


[2권]

꿈은 ‘환영’이 아니다. 마음은 꿈을 상상해는 게 아니라 실제로 보고 있다.

영혼은 당신의 생각과 기대에 어울리는 가능태 시나리오를 선택한다.

내부 의도는 목표를 움직여가는 과정에 집중하는 것이다. 외부 의도는 목표가 스스로 실현되는 이치에 주의를 모으는 것이다. 내부 의도는 목표를 성취하고, 반면 외부 의도는 목표를 선택한다.

믿음은 의심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깨어 있는 의식은 통제와 지배를 위한 것이 아니라 관찰을 위한 것이다.

자신의 운명을 책임진다는 것은 짐이 아니다. - 그것은 자유다.

선택받은 사람들은 다름 아니라 자기가 스스로 자신을 선택한다.

고요한 명료함, 뭔가를 믿지 않고 아는 것, 주저 없는 자신감이 바로 영혼과 마음의 일치 상태다.

영혼과 마음이 합치면 못할 일이 없다. (’근거 있는’ 주장의 틀 속에는 당신은 얼마나 대단한 성과를 이뤘는가?)

위대한 배우들은 모두 자신을 연기한다.

어쩌면 당신은 ‘건강하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조차 모를 수 있다. 그건 삶이 기쁨을 가져다주는 상태이며, 당신은 모든 것을 원하며 그것도 한꺼번에 다 원하는 상태이다. 영혼은 원한다.

자신을 설득해야 한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의 것이다.

목표를 이룰 방법을 놓고 고민한다면 오히려 그는 실패의 트랙에 주파수를 동조하고 있는 것이다. 오로지, 목표 그 자체에 대한 생각만 시작할 때,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정주영이 조선소를 지었던 것처럼)

나는 삶을 잔치로 바꿔 놓을 어떤 것을 찾고 있다.

어떤 경우에도 목표에다 모든 것을 걸어서는 안된다. 불운으로부터 안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영감은 당신을 찾아오지 않는다. 단지 중요성의 포텐셜이 사라질 때, 그저 드러나는 것이다.

위무위(爲無爲) : 함 없이 하라.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트랜서핑의 다른 이름. - 노자 <도덕경>


[3권]

이미 동화된 에너지를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는 것이 훨씬 더 쉽다. 소위 에너지 뱀파이어들이 이용하는 방법이 이것이다.

조종자가 희생자의 주파수에 동조하는 것은 누워서 떡 먹기다. 그 배후의 메커니즘은 아주 간단하다. 그 사람이 걱정할 만한 문제를 지나칠듯이 슬쩍 건드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는 즉시 자신의 에너지를 갖다 바칠 것이다. (조종자는 사람들의 죄책감을 잘 갖고 논다)

에너지를 축적하려고 하지 말라. 대신 에너지가 반대 방향의 두 흐름을 당신의 몸속을 자유롭게 통과하도록 허용하라.

자신의 중요성을 끌어올리는 게임을 멈추라. 대신 상대방의 중요성을 끌어올려 주는 게임을 하라.

자신에게로 주의를 끌어오고 싶다면 주위의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상대방에게 관심을 보여주면 그의 내부의도가 실현된다.

당신의 장단점은 당신의 파트너에게는 가장 덜 중요한 것이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중요성’을 느끼는 것이며, 당신과의 교제로부터 그것을 얻는 것이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이 매력적인 대화 상대라는 것을 스스로 실감할 기회를 주는 것을 목표로 삼아보라. (매력적인 대화 상대로 보이려는 노력 대신)

당신의 내부의도는 당신이 중요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오로지 당신의 내부 의도를 버리고 상대방의 내부 의도가 실현되도록 허용할 때만 당신은 정말 남들이 보기에 중요한 존재가 된다.

일어나기로 되어 있는 일들은 때가 되면 일어난다.

논쟁하는 사람들은 보통 그 게임에 푹 빠져 있다. 만일 당신이 논쟁에 이겼다면 당신이 진 것으로 생각하라. (상대방이 공식적으로 당신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마음속으로는 자기가 옳다는 것을 보여줄 비공식적인 증거를 무수히 찾아내려 할 것이다)

결점을 가지는, 그리고 필요한 장점을 갖추지 않는 사치를 자신에게 허용하라.

자기 과신은 단지 내면으로 방향을 바꾼 소심함일 뿐이다.

자유를 얻은 사람에게는 더 이상의 자신감의 도움이라는 환상이 필요 없다.

인간을 복종시키는 데는 물리적인 힘이 필요 없다. 인간에게 자신의 자유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할 필요가 없는 그런 세계관을 형성시켜주기만 하면 충분하다.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스스로 다짐하지 말라. 최후의 선언으로 스스로 덫을 놓지 말라.

그들이 잘하는 유일한 짓이란 자신의 극심한 두려움을 알아차리는 일이다. 비관주의자들이 최악의 경우를 두려워하는 데서 즐거움을 찾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들이 완벽하게 해낼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자신의 비관적 태도를 뒷받침할 증거를 찾아내는 일이다.

지나간 것은 되찾을 수 없다. 하지만 어두운 삶의 터널을 지나느라 잃어버렸던 새로움, 희망과 행복의 그 신선한 느낌은 되찾을 수 있다. 목표를 향해서 가는 것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쁜 것은 좋은 것을 뒤따라 올 수 없습니다. 실제로 좋은 것을 뒤따라 오는 것은 오히려 더 좋은 것이었습니다.

당신의 의문에 대한 답을 다른 사람들이 쓴 책에서 찾아내려는 짓을 대담히 그만두고 자기 자신을 향해야 합니다. 마음이 세상의 지혜를 찾고 있는 한 당신은 언제나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영원히 배우는 자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방향을 바꾸십시오. 당신의 마음이 영혼을 향하게 하고 거기서 당신의 모든 의문에 대한 답을 얻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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