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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연말에 겨울 바다가 필요한 이유

[밑줄독서] 로랑스 드빌레르 - 모든 삶은 흐른다

by AND ONE
인간은 이러한 비참한 상태에 놓였는데
어떻게 우리는 이에 절망하지 않는지 감탄마저 든다
<파스칼 - 팡세>

한 해를 정리하는 인간에게 밤은 언제나 슬프게 다가옵니다. 반복되는 일상에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잠시동안의 '휴가'로 기분 전환과 내년을 준비하는 것이지요. 나라는 인간은 이토록 비참한 상태에 놓였음에도 절망하는 방법을 잃은 지 오래입니다.


오랜 세월 꾸준히 해온 것이 있습니다. 연말이 되면 바다를 보는 것이죠. 낙조와 일출은 거들 뿐입니다. 오직 내게 필요한 색깔은 파랑입니다. 그중에서도 겨울 바다의 파랑을 최고로 칩니다. 윤슬을 걷어낸 짙은 파랑이 무채색 숲을 품고 있을 때, 파도가 건네는 말이 들립니다.

누구에게나 삶은 유한하게 단 한 번이지만,
영원히 마르지 않고 사라지지 않을 바다를 보고 있으면
우리의 삶도 바다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는 게 아닐까 착각하게 된다.
<로랑스 드빌레르 - 모든 삶은 흐른다>

겨울바다가 묻습니다. "너 울고 있니?" 라며. 너울성 파도가 집어삼킬 듯 밀려 들어옵니다. 그러곤 다시 묻습니다. 해가 지날수록 삶이 무채색 필름처럼 보이는 이유가 무엇인지. 나는 답합니다.


세상이 모노톤으로 보일 때,
온 세상을 팔레트처럼 쓸 수 있다.
기존 세계에 색이 바래는 순간,
무언가를 바라는 나의 마음이
선명하게 보일 수 있다고

바다에 인생을, 바다에서 철학을 노래한 프랑스 작가, 로랑스 드빌레르 <모든 삶은 흐른다>의 문장들을 마주합니다. 인생의 문제 중 상당수는 '마주'하기만 하고 '마무리'를 짓지 못하는 것에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25년 9월에 읽었던 책이었음에도, 1년 전에 찾아본 김지수 작가와의 인터뷰를 따로 찾아봤으며, 독서노트 정리를 위해 옮겨 놓은 밑줄 문장들이 있음에도 최근 3개월 간 내게 남은 기억이라곤 "작가가 인생의 철학을 바다에 빗대 잘 표현했다"라는 감상평뿐입니다.


하지만 실망하지 않습니다. 몇 년째 반복되는 일이기 때문일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겨울 바다를 마주한 연말이 되면 나는 비관보다는 낙관을, 낙관보다는 달관을 씁니다. 이상하리만큼 절망적인 현실에서도 희망이 차오를 수 있는 이유는 저 멀리 굽이치는 파도 때문이겠지요. 부서진 파도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알기에 나는 파도의 움직임에 집중합니다. 바다의 시간에서는 시작과 끝을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할지도 모릅니다. 오직 그 움직임,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파랑의 모습에서 삶의 원근감을 회복하는 것. 오직 그것만이 우리들의 연말에 필요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한 해의 마무리를 앞둔 그대에게, 떠납시다! 바다로. 아침 댓바람부터 볼 살이 틀 때까지 찬바람 맞으며 희망으로 가득 찬 노래를 부르고 싶은 사람들이여, 떠납시다! 설령 그 바다가 우리에게 무언가 줄 수 있는 게 없다고 느껴질지라도. 오직 온몸으로만 감각할 수 있는 해풍을 맞으며 나만의 태풍 속 고요를 찾기 위해 나아갑시다. 한 권의 책과 함께.

'물결과 위험과 파도에 몸을 맡기고 먼바다로 나아가자
먼 곳으로 가자, 다른 곳을 향하여 가자
떠나자, 떠나자, 완전히 떠나는 거다!
내 몸 안의 피는 날개 없이 떠나기를 열망한다.
<페르난도 페소아> - Ode maritime (바다의 시가)


항상 연필로 밑줄을 그으며 책을 읽는다. 밑줄은 세상과의 만남이다. 밑줄을 긋는 행위는 본인이 어떻게 세상을 보는지에 대한 '인식'의 영역에 속한다. 책을 다 읽은 후 다시 한번 밑줄을 보며, 그때의 생각과 느낌을 반추하는 행위의 반복은 곧 자신만의 '의식'이 된다. 이러한 연유로 밑줄 긋기는 나만의 독서 의식이 되었고, 밑줄은 세상과 나를 잇는 선으로써 'MEETJUL'이 되었다.

바다는 인생이다. 파도처럼 넘실거리고 소용돌이치며 밑물과 썰물처럼 오르락내리락하지만, 곧 잔잔하게 빛을 담아 환하게 빛나는 것. 우리의 삶도 그렇게 소란하게 흐른다.

누구에게나 삶은 유한하게 단 한 번이지만, 영원히 마르지 않고 사라지지 않을 바다를 보고 있으면 우리의 삶도 바다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는 게 아닐까 착각하게 된다.

지구가 자신만의 왈츠를 추기 시작한다. 바로 지구만의 뚝심 있는 일상, 바로 자전운동이다.

파도가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보면 파도가 전하는 진실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새롭게 도약하는 힘, 회복할 에너지를 찾을 수 있다는 진실이다.

수많은 연주자는 실제로 교향곡을 작곡한 적이 없어도 자기만의 곡으로 연주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파도의 주인이 아니면 어떤가. 파도를 지배하는 주인은 아니어도 당당히 항해할 수 있다.

바다의 시간은 그저 계속해서 다시 시작되는 시간이다.

열정적인 상어는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있다. 상어는 같은 바다를 두 번 헤엄치지 않는데, 관성에 빠지지 않고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런 상어를 보면 우리를 돌아보게 된다. 우리가 항상 하던 일을 계속해야 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이 우리에게 변화를 두려워하게 하고, 새로운 습관을 갖는 걸 방해하는 걸까?

바다에 있으면 더 이상 서서 주변 세상을 내려다볼 수 없는데, 그래서 오히려 우리가 세상의 '조각'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우리는 마치 시간과의 경쟁에 참여한 선수들처럼 바캉스를 보냈다. 바캉스는 되찾은 낙원이 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번잡한 사회생활, 건물, 도심을 피해 해변에 왔지만 오히려 해변을 새로운 도심으로 만들려 한다.

바닷가에서는 오직 바다만 경험해야 한다. 온몸으로 황홀감을 맛봐야 한다. 바다만큼 모든 감각을 자극하는 즐거움을 주는 것은 드물다.

바다도 사랑처럼 위로가 되면서 절망이 된다. 바다도 사랑처럼 기쁨을 주면서 모욕감을 준다. 사랑은 무엇인가를 주면서도 그만큼 빼앗아간다.

가장 아름다운 푸른색은 바다의 짙은 푸른색이 아닐까? 바다의 짙은 푸른색은 검은색이 칠해진 과거처럼 장엄하고 비밀스러운 상처와 같지 않은가? 인생을 푸른빛으로 본다고 해서 환상에 사로잡히는 것은 아니다. 칙칙한 일상을 빛낼 무엇인가를 끌어내어 삶의 기쁨을 찾는 것이다.

나에게 꼭 붙어 있는 신성한 닻은 역설적으로 가장 큰 자유를 안겨준다. 물결이 아무리 강해도 닻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얻을 수 있는 자유다.

바다에서 무언가를 결정한다는 건 위험과 마주하고 불확실한 상황에서 결단을 내리는 것이다. 애매한 결정은 없다. 빠르게 판단하고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결정해야 한다. 그래서 선원들이 생각하는 '완전한 삶'은 우리와 다르다. 그들은 언제나 '올인'한다. 자유로운 선원은 어느 것에도 지배를 받지 않는다. 그들은 순응적이지 않기에 남과 억지로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 바다는 선원들에게 이런 태도를 어떻게 선물한 걸까? 다른 사람들의 기대대로 움직이지 말고, 가택연금에 묶여 있는 삶은 거부하자.

분노하는 사람들은 혼란을 원하지 않는다. 원하는 것은 질서다. 원래의 질서로 되돌려놓겠다는 마음에서 분노는 시작된다.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한 특별한 방법은 없다. 그저 분노가 가라앉을 때까지, 파도가 잔잔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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